상춘곡의 무대, 칠보를 찾아서

2016.04.23 05:35

김현준 조회 수:137

상춘곡의 무대, 칠보를 찾아서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 현 준

아내가 제주도로 봄 여행을 떠났다. 혼자 있는 시간을 잘 활용하려고 며칠 전부터 궁리했다. 고향에 다녀온 지 몇 달이 지난 터라, 혼자 조용히 고향 길을 걷고 싶어 정읍 칠보로 갔다.

고향 마을에는 비석거리가 있다. 마을 앞 남북으로 뚫린 신작로 한편에 십여 평쯤 되는 공터가 있고, 그 가운데에 비석이 서 있다. 언제 세워졌는지 몰랐지만, 어릴 적부터 보았었다. 비문이 한자로 새겨져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비석 윗부분에 ‘불우헌(不憂軒)’이라는 한자 글씨가 쓰여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틈이 나면 친구들과 비석거리에서 놀았다.

불우헌 정극인은 영광 사람 충무시위 사중령부사 정곤의 아들로 경기도 광주 두모포에서 태어났다. 세종 11년 스물아홉 살 때 생원시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학관(學館)으로 재직할 때, 흥천사 주지 행호를 멀리하라고 극간했다가 왕의 진노를 샀다. 황희 정승의 구명으로 죽음을 면하고 귀양살이를 한 뒤 풀려났다.

그 뒤 낙향하여 초당을 불우헌(不憂軒)이라 하고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단종 때 늦은 나이로 문과를 거쳐 예종 때 6품 정언(正言)에 이르렀다. 성종 원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처가가 있던 태인(현재 전북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남전마을)에 은거하여 젊은이를 훈회(訓誨)하고 향약을 만들어 풍속을 바르게 세우는데 힘썼다.

성종 2년에 시폐를 논한 상소문을 올리자, 왕은 그가 청렴하고 영달을 구하지 않으며, 향촌의 자제를 모아 교회불권(敎誨不倦)한다 하여 삼품(三品)을 가자(加資)하는 은전을 내렸다. 이에 감읍하여 ‘불우헌가’와 ‘불우헌곡’을 지었다. 성종 12년 향년 81세로 타계하였고, 칠보의 무성서원에 봉향되었다.

정극인이 지었다는 <상춘곡>은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효시로 알려졌는데, 그의 문집 불우헌집에 전해온다.

홍진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고/ 옛 사람 풍류에 미칠가 못 미칠가.

천지간 남자 몸이 나만한 이 많건마는/ 산림에 묻혀있어 지락을 모르는가.

수간모옥을 벽계수 앞에 두고/ 송죽 울울리에 풍월주인 되었어라. (중략)

공명도 날 꺼리고 부귀도 날 꺼리니/ 청풍명월 외에 어떤 벗이 있겠는가.

단표누항에 헛된 생각 아니 하네/ 아모타, 백년행락이 이만한들 어찌하리.

고향 마을 앞의 불우헌 비석은 성황산 아래 ‘상춘곡 공원 거리’로 옮겨졌다. ‘증 예조판서’라는 큰 글씨 아래 정극인의 행장이 자세하게 적혀 있고, 상춘곡 전문과 연표가 나란히 새겨 있었다.

내 증조모는 영광정씨셨는데 혹 불우헌의 후손은 아닌지, 적어도 같은 정씨 집안인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내게 불우헌 선생의 DNA가 얼마쯤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문인의 피가 흐른다면 수필을 더 잘 쓸 수도 있을 것 같아 흐뭇했다.

불우헌 선생은 칠보 남전마을에 살면서 고을 선비 정진, 송연손, 김윤손, 김화우 등과 함께 최초의 민간 주도 향약인‘고현향약’(보물 1181호 지정)을 창립했다. 향음례와 4대 덕목인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와 환난상휼을 실천하자는 약속이었다.

혼인을 하거나 부모처자 초상 때 백미를 부조하고, 70세 이상이 되거나 과거에 합격하면 예를 표하며, 회의 때는 술을 석잔 이상 마시지 않는다는 등 많은 규례가 적혀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올해 칠순이니 동약이 지속되었다면 초대를 받아 대접을 받을 텐데, 고향의 동갑내기 동무들과 함께 할 자리이니 얼마나 즐거울까.

우리 집에는 할아버지 때부터 전해오던 《고현동약지》두 권이 있는데, 한문 실력이 딸려 능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해마다 남전마을에서는‘고현향약 추진위원회’주관으로 향음주례 행사를 시연하면서 청소년들에게 바른 음주의 예를 가르치고 있다. 마을의 덕망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자리를 정하여 앉고, 법도에 맞도록 술잔을 돌려 마시게 하는 화합과 친목의 음주교육이다. 자그마치 6백년이 넘게 이어온 선인들의 가르침이니, 나의 청년 시절에 향음주례를 배웠더라면, 술로 인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쉽다.

성황산 자락 송정(松亭) 주변의 소나무들은 어느새 백 년 노송의 위엄을 뽐내고, 잡목으로 우거진 산길은 귀향객의 발걸음을 더디게 했다. 인근의 백련(白蓮) 연못에는 묵은 연 가지가 어지럽게 굽어있고, 동진강으로 흐르는 개울에는 송사리, 피라미가 떼를 지어 놀았다. 내 어린 시절 동무들과 뒤쫓던 물고기였다. 신록이 무르익는 성황산과 동진강 물줄기, 너른 들녘은 상춘곡의 무대가 아닐까싶어 감회가 새로웠다.

바야흐로 봄을 맞은 고향 마을에선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농부들의 일손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2016.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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