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자연애, 소박한 아름다움
사임당 신씨의전(傳)
초충도(草蟲圖)는 야생의 풀과 곤충을 그린 그림이다.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을 소재로 한 배경에는
어떤 심성이 작용하고 있었는가를 살피고,
소재와 표현 방법을 살펴 한국적 미의식의 실체를 파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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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 신씨에 대하여 알아보자
사임당 신씨(師任堂 申氏, 1504-1551)
여류 문인이자 서화가로 유명하다. 아버지는 명화(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龍仁李氏)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밖에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齋)라고도 하였다. 안견의 영향을 받은 화풍에 여성의 독특한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우리 나라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받았다. 산수·포도·풀벌레 등을 잘 그렸다
1. 출생과 성장
아버지는 명화(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龍仁李氏)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밖에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齋)라고도 하였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 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다. 외할아버지 사온이 어머니를 아들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으므로, 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
2. 출가후의 생활
19세에 덕수이씨 (德水李氏) 원수(元秀)와 결혼하였다. 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으며, 얼마 뒤에 시집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하였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38세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壽進坊:지금의 壽松洞과 淸進洞)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 (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3.자질과 재능
사임당이 지향한 최고의 여성상은 태임으로 그녀를 본받는다는 뜻으로 당호를 지었는데, 사임당을 평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온아한 천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 배우고 본뜬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때문이다. 그러나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켰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좋은 환경이 있었다. 그의 재능은 7세에 안견 (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하였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그녀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 등은 그녀의 섬세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4.그림 재능
그녀의 그림·글씨·시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포도·화조·어죽(魚竹)·매화·난초·산수 등이 주된 화제(畵題)이다. 마치 생동하는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산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뻔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글씨 재능
글씨로는 초서 여섯폭과 해서 한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고종 5)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는데,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 머리〔馬蹄蠶頭〕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관하여 명종 때의 사람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여섯 폭짜리 초서가 오늘까지 전해진 경과를 보면, 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이 이 여섯폭 초서를 얻어간 것을 그 딸이 최대해(崔大海)에게 출가할 때 가지고 가 최씨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하였다. 그런데 영조 때에 이웃 고을 사람의 꾐에 빠져 이를 빼앗겼다가 어렵게 되찾아 그뒤 최씨집안에서 계속 보관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강릉시 두산동 최씨가에 보관되어 있으며, 윤중의에 의하여 판각된 것만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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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예술적 환경
사임당으로 하여금 절묘한 경지의 예술세계에 머물게 한 중요한 동기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현철한 어머니의 훈조를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는 완폭하고 자기주장적인 유교사회의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러한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남편은 자질을 인정해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 넓은 사나이였다는 점이다. 먼저 그의 혼인 전 환경을 보면 그의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철한 어머니를 통해서 사임당에게 전수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웠고, 출가 뒤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이 겪는 시가에서의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이 없었다. 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소신껏 일상생활과 자녀교육을 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머니에게 훈도를 받은 명석한 그녀는 천부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가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 踰大關嶺望親庭〉이나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 思親〉 등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절절한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머니의 세계가 사임당에게 그만큼 영향이 컸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교적 규범은 여자가 출가한 뒤는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하였는데도 그것을 알면서 친정을 그리워하고 친정에서 자주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의리의 규범보다는 순수한 인간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예술속에서 바로 나타나듯이 거짓없는 본연성을 가장 정직하면서 순수하게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술성을 보다 북돋아준 것은 남편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은 사임당의 그림을 사랑의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또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또 그는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임당의 시당숙 이기(李#기59)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남편이 그 문하에 가서 노닐었다. 이기는 1545년(인종 1)에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크게 화를 입혔던 사람이다. 사임당은 당숙이기는 하나 이와같은 사람과 남편이 가까이 지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남편에게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을 탐하는 당숙의 영광이 오래 갈 수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권하였다. 이원수는 이러한 아내의 말을 받아들여 뒷날 화를 당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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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후손과 작품
사임당의 자녀들 중 그의 훈로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것은 셋째 아들 이(珥)이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혔다.
윤종섭(尹鍾燮)은 이이와 같은 대성인이 태어난 것은 태임을 본받은 사임당의 태교에 있음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다. 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이는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이매창(李梅窓)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작품으로는 〈자리도 紫鯉圖〉 ·〈산수도 山水圖〉 ·〈초충도 草蟲圖〉 ·〈노안도 蘆雁圖〉 ·〈연로도 蓮鷺圖〉 ·〈요안조압도 蓼岸鳥鴨圖〉와 6폭초서병풍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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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수박과여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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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영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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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오이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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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원추리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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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초충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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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초충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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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초충도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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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초충도병중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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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필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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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필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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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및 작품내력
시·서·화에 두루 능했던 사임당은 신명화(申命和)의 둘째 딸로 태어나 감찰 이원수(李元秀)에게 출가하여 높은 인품과 조선 유학의 거유(巨儒)인 율곡 이이(李珥)를 낳아 오늘날도 사표(師表)로 크게 칭송 받는 한국의 대표적인 어머니 상이다.
《율곡집》에 나오는 그림에 관계된 글을 살펴보면, 7세 때부터 안견(安堅)의 그림을 따라 배우기 시작하여 산수·포도·화훼·초충 등을 즐겨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유작들이 다수 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초충도류가 단연 뛰어나다. 현재 국립 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초충도〉는 사임당 신씨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종이에 채색을 사용하여 그린 〈초충도〉는 현재 10폭으로 꾸며져 있는데, 8폭은 그림이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2폭에는 신경(申暻)과 오세창(吳世昌)의 발문이 적혀 있다.
