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풍습에서 배우는 지혜/이 아침에(미주중앙일보)
2010.02.22 18:40
옛 풍습에서 배우는 지혜
조옥동 시인
민족의 설날이 방금 지났다. ‘음력설을 맞기까지는 아직 나의 설을 기다리겠어요.’ 하는 심정으로 맞이한 새해다. 돌아보면 모두가 가난했던 그 옛날도 설날은 아주 풍성하고 따뜻했다. 기다림과 설렘으로 맞았던 설날의 기억은 그리움이고 고향을 잊을 수 없는 나라로 이끄는 촉매제며 옛날의 궁핍을 현재의 풍요로 숙성 시킨 발효제이다.
고향집에서는 동지가 지나자마자 곧 설 차림을 준비하셨다. 부친께선 벽장과 미닫이문에 깨끗한 십장생(十長生)과 대나무 난초화를 새로 붙이시기도 했다. 일군들은 큰 가마솥에 조청과 엿을 고느라 들기름을 먹여 미끄러운 사랑방의 장판지는 나의 연한 살이 델만큼 설설 끓는 듯 뜨거웠다. 낮에는 설 차례 상과 세배손님들의 음식장만이 시작되어 찬 방에선 한과를 만들고 강정을 튀겨 색색의 쌀 튀김옷을 뭍치고, 다식과 경단 정과를 만드느라 송홧가루, 잣, 들깨와 참깨 등 냄새 고소한 손바닥들은 기름으로 반들거렸다. 어린 손녀는 다식판들의 문양이 좋아서 다식 찍는 일을 할아버지께 조르기도 했다. 밤에는 등잔불과 촛불을 밝혀놓고 조부모님과 부모님, 숙부, 삼촌과 어린 내 것까지 대가족의 설빔을 짓느라 인두와 다리미질로 부녀들의 긴 겨울밤은 빨리 흘러갔다. 옆에서 지켜보던 어린 마음에도 저고리의 동글고 참한 깃의 빨강색과 반듯한 하얀 동정과의 산뜻한 만남, 앞섶의 날렵한 코끝에서 소매 끝까지 여유로운 곡선의 흐름 등 예쁜 한복의 멋을 느낀 것 같다. 남정네의 마고자에 달린 노랗고 큼직한 호박단추를 만지작거리다 어른들 옷은 함부로 만지는 법이 아니라고 꾸중도 들었다. 장화홍련전이나 사씨남정기, 흥부와 놀부 또는 나무꾼 과 선녀의 얘기도 그 시절 화롯가에서 어른들이 들려 주셨다. 밤이 깊어 어른들도 속이 출출해 지시면 마당 끝에 묻어 둔 김장독의 눈을 털며 동치미를 꺼내다 얼음이 동동 뜨는 시원한 국수를 밤참으로 말아먹던 맛도 유전자처럼 박힌 우리네 고향의 맛이다.
섣달 그믐날은 묵은 것을 모두 청소하여 깨끗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았다. 설날 새벽부터 서둘러 준비를 해도 종가집의 설날아침은 큰 차례 상을 올리고 어른들께 세배를 하고나면 대문 밖에 벌써 아이들 소리가 들려 와 어린 소녀는 공연히 혼자서 애를 태웠다. 눈이 녹아내려 처마 끝엔 수정고드름이 햇살에 반짝였다. 머리에 조바위를 쓰고 햇솜을 두어 만들어 주신 때때옷의 신선한 감촉과 새 신을 신고 나와 발걸음 따라 나는 뽀드득 소리를 즐기며 소복한 눈길을 걸어 세배를 다녔다. 그리운 옛 고향의 설날풍경, 이 애틋한 그림을 가슴에 품고 미국에서 살아 온지 어느 덧 수십 년이 지났다.
조국이 해방되고 음력설을 찾았으나 이중과세라는 명분으로 양력설에 밀려났다가 고유한 전통 풍습과 조상을 기리는 의미에서 다시 우리의 설로 되찾았다. ‘설날’의 ‘설’은 ‘서다(立)’를 어근으로 들어서다를 의미하며 ‘시작하다’란 뜻도 있다. 현대는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회가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변화가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온고지신이란 말처럼 우리민족의 훌륭한 전통문화와 유산을 익히고 그 위에 새로운 미래를 건설함은 설날의 뜻에 걸맞게 새해 들어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고국을 멀리 떠나 온 우리 동포들도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미래는 창대하리라는 꿈을 품고.
