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숨소리<토요연재7>
2009.05.15 17:55
애경은 나를 보고 그렇게 반가워할 수가 없었다. 나는 왠지 좀 서먹서먹했다. 그녀의 차림새에 비해 내 꼴이 너무 초라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팔짝팔짝 뛰면서 내 손을 잡아끌고 마켓 옆 빵집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신상조사를 하듯이, 언제 미국엘 왔느냐, 어느 학교에 다니며 어디에 사느냐, 등등 말을 속사포로 쏟아놓았다. 그녀의 태도와 말투에는 진실된 반가움이 담겨져 있었다. 그녀는 공부하고는 원래가 인연이 멀어 커뮤니티 칼리지에 적만 두고 그냥 왔다갔다 한다면서 깔깔대고 웃었다. 부모님은 UC계열의 학교로 전입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나 자기는 그런 건 개의치않고 그냥 재미나게 살고 있단다. 부모님이 사는 집에 방이 남아돌아가는데도 그녀는 따로 나와 살고 있었다.
처음 만나는 그날 애경은 언니인 강미경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 집은 언니가 부모의 꿈을 다 이루어주고 있으니 난 이대로가 좋아. 우리 집에선 언니는 하늘이고 나는 땅이야.”
사는 것이 신바람이 나 죽겠다는 듯이 희열이 차 재잘거리다가 언니가 나오는 대목에선 음성을 낮추며 그녀는 쓸쓸히 웃었다. 그 후부터 애경은 내 비좁은 싱글 아파트에 수시로 들락거렸는데, 한번은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우중충한 어느 날이었다. 백화점엘 가서 옷을 사야 하는데 내가 좀 봐 줘야 한다며 우기는 통에 따라 나섰다가 그녀의 집까지 가게 된 것이다. 나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비싼 동네에 살고 있었다. 주위가 너무나 고요했다. 희뿌연 회색 하늘을 등지고 선 아파트의 둔중한 몸집이 나를 압박해 왔다. 주차장에는 사람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았고, 차들이 무덤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아파트 문을 열자마자 나는 그만 놀래서 나가자빠질 뻔했다. 뭐가 그렇게 꽉꽉 들어찼는지 집안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녀는 백화점에서 산 옷들을 꺼내지도 않고 쇼핑 백째로 구석에 휙 던졌다. 뭔가 쌓여 있는 위에 옷이 바깥으로 쏟아지며 또 쌓였다. 창문 가까이에는 줄이 길게 매어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옷들이 척척 걸쳐져 있었다. 빨래를 왜 안에서 말릴까 하고 의아해서 다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옷장에 걸어 두어야 할 옷들이었다.
“어마나 이게 다 뭐니? 좀 치우고 살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말을 해놓고 보니 좀 미안했다.
“으응. 이거 다 내 보물이야. 보물. 집에서 좋은 건 다 쓸어 왔어. 근데 좀 너저분하지? 내가 천천히 다 정리할 거야.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 아직 정리가 안 됐어.”
좋은 건 다 쓸어왔다지만 여기저기에 쌓아놓은 물건들이 내 눈에는 다 버려야 할 것들이었다. 그 후에도 그녀는 자기 집에 놀러오라는 말을 더러 했으나 나는 그냥 인사로 “니가 와” 하고 말했는데, 그녀는 심심하면 내 아파트에 들렀다. 그리고는 부모와 언니에게 쌓인 불만들을 거침없이 토로했다. 어떤 날은 원한에 맺혀 눈물까지 흘리면서 하소연을 했다.