발문에 따르면 신경이 율곡과 동시대인 이양원(李陽元)이 간직했던 것을 그 후손에게서 구입하여, 당시 정필동(鄭必東)이 지니고 있던 진품과 비교한 후 사임당의 소작으로 단정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오늘날 이 〈초충도〉를 사임당 신씨의 그림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전(傳)’ 자를 이름 앞에 붙인다.
작품 내용
〈초충도〉는 문자 그대로 풀과 벌레 등을 그린 그림이다. 전 화폭을 통하여 매우 다양한 동식물과 곤충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각 화폭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폭에는 가지·방아깨비·개미·나방·벌 등이 등장하고 있다. 땅위에 개미 한 쌍과 방아깨비가 기어다니고, 위쪽에는 나비·벌·나방이 날고 있다. 자연 생태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제2폭에는 수박·들쥐·패랭이꽃·나비·나방 등이 등장하고 있는데, 특히 수박을 파먹는 들쥐 두 마리의 모습이 흥미롭다. 민화에서는 수박이 다남(多男)의 상징물로 여기지만 이 그림에서는 그런 의미와는 상관이 없다.
제3폭은 공간을 나는 나비, 원추리꽃 줄기에 붙은 매미, 뛰어 오르려는 개구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 화폭의 것과 같은 구성 요소와 짜임새를 가진 문양이 반닫이나 장롱 등 가구 장식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원추리는 일명 망우초(忘憂草), 또는 훤초(萱草)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시경 詩經》에서 유래한 것으로, 근심을 잊고 답답함을 푼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여기서는 그저 흔히 보는 식물 중 하나일 뿐이다.
제4폭에는 여뀌·메꽃·잠자리·벌·사마귀 등이 등장하고 있다. 잠자리는 여뀌 주위를 날고 있고, 사마귀는 땅을 기면서 벌을 노리고 있다. 사마귀는 민화나 다른 그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소재이지만 초충도에서는 자주 등장한다.
제5폭에는 맨드라미·산국화·나비·쇠똥벌레 등이 등장하고 있다. 쇠똥벌레 세 마리가 제나름대로 일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나비는 맨드라미 주변을 무리지어 날아다니고 있다. 이 화면의 주인격인 맨드라미는 계관화(鷄冠花)라고도 부르는데, 민화에서는 관계에로의 진출을 상징하지만 이 경우에는 그것과 상관없이 보인다.
제6폭에는 어숭이꽃·도라지·나비·벌·잠자리·개구리·메뚜기가 등장하고 있다. 나비와 잠자리는 어숭이꽃과 도라지꽃 주위를 맴돌고 있고, 개구리는 땅에 기는 메뚜기보다 허공을 나는 나비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잠자리는 고려 동경이나 도자기 장식 문양에 등장한 예가 있으나 다른 그림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제7폭에는 양귀비·패랭이꽃·달개비·도마뱀·갑충 등이 등장하고 있다. 도마뱀이 고개를 돌려 갑충의 거동을 살피는 모습이 재미있다.
제8폭에는 개구리·땅강아지·벌·오이·강아지풀 등이 그려져 있다. 개구리가 땅강아지를 잡아먹으려고 살금살금 다가가는 모습이 비장하기까지 하다.
표현 형식 및 소재의 성격
〈초충도〉의 각 화폭은 모두 지면(地面)과 허공이 약 1:2의 비율로 나뉘어 있으며, 각 영역에는 거기에 서식하는 곤충·파충류 등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땅에 뿌리 박고 자라는 식물은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지면과 허공을 연결하고 있다. 이와 같은 화면 형식이 당대 자수의 본(本)이나 가구 장식 문양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정형화 된 것으로 생각된다.
소재를 보면, 〈초충도〉에 등장한 쇠똥벌레·도마뱀·사마귀·개미 같은 것들은 초충도류가 아닌 다른 그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민화 등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처럼 특별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없다. 따라서 〈초충도〉는 의미상징물로서가 아니라 자연 생태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일종의 사생화와 같은 성격의 그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초충도〉에는 자연계의 생태, 또는 약육강식의 장면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는 부분이 많다. 벌을 잡아먹으려고 노려보는 사마귀의 모습이라든가, 개구리가 땅강아지를 뒤따라가 덮치려 할 때, 이미 그 낌새를 알아 챈 땅강아지가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는 장면, 그리고 들쥐들이 수박을 파먹고 있는 모습 등이 그것이다.
평가
이처럼 생동감과 현장감이 넘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고 하지만, 〈초충도〉는 눈앞에 전개되는 실제의 장면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자연 생태계에 대한 일반적 인식 내용을 전형화된 형식을 빌어 표현한 관념적인 그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초충도〉를 보고 원초적 심성을 자극하는 미적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림의 배면에는 자연에 대한 깊고 순수한 애정이 짙게 배어 있고, 전면에는 미추(美醜)와 호오(好惡)로써 구별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순정적인 필치로 펼쳐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양적 사고에서 미의 근본을 ‘미여선동의(美如善同意)’에서 찾는다. 여기서 미는 외형적 아름다움을 말하며, 선은 내적인 요소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된 마음을 뜻한다. 〈초충도〉는 야생의 풀과 곤충을 소재로 한 그림이지만, 모든 화폭에 걸쳐 여성적 우아함과 소박한 아름다움, 그리고 자연에 대한 진솔한 애정이 스며있다. 이런 점에서 〈초충도〉는 미와 선이 융합된 세계이며, 노·장(老莊)이 말한 즐겁고 아름답고 교묘한 미의 경지에 이른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