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늪에서

2009.09.02 17:35

고현혜(타냐) 조회 수:44


돌아가고 싶다.

내 영혼 숨쉴 수 있는 영원한 고향, 그곳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고운 내님의 품에 안기어
아기 사슴처럼 잠들고 싶을 뿐

난 불혹과 같은 사랑의 질시로
포도원 울타리를 파괴하고
뛰쳐나온 한 마리 사슴

허탄한 욕망으로 불타는 한 마리 야수가 되어
암울한 광야를 미친 듯 달렸다.

사과꽃 향기나는
그 열매가 내 눈을 멀게 했고
달콤한 음녀의 사랑은
날 불의에 넘어지게 했다.

날카로운 죄의 가시가
내 살갖을 깊숙이 찔러
선한 님의 가슴에서
석류즙 같은 피를 뚝뚝 떨어지게 해도

허망한 무지개를 쪼ㅈ아
멸망의 길을 달리던
난 한마리 목이 굳은 사슴

뛰어가도 뛰어가도 끝없는 사막
어디에도 나의 초원은 없고
날 기다려 주는이도 없다.

사방은 고통으로 빈틈없이 높이 솟은 절망의 탑들
갈라진 혀와 거친 황페한 땅에
꺼져가는 불의 잿더미와
싸늘한 죽음의 종소리

허탄한 욕망은
깰 수 없는 죄의 빙벽에 나를 고립시켰고
절망의 늪에 빠져
썩어가는 내 살을 까마귀가 쪼아 먹는다.

아! 이제라도 갈 수 있다면
나 돌아가고 싶다.
그리운 내 님의 포도원으로

그러나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떠나왔고
불치의 병을 앓는 내 모습은 너무 흉하다.
울 힘 조차 없는

불마져 잘려버린
한마리
불모의 사슴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