나는 들어주는 것만으로 위로를 대신했다. 한데 한참 듣다보면 그녀의 말엔 앞뒤가 맞지 않아 참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었는데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애경에게 뭔가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거짓말도 스스럼없이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좋은 환경, 좋은 집에서 부모의 배려를 받으며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혼자 독립하여 그렇게 너저분하게 살고 있다는 자체에도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기계로 치면 나사가 하나 빠졌다고나 할까? 영화를 봐도 그 줄거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릴 때 이민을 왔으니 영어를 못 알아들을 리는 없다. 한국영화를 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또 다른 쪽의 머리는 비상했다. 남의 발목을 잡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놓고 상대방을 괴롭히는 데는 선수였다. 어디서 그런 아이디어를 짜내는지 놀랄 지경이었다. 또한 얼마나 말을 근사하게 잘하는지 처음 보는 사람은 다 그녀에게 뻐져들기가 예사였다.
나로서는 여러 가지로 이해가 안 되는 면이 많은 애경이었다. 상대방의 허물을 이해하고 감싸주는 아량과 관용이 있어야 친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친구를 아낄 줄 알아야 하고, 고독할 때 위로할 줄 알아야 하고, 어려울 때 도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마음이 없었다. 애경이가 좀 이상하다고만 생각이 들고, 그녀가 날 필요로 하니 그냥 만나주고 얘기를 들어주고 할 뿐이었다.
그 즈음에 강미경은 이미 대학원을 졸업하고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이곳 로스앤젤레스에 직장을 구했고, 애경을 따라 교회에 나가게 되어, 나도 이민우도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알고보니 애경이가 늘 말하던 그런 강미경이 아니었다. 애경이의 성격을 이미 파악한 후였기에, 물론 그녀의 말을 다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강미경은 너무나 달랐다. 내 눈에는 그녀가 천사처럼 비춰진 것이다. 애경은 언니의 모든 것이 다 가식이라고 지껄였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 애경이 우리 애경이’ 하면서 진실로 동생을 위했었다.
“우리 애경이한테 너 같은 좋은 친구가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 널 만나고부터 우리 애경이가 공부도 열심히 하는 것 같아. 부모 말도 안 듣고 내 말도 통 안 듣지만, 네 말은 듣는 것 같아. UC는 못 가더라도 어쨌든 사년제 대학은 졸업해야 하니까 네가 좀 잘 이끌어 줘.”
부모 말을 통 안 듣는다는 대목에서 나는 애경의 아파트 풍경을 떠올렸다.
강미경은 내게도 친동생처럼 잘해 주었고, 나 역시 그녀를 친언니처럼 따랐다. 그런데 얼마 못 가 기묘한 바람이 불어 우리들의 사이가 깨지고 말았다.
그때, 이민우는 이미 내게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던 시기였기에 그는 한걸음에 훌쩍 강미경의 영토에 발걸음을 옮겨버렸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린 아직까지 영주권도 해결하지 못한 처지이니 더 이상 같이 있어봐야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또 상대방을 발전시킬 수 있어야 결혼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사랑만 가지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이라고 했다. 뻔뻔스럽게도 그는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말소리는 나지막했으나 예리한 칼로 무를 싹뚝 잘라버리듯한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그 맘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영주권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우린 한국으로 나가 대학 교수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잖냐고.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부모와 동생들이 한국에 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이 상태로 가다간 언제 공부가 끝날지도 모르니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자고 했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도움이 되는 강미경을 택한 것이다. 신을 부정하던 그가 웬일로 교회에는 꼬박꼬박 나오나 했더니, 그 이유가 강미경한테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이런 미래를 미리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그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동거를 원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는 그가 네 하숙방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으나, 미국에 온 후로는 주기적으로 내 아파트에 들락거렸었다. 그때, 나는 이민우를 기다리는 마음은 간절했으나 몸은 마음을 따르지 않았고, 그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나를 대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뿌리치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나는 그의 도구에 불과한가 하는 회의에 빠져 허우적거린 적도 많았다. 그렇지만 나는 노예처럼 그가 하자는 대로 다 따르면서, 내 인생을 그에게 다 맡겨버렸었다.
