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값
2010.02.19 03:55
설이다. 텔레비전으로 맞이하는 설이 가슴 아릿하다. 길이 막혀 눈 속에 갇혀있는 차들이 차라리 정겹다. 문득 옛일이 생각나서다. 설이든 추석이든 시댁과 친정을 갈 때 언제나 차가 밀려 고생했다. 나만 똑똑하리라 꾀를 내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해보기도 했지만 역시 마찬가지. 꾀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평소 두 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하는 거리인데 명절에는 대여섯 시간은 보통이다. 선견지명을 가지고 미리 주전부리를 준비해 차 안에 실어간다. 지루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음악을 틀어놓고 음식을 먹으며 함께 대화 나누는 시간이 싫지 않다. 평소에는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대화할 시간도 많지 않았던 가족들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지루하고 힘들 것 같은데 그렇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다가올 행복을 예상하기 때문이 아닐까. 가족들을 만나고 형제들과 함께할 생각이 기쁨을 만들어 주는 것일 게다. 곧 찾아올 행복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오래전 친구가 느지막이 결혼해서 딸을 낳았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다. 유난히도 아들을 원하는 친구가 딸을 거의 다 키워 놓고 뒤늦게 아들을 낳았다. 너무 기쁘고 행복해 했다. 아이가 자라 걸음마를 시작할 때쯤, 사내아이여서 그런지 얼마나 분주하고 저지레를 많이 했는지 모른다. 몸이 약한 친구가 아이를 따라다니며 조심시키고 돌보느라 저녁이 되면 녹초가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를 피곤하게, 힘들게, 분주하게 하는 아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하지 모르겠다.”였다. 힘들고 피곤함에도 행복한 마음. 치러야 하는 값이 아무리 커도 행복이다.
우리 아파트는 비만 오면 창으로 빗물이 새 들어온다. 방과 거실과 부엌, 세 곳에 있는 창이 모두 그렇다. 내 눈으로 보기에는 틈이 없을 것 같은데. 어느 틈이 비가 들어올 틈일까. 몸이 없는 빗물을 여자 둘만 있어 꼭꼭 걸어 잠그고 있는 방안을 잘도 숨어 들어온다. 조금도 아닌 많은 양의 빗물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 나의 눈이 나빠서 보지 못하는 틈이 세상에는 참 많은가 보다. 비가 오면 언제나 창틀에 큰 타월을 깔아두어야 한다. 더 이상 흘러 방이나 거실, 부엌에까지 들어오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다. 캘리포니아는 비가 적어 내가 그 수고를 하는 일이 많지는 않다.
얼마 전에 비가 많이 왔다. 일주일 내내 많은 비가 내렸고 당연히 우리 아파트 창에도 많은 빗물이 새어 들어왔다. 밤에 자다 일어나서 창틀에 깔아 놓은 타월을 짜야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비가 많이 오면 타월을 한번 깔아 놓았다고 안심할 수 없으니까. 자주 짜서 더 이상 물이 넘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밤에 몇 번을 일어나 그 일을 했음에도 전혀 귀찮지 않고 피곤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잠을 설치고 나면 그 다음날이 얼마나 피곤하고 힘든지 모른다. 밤새 듣는 빗소리가 좋아서, 비가 온다는 것이 행복해서 자다 일어나 타월을 짜야함이 귀찮게 느껴지지 않았다. 행복을 위해 치러야 하는 값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해서 꼭 갖고 싶었든 노트북 사기위해 돈을 버는 학생이 고생을 행복으로 여긴다. 뜨거운 태양아래 무거운 짐을 지고 나르는 것도 힘들지 않고 이제 얼마 후에 갖게 될 그 돈으로 노트북을 하나 장만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흐르는 땀을 씻으며 기뻐한다.
이민생활 힘들고 어려워도 자녀들이 아름답게 잘 자라주면 행복이다. 그래서 기쁘게 참는다. 내일이 우리에게 있기에 아픔을 견딜 수 있고, 이를 악, 물고 슬픔을 이길 수 있을 게다.
행복을 위해 치러야 하는 값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도리어 그 값을 치러야 함이, 그 자체가 행복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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