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2016.08.07 18:53
더위가 한 풀 꺾이는가 싶더니, 해도 짧아졌다.
퇴근하는 길,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천천히 걸어 차로 향한다.
신호등 앞에 선다.
사방 열린 십자길이다.
빨간 불이 켜진다.
모든 차량이 멈춰 선다.
건너편 길 신호등은 푸른 등으로 바뀐다.
그 편에 선 차들은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제 향방을 향해 달아난다.
빨간 불과 파란 불 그리고 호박등 같은 노란 등이 교대로 바뀌며 켜졌다 꺼졌다 한다.
바쁠 것도 없는 나는 신호등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늠해 본다.
가고 싶은 길과는 또 다른 두 길이다.
살아오는 동안, 나는 가야할 길을 제대로 걸어 왔던가.
아니면, 가지 말아야할 길들을 더 많이 걸어 왔던가.
그도 아니면, 향방을 정하지 못한 채 노란 불이 바뀌어도 서성이고만 있었던가.
살아오면서 내 두 발자국을 남긴 길들을 헤아려 본다.
또박또박 걸으며 자세를 고쳐 보지만, 과연 제대로 걸어 온 길의 길이는 얼마나 될까.
스스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내 삐뚤거린 발자국들.
파도는 말없이 와 모래펄에 새겨진 내 발자욱을 지워주고 , 눈발은 먼 길 따라오며 삐뚤거리는 내 발자국을 지워주었지.
많이도 흘러간 세월.
열린 길은 아득한데,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여일들.
또 얼마나 서성이며 망설이며 가고 싶은 길 가지 못하고 돌아서서, 가야 할 길을 향해 걸어가야 할까.
서성이는 동안, 날은 더욱 어둑해지고 거리의 가로등 하나 둘 켜진다.
흐린 시야 너머로 호박등 들고 기다리는 어머니도 보이고, 낮은 언덕 위론 오래 전에 떠난 옛님의 모습도 흐릿하게 보인다.
산 허리를 돌아 마을을 덮던 는개와 같이 가물거리는 그리운 풍경들.
잡을 수도, 데려올 수도 없는 내 젊은 날의 소묘여!
사라진 것들, 사라져가는 것들은 늘 늦가을 느낌을 준다.
거리의 풍경은 네온 아래 화려하나, 내 그리운 풍경들은 점점 멀어져가고 우체통 하나 외딴 섬처럼 홀로 서 있다.
어느 새, 날은 더욱 어두워지고 새도 깃을 찾아 숨어든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진 길은 사방으로 열린 십자길.
가야만 하는 내 길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가고 싶은 길은, 붉은 기 곳곳에 꽂혀 갈 수가 없기에...
신호등은 여전히 붉고 푸른 등 번갈아 켜며 내 갈 길 어서 가라고 등을 떠민다.
댓글 0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868 | 수필-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 서경 | 2020.04.10 | 7 |
867 | 44, 45, 석 줄 단상 - 내 사랑 팜트리 외 1 | 서경 | 2022.06.13 | 7 |
866 | 98. 99. 석 줄 단상 - 가끔은 외 1 | 서경 | 2022.08.13 | 7 |
865 | 포토시 - 고사목 2 | 서경 | 2023.12.28 | 7 |
864 | 포토 에세이 - 겨울 나무 빈 가지 | 서경 | 2020.04.03 | 8 |
863 | 92. 93. 석 줄 단상 - 이런 신부 어떠세요? 외 1 | 서경 | 2022.08.07 | 8 |
862 | 79. 80. 석 줄 단상 - 성 토마스 성당 미사 참례 외 1 | 서경 | 2022.07.15 | 9 |
861 | 12. 석 줄 단상 - 아, 4.29 그날! | 서경 | 2022.05.05 | 9 |
860 | 포토 에세이 - 저마다 제 소임을 | 서경 | 2019.01.26 | 9 |
859 | 수필 - 고양이 돌보기 | 서경 | 2019.09.06 | 9 |
858 | 포토 에세이 -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 서경 | 2020.02.25 | 9 |
857 | 포토 에세이 - 오리 두 마리 | 서경 | 2020.04.28 | 9 |
856 | 94. 95. 석 줄 단상 - 피장파장 외 1 + | 서경 | 2022.08.07 | 9 |
855 | 5행시 - 퍼즐맞추기 | 서경 | 2017.04.26 | 10 |
854 | 수필 - 멋진 조카 러너들 | 서경 | 2017.06.06 | 10 |
853 | 포토 시 - 어머니와 어머이 | 서경 | 2018.07.03 | 10 |
852 | 포토 시 _ 극락조 + 영역 | 서경 | 2018.07.03 | 10 |
851 | 포토 에세이 - 무지개 핀 마을 | 서경 | 2019.02.15 | 10 |
850 | 수필 - 마흔 살 딸아이 | 서경 | 2020.02.25 | 10 |
849 | 수필 - 딸의 여행 준비 | 서경 | 2020.02.25 |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