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의 무대, 청산도

2016.08.28 04:57

신팔복 조회 수:78

서편제의 무대, 청산도

전주시 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신팔복



청산도! 꼭 가보고 싶은 섬이었다. 영화 ‘서편제’를 보고부터 그런 마음이 생겼다. 여행계획을 세우고 인터넷으로 펜션도 잡았다. 초등학교 동기생 부부계원 열 명이 제시간에 맞춰 전주시 인후동 안골에서 만났다. 활짝 웃으며 악수하는 손에서도 여느 때와는 달리 기쁨이 전해졌다. 가져온 음식과 짐을 두 대의 차에 나눠 실었다.

오래된 모임인데 이제는 다섯 가족만 남았다. 우연히 김, 탁, 신, 최, 임씨 성으로 각각 다른 오성(五性) 모임이다. 나는 아내와 세 명의 친구 부인(夫人)을 태웠고, ‘김’은 나머지 계원을 태우고 출발했다. 에어컨을 최대로 틀었으나 차 안은 벌써 ‘하하 호호’ 웃음의 열기로 뜨거웠다. 한 사람이 이야기하면 또 한 사람이 꼬리를 이었다. 대부분 남편한테 겪었던 이야기로 이순을 넘긴 할머니들의 수다였다. 억눌렸던 가슴을 열고 이야기로 풀어내면 마음이 후련해지는 감정치유방법인 것 같았다. 내가 맞장구를 쳐주면 더욱 신바람이나서 함빡 웃음꽃을 피웠다. 여행에서나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완도에 도착하여 중앙공원에 올랐다. 완도읍이 내려다보이고 해변과 섬들이 잔잔한 바다 위에 떠 있었다. 관광목적으로 꾸며진 아름다운 공원이었다. 찌는 무더위가 온몸을 휘감아 땀은 그치지 않았다. 두 대의 차를 배에 싣고 우리는 2층 객실로 들어갔다. 에어컨으로 방은 시원했다. 뱃머리로 나와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며 멀리 한가롭게 보이는 섬들을 바라보다가 청산도 주민을 만났다. 주말이면 붐빈다는데 오늘은 아주 여유가 있다고 했다. 흰 구름이 걸쳐있는 청산도가 점점 가까워졌다. 남해의 푸른 바다 청정해역에 전복과 김 양식장이 아주 넓게 펼쳐져 있었다.

우르르 배에서 내려와 청산도 땅을 밟았다. 청산면사무소, 청산중학교, 복지회관과 수협판매장이 있는 소재지 작은 마을이었다. 갯바람이 몰려왔다. 권덕리 펜션을 찾아갔다. 30여 채의 집이 있는 갯마을이었다. 젊은 주인의 안내를 받고 짐을 풀었다. 일정에 맞춰 차를 몰아 범 바위를 찾아갔다. 한 마리의 범이 바다를 지키고 있었다. 바위 끝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는 깊은 낭떠러지였고 검푸른 파도가 갯바위를 때리니 흰 물결이 넘실댔다. 망망대해가 우리 앞에 펼쳐졌다. 떠가는 배들은 나뭇잎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저 바다 끝에 제주도가 있을 것 같았다. 뜨거운 햇볕을 가리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번엔 당리 서편제 영화촬영지로 갔다. 초가집 세트장에는 소리꾼 유봉의 의붓아들인, 어머니를 잃은 동호가 둥둥 북을 치고, 오누이로 맺어진 유봉의 딸 송화가 소리를 하고 있었다. 목 놓아 토하는 소리는 듣는 이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고, 전처와 후처를 모두 잃고 소리 품으로 떠돌며 살아가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가난한 삶을 이어가는 설움을 서리서리 풀어내는 피맺힌 울부짖음으로 들려왔다. 그들 옆에 앉아 북채를 다듬으며 유봉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아마도 최고의 소리꾼과 명고수를 만들어 박복한 자기의 한(恨)을 소리로 담아내려고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듯 보였다.

푸른 바다와 초록 산, 황톳길이 어우러진 곳, 청산도 서편제 소리 길에 올랐다. 황토로 다져진 길과 낮은 돌담 옆으로 비탈진 밭이 영화 장면 그대로였다. 돌담 사이에서 흐르는 진도아리랑의 가락이 추임새로 목을 끌어 올리더니 ‘아리랑 응 응 응’하는 후렴이 주막집 막걸리의 취기에 흥을 실어 결국 어깨가 들썩거렸다. 서편제 소리는 우리 민족의 한과 낙을 소리로 풀어내고 있었다.

펜션에 모여 각자 만들어 온 음식을 식탁에 차리니 진수성찬이었다. 삼겹살, 김치, 더덕장아찌, 도토리묵, 계란말이, 낙지젓 등 산해진미에 술이 돌면서 모두 취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숟가락 마이크를 잡고 흥겹게 노래를 불렀다. 모두가 흘러간 옛 노래였지만 가사를 잃어버려 멈출 때가 많았다. 나이가 든 탓이었다. 그래도 악을 쓰며 노래를 불러댔다. 막역한 친구들이라 모두 즐거워했다.

새벽 바닷길은 너무 조용했다. 아침밥을 먹고 양지리 세계중요농업유산인 구들장 논을 보러 갔다. 2, 30평쯤 되는 다랑논엔 벼가 패고 있었다. 돌담을 쌓아 만든 앞 둑에는 듬성듬성 구들의 구멍이 있었다. 가파른 산비탈에 구들을 몇 겹으로 쌓고 진흙을 바르고 또 쌓기를 여러 번 해서 물을 잡아 벼를 심었는데 4, 5백 년 전부터 이어온 농법이라 했다. 작은 다랑논이지만 생선은 많아도 쌀이 귀했던 이곳 조상들의 쌀 생산 지혜에 탄복했다. 인간의 굳은 의지를 보았다. 지리해수욕장의 해송이 아름다워 기념사진을 찍고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서편제의 무대 청산도를 나왔다.

(2016.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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