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송동, 그 추억의 행복창고

2016.04.30 14:50

김학 조회 수: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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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송동, 그 추억의 행복창고
三溪 金 鶴




천년고도 전주에는 세 군데의 노송동이 있었다. 남노송동. 중노송동, 서노송동이 그것이다. 노송(老松)이란 늙은 소나무를 가리키고, 늙은 소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산일 터이며, 산이 있는 곳이라면 도시의 변두리일 것이다.
노송(老松)! 노송을 떠올리면 그 그늘 아래서 노인들이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마주보고 앉아 바둑을 두는 조선시대의 풍속화를 떠올리리라. 전주의 노송동은 그렇게 고전적인 삶터이다.
남노송동은 전주의 상징인 기린봉(麒麟峰)을 품고 있고, 중노송동은 명문 전주고등학교를 안고 있으며, 서노송동은 전주시청과 선미촌(善美村)을 보듬고 있다. 요즘에는 이들 세 개의 동을 하나로 묶어 노송동이라 한다.
나는 젊은 시절에 이 세 군데 노송동을 돌아다니며 살았다. 그러기에 그 추억도 다채롭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고향을 떠나 전주로 이사를 했었다. 처음에는 어머니와 나 그리고 동생 등 셋이 진북동에서 방 한 칸을 얻어 셋방살이를 하다가 몇 달 뒤 남노송동 전셋집으로 옮겼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서노송동에 조그만 우리 집을 마련했었다. 단칸방에서 전셋집으로, 전셋집에서 우리 집으로 이사하는 그 기분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알 수 있으랴? 고향에는 4칸 기와집과 사랑채, 헛간채 등 대궐같이 큰 집이 있었지만 그 큰집을 전주로 옮겨올 수는 없었다.
서노송동 집 마루에 서서 판자울타리 밖을 넘겨다보면 전주역이 보였다. 이따금 그 역을 오가며 울리는 열차의 기적소리와 발자국소리는 자장가처럼 정답게 들렸었다. -지금은 전주역이 옮겨가자 그 자리에 전주시청 청사가 세워져 있다- 그 기차소리는, 시골에서는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도시의 소리요 전주의 소리였다.
아침마다 철길로 걸어서 등교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을 바라보면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교복을 입어야 하는 나로서는 멋대로 옷을 입은 대학생들이 마냥 부러웠다. 그래서 나도 대학생이 되려고 더 열심히 공부를 했는지도 모른다. 서노송동에 살던 어느 해 여름, 폭우가 쏟아졌다. 뒷집에서 쏟아진 도랑물이 파도처럼 밀어닥쳐 우리 집 바깥화장실을 쓸어버렸을 뿐 아니라 안방까지 물이 차올랐었다. 아궁이가 젖어 연탄불을 넣을 수도 없었고 안방이 물에 젖어 눅눅했었다. 예기치 않은 수재민이 되어 고생했던 그때의 기억이 새롭다.
대학교 1학년 때 다시 남노송동으로 옮겼다. 지대가 높은 기린봉 기슭, 우선 집터가 높으니 폭우가 쏟아져도 걱정이 없어 좋았다. 방이 여러 개여서 셋방 하나를 내놓고도 하숙생을 몇 명 칠 수 있어 살림에 보탬이 되었다. 꿈과 낭만의 대학시절 대부분을 나는 그 집에서 보냈다. 비록 삐딱하게 기운 기와집이었지만 그래도 즐겁고 행복했었다. 왼쪽에는 기린봉이 우뚝 솟아 있었고, 앞쪽엔 나지막한 이목대가 이마에 닿을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이목대에서 밤마다 감미롭고 아름다운 트럼펫 연주를 하는 이가 있었다. 4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그리운 추억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대학시절이어서 더 잊혀지지 않는 것일까. 그 추억이 너무 아름다워서 1년에 한 번 전라예술제 때라도 기린봉, 오목대, 완산칠봉, 다가산, 건지산, 인후공원 등에서 밤마다 트럼펫 연주를 들려주면 좋지 않을까 싶다.
어디서든지 트럼펫 연주를 들으면 남노송동 시절의 그 추억이 떠오른다. 아니 가을밤 귀뚜라미 우는 소리만 들어도 그 시절의 트럼펫연주를 떠올린다. 지금이라도 그 트럼펫 연주자를 만나면 술이라도 한 잔 나누며 달콤한 추억을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남노송동 그 집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ROTC장교로 임관했으며, 취직난이 극심하던 때였는데도 제대 후 다행이 전주해성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교단에 선 적도 있었다. 오하근 선생과 유영국 선생도 같은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남노송동에서 진북동 해성고등학교까지 택시로 출근했었다. 1969년의 일이니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다. 비록 요즘같이 자가용은 없었지만 무척 행복한 시절이었다. 또 그해 여름 어느 달 밝은 밤, 우리 세 사람은 수박 한 덩이에 됫병소주 한 병을 사들고 오목대에 올라가 주먹으로 깨뜨린 수박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며 호연지기를 뽐냈었다. 통행금지가 있었던 시절의 낭만이었다. 그날 밤 달은 어찌 그리도 밝던지…….