곰곰 생각하다가 어느 날, 나는 우리 형편에 두 집 살림을 하느니 차라리 합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의 입에서 그 말이 먼저 나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모처럼 용기를 내어 어렵게 꺼낸 말이었다. 그 때, 난 너무나 부끄러워 쥐구멍니라도 있으면 몸을 숨기고 싶었다. 의식을 벽 너머에 두고 온 여자처럼 맥이 탁 풀렸다. 표정까지 흐릿해지며 눈앞이 몽롱했다. 시간이 모든 박자를 잃어 세상이 정지돼 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강물에 떨어진 빗방울이 되어 흘러가고 있었으나 그는 기름이 되어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이민우와 사귀는 것조차도 무지하게 반대를 하던 애경의 부모님은 그들이 결혼을 한 그 해에 교통사고로 이 세상을 떠났고, 그 오 년이 지난 좀 후에 애경이도 죽었다.
공항에 도착을 하니 언니가 아닌 중년의 백인여성이 나를 맞았다. 의외였기에 운전을 못할 정도로 허리가 아픈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을 하면서 여인은 계속 침묵을 지켰다. 시골 길로 접어든 것 같았다. 길은 왠지 휑하게 넓기만 해 아무런 계획도 없이 자연적으로 트인 비포장길처럼 보였다. 가을은 벌써 끝이 나버리고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사철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엘에이와는 색다른 풍경이었다.
어느 해 시월, 단풍이 든 버지니아의 거리 풍경이 한폭의 그림 같아, 나는 활홀감에 빠졌었다. 신이 요술을 부려 도시를 온통 채색해놓은 것 같았다. 빨강, 노랑, 주황, 등 온갖 색깔들이 어우러져 가는 곳마다 마다가 너무나 아름다웠었다. 노랑, 그 한 가지 색깔만도 샛노랗고, 노르스럼하고, 또 노리끼리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산등성이를 덮고 있는 강렬한 붉은 색은 마치 치솟고 있는 불길을 연상하게 했다. 여름의 풍성한 짙푸름도 가을의 아름다움을 준비한 과정 같았다.
그 황홀했던 단풍들이 땅에 떨어져 지금은 다 사그라지고, 길 양쪽에는 몸통을 드러낸 가로수들이 일렬종대로 서 있었다. 거리엔 차들도 한산했다. 가로수 길이 끝나자 건널목이 나왔고, 건널목이 끝나니 마을 입구가 나왔다. 낡은 집들과 잡목이 흩어져 있는 환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 저택들이 들어서 있는 아름다운 주위 풍경을 상상했던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있었다.
여인은 혼자 차를 탄 듯이 꼼짝을 않고 앞만 바라보았다. 침묵이 계속되니 차 안에는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나는 애써 할말을 찾다가 언니가 지금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짤막했다. 그녀의 집이라고. 그리고 집으로 바로 모셔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민우가 살고 있을 그 집에 말이다. 뜻밖이었다.
드디어 강미경의 집 앞에 도착을 했다. 자그마한 단층으로 오랜 세월 동안 손길이 안 갔는지 퍽 낡은 인상을 주는 집이었다. 탁한 먼지 색 비슷한 벽 색깔이 아주 옹색하고 충충해 보였다. 그러나 빨간 색 지붕과는 그런 대로 어울렸다.
여인이 키를 꽂고 대문을 열었다. 문이 열렸는데도 언니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조금은 떨리고 또 흥분이 되었다. 문을 열자마자 바로 좁은 복도가 나왔다. 앞이 콱 막힌 내부 구조였다. 숨통이 막히는 듯 답답한 분위기였다. 옛날의 화려했던 언니의 취향과는 영 다른 실내였다. 벽에는 그림 하나 붙어있지 않았다. 복도 왼편엔 거실로 보이는 자그마한 방이 있었다. 한마디로 쓸쓸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방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의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은 곳 같았고 싸늘한 냉기가 내게까지 전해오는 듯했다.
