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미주

2010.01.13 10:01

이월란 조회 수:54

이 남자



이월란(10/01/13)
  


  
모니터 앞에 몇 시간을 죽치고 앉아 있다 오더니
이 남자, 포르노만 진탕 보고 온 것인가 물이 올라 있다
나도 덩달아 물이 올라 기가 막힌 시상이 떠오르는데
손 뻗으면 머리맡에 메모첩과 펜이 놓여 있는데
이 몽둥이 같은 물건이 번데기로 진화라도 해 버린다면
이 남자, 날 가만 두지 않을 기세다
내 강아지에게 침을 뱉고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겠다
낮에 쌓이는 건 밤에 풀리지만 밤에 쌓이는 건 낮에 풀리지
않는다는 신앙을 철저히 믿고 사는 이 남자
내가 풀 수 없는 너의 히스테리는 없어
어느 제목 아래 들어가야 하는 행간이더라
지금 받아 놓지 않으면 깡그리 잊어버리는 건 기정사실
사랑한다는 말은 세컨드 랭귀지로 하지마
가만, 바디 랭귀지가 먼저였나 한국말이 먼저였나
어디에라도 받아 적어 놓아야 한다
이 남자는 아직 나의 시를 단 한 개도 읽어보지 않았다
내 몸에 갈겨놓은 시들만 유독 잘 읽어낸다
데리고 살기엔 안성맞춤이다
난 길고 가는 것보다 짧고 굵은 인생이 더 좋아
그래야 오래 오래 아프지 않아
나의 집중력이 정교한 키스에 있다는 건 죽어서도 잊지마
스타카토 보다는 리타르단도가 좋아
클리토리스와 G스팟은 아르페지오로 연주해 줘
눈 속에 있는 악상기호를 제대로 읽어야 해
온음의 쉼표쯤은 오른쪽 귓불에다 찍어주고
갑자기 포르티시모로 날 놀래켜도 나쁘지 않아
그래, 거기, 거기에라도 써 둬야겠어
아, 거기
쓰면 지우고 쓰면 지워버리는 이 남자
돈도 되지 않는 시 같은 건 뭐하러 쓰니
절정의 순간들을 매일밤 새겨 두고 자고 싶어
더 깊숙이 날 건드리면 포르노 작가가 되는 수가 있어
어, 거기
어,
등짝 가득 열 손톱으로 붉은 점자책을 만들어 버렸더니
쓰지 말랬잖아
나를 아예 엎어버리는, 이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