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의 맛

2016.08.04 06:11

한성덕 조회 수:93

칭찬의 맛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한성덕



요즈음 내 글에서는 칭찬이 자주 언급된다. 인생에서 새 맛을 느낀 까닭이다. 기쁨과 희망이 그 안에 있다는 깨달음이 새삼스럽다.

미국 중서부의 한 대학에서 천재적인 문학재능을 가진 젊은이들이 모임을 가졌다. ‘문학 비판 클럽’이란 이름아래 정기적으로 작품을 읽고 비판했다. 상대방의 문학적 재능을 최고로 끌어 낼 수 있다는 고상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 대학에 평범한 여성들로 구성된 문학 모임이 또 있었다. ‘문학 토론 클럽’이었다. 상대방의 글을 읽고 토론에 들어가면 모두가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제아무리 사소하고 졸렬한 글이라도 시도했다는 자체에 무게를 두고 칭찬을 쏟아냈다. 그 바람에 늘 생기가 돌고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20년이 훌쩍 넘은 세월, 그 대학 졸업자들의 근황을 조사하다가 확연한 결과에 적이 놀랐다. 천재들로 구성된 문학 클럽에서는 단 한 사람도 이렇다 할 성취자가 없었으나, 보통 사람이었던 여성들 중에는 여섯 명의 뛰어난 작가가 탄생했다. 비판을 지양하고 칭찬과 격려로 서로에게 찬사를 보내던 학생들이었다.

본래 비평이란, ‘사물의 아름다움과 추함, 또는 선과 악이 무엇인지 알아 장단점을 평가하고, 그 가치를 판단해서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초석으로 삼자.’는 취지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결점을 파헤치고 퍼뜨리며 악평과 비난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씁쓰레한 면이 없지 않다.

유년 시절의 교회생활에서 필자를 가르쳤던 선생님 중 두 분이 계셨다. 무슨 일에도 칭찬에 인색하고 책망과 핀잔을 하셨던 선생님과, 사소한 일에도 칭찬과 격려를 아낌없이 하셨던 선생님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선생님들은 서로 다른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한 분은 화석처럼 차가운 표정에 웃음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언제 호통 칠지 몰라 불안감으로 가슴을 콩닥거리게 하던 선생님이었다. 다른 분은 입가에 밝은 미소가 늘 번지고 있었다. 열정적 가르침에 우리는 눈 속으로 빨려 들었다. 환한 웃음에 유독 눈이 큰 선생님이었다.

목사 안수 받던 날,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며 용기를 주셨던 선생님을 생각했다. 감사패를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전달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으면 주르르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이 흠뻑 젖도록 우셨을까? 그 모습이 생생하다.

세월이 흘렀다. 공교롭게도 몇 개월의 시차로 두 분 모두 하늘나라로 가셨다. 칭찬 속에 사시던 스승이 먼저 가시자 많은 사람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아쉬움을 토로하며 그 분의 생애를 거론할 때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칭찬 없이 사셨던 스승의 장례식장은 싸늘했다. 생전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된 느낌이었다. 아쉬움이나 안타까움도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세상 떠나기를 잘했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 몇 년 동안 건강 때문에 고생한 탓으로 여겨진다. 그렇다 해도 거긴 그야말로 장례식장이었다. 칭찬과 책망의 차이는 사후까지 영향을 미쳤다.

근래에 와서 유독 칭찬에 매력을 느낀다. 수필 지도교수님의 이념과 사상 때문이다. 찬찬히 들여다보고 기다려 주시니 수필이 된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배짱으로 글을 써가고 있다. 그런 중에도 별 말이 없으시다. 그래서 마음을 열고 이것저것을 써본다. 보폭을 넓혀가는 필자의 날갯짓이다. 때때로 이 글만은 호된 비판과 질책이 쏟아지리라는 생각에 지레 겁을 내기도 한다. 글이 글답지 않아 수정하기를 망설일 때가 어디 한두 번이겠는가? 어떤 개념이나 의미도 없는 글이어서 쓰레기통에 내동댕이치고 싶을 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말씀은 접고, 오롯이 칭찬과 격려를 하신다. 처음에는 단조로운 강의에 섭섭함이나 오해도 있었다. 결국은 제자 사랑이요, 더 넓게 더 높게 날아오르라는 메시지로 다가왔다. 성장통을 스스로 극복하라는 탁월하신 지도법이요, 고도의 훈련이었다. 처음부터 비판이 쏟아졌더라면 그 두려움 때문에 무슨 글을 쓸 수 있었겠는가? 겁이 나서 일찍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은 칭찬과 격려 속에 수필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 가고 있다. 그 세계에서 자유를 누리며 마음껏 활보하는 보람도 있다. 냉소와 비판의 날개는 날아가고 칭찬과 격려의 날개 아래서 푸드득거리고 있다. 언젠가는 훠이훠이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드높은 창공 저 높은 하늘로 날아오를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기쁨과 행복이 안겨지는 칭찬을 그 어디에서 찾겠는가? 내가 좋아하고 있으니 인생의 새로운 맛이 아닌가?

(2016.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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