여인을 따라 거실을 지나니 툭 트인 뒤뜰이 시야에 들어왔다. 잎을 다 떨구어버린 나무 몇 그루가 추위에 떨고 있는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다. 뜰은 꽤 넓었으나 오랜 동안 가꾸지를 않아 그대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마침, 태양이 막 떨어진 서쪽 하늘에 펼쳐지고 있는 저녁노을이 있어 바깥 풍경이 그리 살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거기엔 처절한 슬픔이 잔뜩 배어 있었고, 집안 분위기도 전혀 예상 밖이라 나는 미스테리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시야가 환해지니 가슴이 확 트였다. 그곳 실내는 거실보다도 훨씬 넓고 또 밝았다. 가족들이 주로 쓰는 페밀리 룸 같았다. 옆에는 부엌과 식당이 바로 붙어 있었다. 그곳에도 언니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웬 백발의 깡마른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말라 마치 유령을 보는 듯해 순간적으로 나는 섬뜩함을 느꼈다. 퀭하니 움푹 파인 두 눈만이 온 얼굴을 차지하고 있었고 마른 목이 머리를 지탱하기도 힘든 모습이었다. 저녁노을 빛을 어깨너머로 받고 있는 그녀의 얼굴 윤곽은 희미했으나 입가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은 뚜렷하게 잡혔다. <계속>
&
그녀는 신상조사를 하듯이, 언제 미국엘 왔느냐, 어느 학교에 다니며 어디에 사느냐, 등등 말을 속사포로 쏟아놓았다. 그녀의 태도와 말투에는 진실된 반가움이 담겨져 있었다. 그녀는 공부하고는 원래가 인연이 멀어 커뮤니티 칼리지에 적만 두고 그냥 왔다갔다 한다면서 깔깔대고 웃었다. 부모님은 UC계열의 학교로 전입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나 자기는 그런 건 개의치않고 그냥 재미나게 살고 있단다. 부모님이 사는 집에 방이 남아돌아가는데도 그녀는 따로 나와 살고 있었다.
처음 만나는 그날 애경은 언니인 강미경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 집은 언니가 부모의 꿈을 다 이루어주고 있으니 난 이대로가 좋아. 우리 집에선 언니는 하늘이고 나는 땅이야.”
사는 것이 신바람이 나 죽겠다는 듯이 희열이 차 재잘거리다가 언니가 나오는 대목에선 음성을 낮추며 그녀는 쓸쓸히 웃었다. 그 후부터 애경은 내 비좁은 싱글 아파트에 수시로 들락거렸는데, 한번은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우중충한 어느 날이었다. 백화점엘 가서 옷을 사야 하는데 내가 좀 봐 줘야 한다며 우기는 통에 따라 나섰다가 그녀의 집까지 가게 된 것이다. 나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비싼 동네에 살고 있었다. 주위가 너무나 고요했다. 희뿌연 회색 하늘을 등지고 선 아파트의 둔중한 몸집이 나를 압박해 왔다. 주차장에는 사람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았고, 차들이 무덤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아파트 문을 열자마자 나는 그만 놀래서 나가자빠질 뻔했다. 뭐가 그렇게 꽉꽉 들어찼는지 집안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녀는 백화점에서 산 옷들을 꺼내지도 않고 쇼핑 백째로 구석에 휙 던졌다. 뭔가 쌓여 있는 위에 옷이 바깥으로 쏟아지며 또 쌓였다. 창문 가까이에는 줄이 길게 매어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옷들이 척척 걸쳐져 있었다. 빨래를 왜 안에서 말릴까 하고 의아해서 다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옷장에 걸어 두어야 할 옷들이었다.
“어마나 이게 다 뭐니? 좀 치우고 살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말을 해놓고 보니 좀 미안했다.
“으응. 이거 다 내 보물이야. 보물. 집에서 좋은 건 다 쓸어 왔어. 근데 좀 너저분하지? 내가 천천히 다 정리할 거야.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 아직 정리가 안 됐어.”