2-18-2010 '이아침에'/미주중앙일보
조옥동 시인
민족의 설날이 방금 지났다. ‘음력설을 맞기까지는 아직 나의 설을 기다리겠어요.’ 하는 심정으로 맞이한 새해다. 돌아보면 모두가 가난했던 그 옛날도 설날은 아주 풍성하고 따뜻했다. 기다림과 설렘으로 맞았던 설날의 기억은 그리움이고 고향을 잊을 수 없는 나라로 이끄는 촉매제며 옛날의 궁핍을 현재의 풍요로 숙성 시킨 발효제이다.
고향집에서는 동지가 지나자마자 곧 설 차림을 준비하셨다. 부친께선 벽장과 미닫이문에 깨끗한 십장생(十長生)과 대나무 난초화를 새로 붙이시기도 했다. 일군들은 큰 가마솥에 조청과 엿을 고느라 들기름을 먹여 미끄러운 사랑방의 장판지는 나의 연한 살이 델만큼 설설 끓는 듯 뜨거웠다. 낮에는 설 차례 상과 세배손님들의 음식장만이 시작되어 찬 방에선 한과를 만들고 강정을 튀겨 색색의 쌀 튀김옷을 뭍치고, 다식과 경단 정과를 만드느라 송홧가루, 잣, 들깨와 참깨 등 냄새 고소한 손바닥들은 기름으로 반들거렸다. 어린 손녀는 다식판들의 문양이 좋아서 다식 찍는 일을 할아버지께 조르기도 했다. 밤에는 등잔불과 촛불을 밝혀놓고 조부모님과 부모님, 숙부, 삼촌과 어린 내 것까지 대가족의 설빔을 짓느라 인두와 다리미질로 부녀들의 긴 겨울밤은 빨리 흘러갔다. 옆에서 지켜보던 어린 마음에도 저고리의 동글고 참한 깃의 빨강색과 반듯한 하얀 동정과의 산뜻한 만남, 앞섶의 날렵한 코끝에서 소매 끝까지 여유로운 곡선의 흐름 등 예쁜 한복의 멋을 느낀 것 같다. 남정네의 마고자에 달린 노랗고 큼직한 호박단추를 만지작거리다 어른들 옷은 함부로 만지는 법이 아니라고 꾸중도 들었다. 장화홍련전이나 사씨남정기, 흥부와 놀부 또는 나무꾼 과 선녀의 얘기도 그 시절 화롯가에서 어른들이 들려 주셨다. 밤이 깊어 어른들도 속이 출출해 지시면 마당 끝에 묻어 둔 김장독의 눈을 털며 동치미를 꺼내다 얼음이 동동 뜨는 시원한 국수를 밤참으로 말아먹던 맛도 유전자처럼 박힌 우리네 고향의 맛이다.
섣달 그믐날은 묵은 것을 모두 청소하여 깨끗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았다. 설날 새벽부터 서둘러 준비를 해도 종가집의 설날아침은 큰 차례 상을 올리고 어른들께 세배를 하고나면 대문 밖에 벌써 아이들 소리가 들려 와 어린 소녀는 공연히 혼자서 애를 태웠다. 눈이 녹아내려 처마 끝엔 수정고드름이 햇살에 반짝였다. 머리에 조바위를 쓰고 햇솜을 두어 만들어 주신 때때옷의 신선한 감촉과 새 신을 신고 나와 발걸음 따라 나는 뽀드득 소리를 즐기며 소복한 눈길을 걸어 세배를 다녔다. 그리운 옛 고향의 설날풍경, 이 애틋한 그림을 가슴에 품고 미국에서 살아 온지 어느 덧 수십 년이 지났다.
조국이 해방되고 음력설을 찾았으나 이중과세라는 명분으로 양력설에 밀려났다가 고유한 전통 풍습과 조상을 기리는 의미에서 다시 우리의 설로 되찾았다. ‘설날’의 ‘설’은 ‘서다(立)’를 어근으로 들어서다를 의미하며 ‘시작하다’란 뜻도 있다. 현대는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회가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변화가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온고지신이란 말처럼 우리민족의 훌륭한 전통문화와 유산을 익히고 그 위에 새로운 미래를 건설함은 설날의 뜻에 걸맞게 새해 들어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고국을 멀리 떠나 온 우리 동포들도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미래는 창대하리라는 꿈을 품고.
2-18-2010 '이아침에'/미주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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