오랜 세월이 흐르자 원광대학교 교수로 정년퇴직한 오하근 선생은 문학평론가로, 유영국 선생은 부산국제신문 1억원 소설공모에 당선하여 소설가로, 나는 월간문학에서 수필가로 등단하였다. 날마다 택시로 출근하던 해성고등학교 교사 3총사가 문인이 되어 넓은 문학의 바다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끈질긴 인연이라고나 할까?
나는 특히 남노송동을 잊을 수 없다. 그 집에서 취직을 했고, 결혼하여 한 여인의 남편이 되었으며, 2남1녀의 아버지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 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추억을 안고 있는 추억의 행복창고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지금은 그 동네도 많이 변했다. 그 집 모퉁이에는 도르래로 물을 길어 먹던 깊은 우물이 있었는데, 그 샘은 동네 아주머니들의 사교장이었고, 정보교환의 무대였다. 내가 그 동네를 떠나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리 뒷집에 살던 꼬마 박주봉 소년이 배드민턴선수가 되어 세계를 제패했었다. 남노송동 그 산동네에서 세계적인 선수가 배출된 것이다. 그 선수가 우리와 한 우물을 마시던 이웃이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자랑스럽다.
여름이면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내리던 그 오르막길이 자동차길로 바뀌었다. 요즘도 나는 가끔 그 동네를 찾아가 옛 추억을 더듬어 보지만 옛날 우리 집만 그대로 있을 뿐 옆집이나 뒷집은 2층 양옥으로 바뀌어 옛날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
남노송동에서 18년이나 살다가 중노송동 단층 슬라브 집으로 이사를 했었다. 그 슬라브집 옥상에 올라가 초등학생이 된 아이들과 축구도 하고 배드민턴도 치면서 즐겁게 보냈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손바닥만한 화단에 목련, 해당화, 대추나무, 포도나무 등을 심기도 했고, 나팔꽃을 심어서 옥상으로 타고 올라가도록 줄을 매달아 주기도 했었다. 그 집에서 살던 1980년 가을, 87세인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그해 12월 언론통폐합이 이루어져서 내가 다니던 서해방송이 KBS에 통합되는 바람에 나는 남원KBS로 발령이 났었다. 나의 중노송동 시절은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국가적 격변의 시기였던 것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나의 노송동 시절은 30대 후반까지 이어졌으니 그 시절은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황금의 시기였다. 1985년 우아동에 터를 마련하고 2층집을 지어 이사를 하면서 나의 노송동시대는 막을 내렸다.
농경시대가 정착사회였다면 정보화시대인 지금은 유목사회라던가. 나는 전주로 주거를 옮긴 뒤 무려 14번이나 이사를 다녔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이사를 하게 될지는 나도 모른다. 도시가 자꾸 변하기 때문에 옛날 살던 곳을 찾아가 보면 몇 군데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낡은 집을 헐고 새로 집을 지었거나, 길이 넓혀지면서 헐리고, 아파트단지에 흡수된 곳도 있다. 그때그때 사진 한 장이라도 찍어두지 않은 게 후회스럽다.
14번의 이사를 하면서 터득한 깨달음이 있다. 가족 간의 정은 사는 집의 크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집이 커지면서 식구마다 각자 자신의 방을 갖게 되자 정의 깊이는 오히려 더 얕아졌다. 가난했지만 한 방에서 여러 명의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한 이불을 덮고 살을 비비며 살던 때 더 끈끈한 정이 흘렀었다. 무조건 큰 집만을 좋아할 일이 아니구나 싶다. 또 지나고 보니 식구가 많았을 때가 더 행복했었다.
나는 지금 우아동과 호성동에서 21년이나 살다가 인후동에 새로 둥지를 틀었다. 여섯 명의 식구가 두 명으로 줄어들어 조금은 쓸쓸하지만 인후동은 노송동과 이웃한 동네여서 다행이다. 노송동은 아무리 내가 나이를 먹더라도 나에게 늘 아름다운 추억을 제공해 줄, 내 추억의 행복창고나 다를 바 없는 까닭이다. 나의 노송동 시절은, 가난했지만 정다운 가족들이 오붓하게 어울려 살았고, 인정이 넘치던 이웃의 웃음소리가 울타리를 넘나들던 행복한 세월이었다.
(2007. 12. 19.)

*김 학 약력
198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실수를 딛고 살아온 세월> 등 수필집 13권, 수필평론집 <수필의 맛 수필의 멋> 등 2권/펜문학상, 한국수필상, 동포문학상 대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전주시예술상 등 다수 수상/전북수필문학회 회장,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 임실문인협회 회장, 전북문인협회 회장, 전북펜클럽 회장 역임/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전담교수/E-mail: crane43@hanmail.net http://crane43.k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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