좋은 건 다 쓸어왔다지만 여기저기에 쌓아놓은 물건들이 내 눈에는 다 버려야 할 것들이었다. 그 후에도 그녀는 자기 집에 놀러오라는 말을 더러 했으나 나는 그냥 인사로 “니가 와” 하고 말했는데, 그녀는 심심하면 내 아파트에 들렀다. 그리고는 부모와 언니에게 쌓인 불만들을 거침없이 토로했다. 어떤 날은 원한에 맺혀 눈물까지 흘리면서 하소연을 했다.
나는 들어주는 것만으로 위로를 대신했다. 한데 한참 듣다보면 그녀의 말엔 앞뒤가 맞지 않아 참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었는데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애경에게 뭔가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거짓말도 스스럼없이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좋은 환경, 좋은 집에서 부모의 배려를 받으며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혼자 독립하여 그렇게 너저분하게 살고 있다는 자체에도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기계로 치면 나사가 하나 빠졌다고나 할까? 영화를 봐도 그 줄거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릴 때 이민을 왔으니 영어를 못 알아들을 리는 없다. 한국영화를 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또 다른 쪽의 머리는 비상했다. 남의 발목을 잡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놓고 상대방을 괴롭히는 데는 선수였다. 어디서 그런 아이디어를 짜내는지 놀랄 지경이었다. 또한 얼마나 말을 근사하게 잘하는지 처음 보는 사람은 다 그녀에게 뻐져들기가 예사였다.
나로서는 여러 가지로 이해가 안 되는 면이 많은 애경이었다. 상대방의 허물을 이해하고 감싸주는 아량과 관용이 있어야 친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친구를 아낄 줄 알아야 하고, 고독할 때 위로할 줄 알아야 하고, 어려울 때 도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마음이 없었다. 애경이가 좀 이상하다고만 생각이 들고, 그녀가 날 필요로 하니 그냥 만나주고 얘기를 들어주고 할 뿐이었다.
그 즈음에 강미경은 이미 대학원을 졸업하고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이곳 로스앤젤레스에 직장을 구했고, 애경을 따라 교회에 나가게 되어, 나도 이민우도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알고보니 애경이가 늘 말하던 그런 강미경이 아니었다. 애경이의 성격을 이미 파악한 후였기에, 물론 그녀의 말을 다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강미경은 너무나 달랐다. 내 눈에는 그녀가 천사처럼 비춰진 것이다. 애경은 언니의 모든 것이 다 가식이라고 지껄였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 애경이 우리 애경이’ 하면서 진실로 동생을 위했었다.
“우리 애경이한테 너 같은 좋은 친구가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 널 만나고부터 우리 애경이가 공부도 열심히 하는 것 같아. 부모 말도 안 듣고 내 말도 통 안 듣지만, 네 말은 듣는 것 같아. UC는 못 가더라도 어쨌든 사년제 대학은 졸업해야 하니까 네가 좀 잘 이끌어 줘.”
부모 말을 통 안 듣는다는 대목에서 나는 애경의 아파트 풍경을 떠올렸다.
강미경은 내게도 친동생처럼 잘해 주었고, 나 역시 그녀를 친언니처럼 따랐다. 그런데 얼마 못 가 기묘한 바람이 불어 우리들의 사이가 깨지고 말았다.
그때, 이민우는 이미 내게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던 시기였기에 그는 한걸음에 훌쩍 강미경의 영토에 발걸음을 옮겨버렸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린 아직까지 영주권도 해결하지 못한 처지이니 더 이상 같이 있어봐야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또 상대방을 발전시킬 수 있어야 결혼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사랑만 가지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이라고 했다. 뻔뻔스럽게도 그는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말소리는 나지막했으나 예리한 칼로 무를 싹뚝 잘라버리듯한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그 맘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영주권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우린 한국으로 나가 대학 교수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잖냐고.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부모와 동생들이 한국에 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이 상태로 가다간 언제 공부가 끝날지도 모르니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자고 했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도움이 되는 강미경을 택한 것이다. 신을 부정하던 그가 웬일로 교회에는 꼬박꼬박 나오나 했더니, 그 이유가 강미경한테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이런 미래를 미리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그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동거를 원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는 그가 네 하숙방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으나, 미국에 온 후로는 주기적으로 내 아파트에 들락거렸었다. 그때, 나는 이민우를 기다리는 마음은 간절했으나 몸은 마음을 따르지 않았고, 그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나를 대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뿌리치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나는 그의 도구에 불과한가 하는 회의에 빠져 허우적거린 적도 많았다. 그렇지만 나는 노예처럼 그가 하자는 대로 다 따르면서, 내 인생을 그에게 다 맡겨버렸었다.
곰곰 생각하다가 어느 날, 나는 우리 형편에 두 집 살림을 하느니 차라리 합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의 입에서 그 말이 먼저 나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모처럼 용기를 내어 어렵게 꺼낸 말이었다. 그 때, 난 너무나 부끄러워 쥐구멍니라도 있으면 몸을 숨기고 싶었다. 의식을 벽 너머에 두고 온 여자처럼 맥이 탁 풀렸다. 표정까지 흐릿해지며 눈앞이 몽롱했다. 시간이 모든 박자를 잃어 세상이 정지돼 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강물에 떨어진 빗방울이 되어 흘러가고 있었으나 그는 기름이 되어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이민우와 사귀는 것조차도 무지하게 반대를 하던 애경의 부모님은 그들이 결혼을 한 그 해에 교통사고로 이 세상을 떠났고, 그 오 년이 지난 좀 후에 애경이도 죽었다.
공항에 도착을 하니 언니가 아닌 중년의 백인여성이 나를 맞았다. 의외였기에 운전을 못할 정도로 허리가 아픈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을 하면서 여인은 계속 침묵을 지켰다. 시골 길로 접어든 것 같았다. 길은 왠지 휑하게 넓기만 해 아무런 계획도 없이 자연적으로 트인 비포장길처럼 보였다. 가을은 벌써 끝이 나버리고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사철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엘에이와는 색다른 풍경이었다.
어느 해 시월, 단풍이 든 버지니아의 거리 풍경이 한폭의 그림 같아, 나는 활홀감에 빠졌었다. 신이 요술을 부려 도시를 온통 채색해놓은 것 같았다. 빨강, 노랑, 주황, 등 온갖 색깔들이 어우러져 가는 곳마다 마다가 너무나 아름다웠었다. 노랑, 그 한 가지 색깔만도 샛노랗고, 노르스럼하고, 또 노리끼리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산등성이를 덮고 있는 강렬한 붉은 색은 마치 치솟고 있는 불길을 연상하게 했다. 여름의 풍성한 짙푸름도 가을의 아름다움을 준비한 과정 같았다.
그 황홀했던 단풍들이 땅에 떨어져 지금은 다 사그라지고, 길 양쪽에는 몸통을 드러낸 가로수들이 일렬종대로 서 있었다. 거리엔 차들도 한산했다. 가로수 길이 끝나자 건널목이 나왔고, 건널목이 끝나니 마을 입구가 나왔다. 낡은 집들과 잡목이 흩어져 있는 환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 저택들이 들어서 있는 아름다운 주위 풍경을 상상했던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있었다.
여인은 혼자 차를 탄 듯이 꼼짝을 않고 앞만 바라보았다. 침묵이 계속되니 차 안에는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나는 애써 할말을 찾다가 언니가 지금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짤막했다. 그녀의 집이라고. 그리고 집으로 바로 모셔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민우가 살고 있을 그 집에 말이다. 뜻밖이었다.
드디어 강미경의 집 앞에 도착을 했다. 자그마한 단층으로 오랜 세월 동안 손길이 안 갔는지 퍽 낡은 인상을 주는 집이었다. 탁한 먼지 색 비슷한 벽 색깔이 아주 옹색하고 충충해 보였다. 그러나 빨간 색 지붕과는 그런 대로 어울렸다.
여인이 키를 꽂고 대문을 열었다. 문이 열렸는데도 언니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조금은 떨리고 또 흥분이 되었다. 문을 열자마자 바로 좁은 복도가 나왔다. 앞이 콱 막힌 내부 구조였다. 숨통이 막히는 듯 답답한 분위기였다. 옛날의 화려했던 언니의 취향과는 영 다른 실내였다. 벽에는 그림 하나 붙어있지 않았다. 복도 왼편엔 거실로 보이는 자그마한 방이 있었다. 한마디로 쓸쓸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방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의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은 곳 같았고 싸늘한 냉기가 내게까지 전해오는 듯했다.
여인을 따라 거실을 지나니 툭 트인 뒤뜰이 시야에 들어왔다. 잎을 다 떨구어버린 나무 몇 그루가 추위에 떨고 있는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다. 뜰은 꽤 넓었으나 오랜 동안 가꾸지를 않아 그대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마침, 태양이 막 떨어진 서쪽 하늘에 펼쳐지고 있는 저녁노을이 있어 바깥 풍경이 그리 살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거기엔 처절한 슬픔이 잔뜩 배어 있었고, 집안 분위기도 전혀 예상 밖이라 나는 미스테리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시야가 환해지니 가슴이 확 트였다. 그곳 실내는 거실보다도 훨씬 넓고 또 밝았다. 가족들이 주로 쓰는 페밀리 룸 같았다. 옆에는 부엌과 식당이 바로 붙어 있었다. 그곳에도 언니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웬 백발의 깡마른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말라 마치 유령을 보는 듯해 순간적으로 나는 섬뜩함을 느꼈다. 퀭하니 움푹 파인 두 눈만이 온 얼굴을 차지하고 있었고 마른 목이 머리를 지탱하기도 힘든 모습이었다. 저녁노을 빛을 어깨너머로 받고 있는 그녀의 얼굴 윤곽은 희미했으나 입가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은 뚜렷하게 잡혔다. <계속>
&
댓글 0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 6879 | 빛나는 감옥 | 이월란 | 2009.05.19 | 68 |
| 6878 | 해오름의 하루 | 백선영 | 2009.05.19 | 49 |
| 6877 | 오른쪽 눈썹은 | 백선영 | 2009.05.19 | 48 |
| 6876 | 종알 종알 시 알갱이 | 최상준 | 2009.05.19 | 53 |
| 6875 | 바꿔진 시험문제 | 최상준 | 2009.05.19 | 52 |
| 6874 | 봄 두른 샛터마을 | 조만연.조옥동 | 2009.05.18 | 34 |
| 6873 | 나는 가시나무 | 조만연.조옥동 | 2009.05.18 | 53 |
| 6872 | 달구경 | 조만연.조옥동 | 2009.05.18 | 59 |
| 6871 | 하룻길 | 조만연.조옥동 | 2009.05.18 | 45 |
| 6870 | 틈 / 중앙일보 | 김영교 | 2009.05.18 | 52 |
| 6869 | 여자는 숨어서 울음 운다 / 박영숙 | 박영숙영 | 2009.05.18 | 58 |
| 6868 | 그리운 타인 | 백남규 | 2009.05.17 | 56 |
| 6867 | 5월의 어머니는 / 건널목 | 김영교 | 2009.05.17 | 47 |
| 6866 | 굴비 꿈 | 이성열 | 2009.05.17 | 59 |
| 6865 | 동 거 | 이영숙 | 2009.05.17 | 36 |
| 6864 | 동해(도까이) 쏘나타 | 오영근 | 2009.05.16 | 42 |
| 6863 |
부부표지
| 김우영 | 2009.05.16 | 60 |
| 6862 | 내가 좋아 하는 꽃----에피필럼 | 조만연.조옥동 | 2009.05.16 | 55 |
| » | 신의 숨소리<토요연재7> | 김영강 | 2009.05.15 | 47 |
| 6860 | 지희선의 수필 이야기(발표문) | 지희선 | 2009.05.17 | 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