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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금강산

2006.05.11 19:40

벅영호 조회 수:67 추천:1

아름다운 산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산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이 자랑 스럽습니다.
신이 내려주셨다는 음성의 소유자 세계적인 성악가 조수미씨의 노래와 같이
오늘은 금강산으로 여러분을 모십니다






















    그리운 금강산 -
    조수미


    누구의 주제련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이천봉 말은 없어도
    이제야 자유만민 옷깃 여미며
    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

    후렴: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못 가본지 몇 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다 금강산은 부른다

    비로봉 그 봉우리 예대로 인가
    흰구름 솔바람도 무심히 가나
    발 아래 산해만리 보이지 마라
    우리 다 맺힌 슬픔 풀릴때 까지




세계 데뷔 20년, 조수미가 변한다
조수미. 홍혜경•신영옥. 이른바 ‘3대 소프라노’ 이후
새로운 여성 성악 스타의 출현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강병운•연광철•전승현으로 이어지는 남성 저음 성악인들의 활약에 비교하면, 상당히 아쉬운 대목이다.
올해로 세계 데뷔 20년을 맞은 조수미에게 “포스트 조수미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조수미는 “저도 누군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고 명쾌하게 답했다. 그녀가 말한 ‘포스트 조수미’의 조건은 “노래는 기본이고 자기 마케팅 능력, 언어 구사, 카리스마에 비행기를 연일 갈아탈 수 있는 체력까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조건, 누가 어떻게 채워낼까. 질문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소프라노 조수미에게 세계 데뷔 20년을 맞는 2006년은 ‘변신의 해’다. 1986년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여주인공 질다역으로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극장에서 데뷔한 지 꼭 20년.
자그마한 몸에서 놀랍게 뿜어져나오는 힘과 기교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그가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바흐•헨델•비발디•퍼셀 등 바로크 시대 작곡가의 곡만을 모아 첫 바로크 음반 ‘바로크로의 여행(Journey to Baroque•워너뮤직)’을 1월에 펴내고, 8월에는 중•고교 음악 교사를 대상으로 첫 ‘교육 콘서트’를 갖는다.
콜로라투라 특유의 기교 넘치는 그녀의 음성을 기억하는 팬들에게는 깜짝 놀랄 만한 선물이다.
본지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조수미가 ‘변신’에 얽힌 사연을 공개했다.

―지금까지 숱한 음반을 내놓았지만 바로크 시대의 노래만으로 녹음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어릴 적부터 바로크 음악이라면 끔찍했어요. 다섯살 때 피아노를 시작했는데, 바흐의 ‘인벤션’만 하루 8시간씩 쳐야했죠. 어머니가 방문을 걸어잠그고 안 열어줬으니까요.”


―바로크 음악과의 ‘화해’가 쉽지 않았겠네요.
“하지만 언제까지 피해갈 수만은 없죠. 도전하는 삶이 재미있지 않나요?


 제가 가장 많이 출연했던 오페라인 ‘마술피리’ ‘리골레토’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도 당분간 하지 않으려 해요. 2007년에도 ‘라 트라비아타’ ‘연대의 딸’ ‘라크메’ 등 그동안 하지 않았던 작품으로만 골랐어요.”


―바로크 음악의 매력은 뭔가요.
비발디는 바로크 시대의 멜로디 메이커(melody maker)에요. 성악 테크닉이 필요한 대목이 오면, 때로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사정 없이 몰아치죠. 바흐의 ‘커피 칸타타’를 녹음할 때는, 실제 카페에서 커피 한잔 시켜 놓고 작곡가와 대화하는 기분으로 노래했어요.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이라도 다녀온 것 같아요.”


―8월에는 음악 교사들이 무료로 참가할 수 있는 ‘교육 콘서트’를 연다지요.
“지금까지 제 자신의 음악 커리어를 가꾸기 위해 애썼다면, 이제는 팬들에게 영원히 기억되고 사랑받는 아티스트로 남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요. 선생님들이 음악을 통해 아이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지 함께 대화했으면 해요.”


―’교육 콘서트’는 1차례만 여는 겁니까.

“아니에요. 8월에 1차례 열고 나서, 마스터 클래스 같은 형식으로 정기적으로 계속할 겁니다. 마리아 칼라스의 줄리아드 음대 마스터 클래스는 전설로 남아있잖아요. 지금까지 남에게 음악을 가르쳐본 적이 한번도 없어요.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에게만 가르쳐본 셈이죠. 가르친다는 것은 무대에 서는 것과는 무척 다를 것 같아요.”


―동양인 가수로서 세계 무대에서 시련을 겪은 적은 없나요.

“왜 없었겠어요. 막상 미국이나 유럽의 대형 극장에서 타이틀 배역을 따낸 뒤에도 서양인보다 체격도 작고 자라난 문화적 배경도 다르다는 이유로 연출가에게 ‘거절(reject)’ 당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럴 때도 풀이 죽거나 좌절하지 않는 성격이에요. 제 공식적인 답변은 ‘큰 시련은 없었다’입니다.”


―20년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물론 카라얀입니다.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무도회’ 녹음 때 플라시도 도밍고 같은 성악가와 함께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줬고,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도 설 수 있었죠. 제겐 그저 할아버지같은 분이라, 연습할 때 그 분의 은색 머리를 잡아당기며 장난도 많이 쳤어요. ‘타고난 목소리가 있으니 절대 무리하지 말라’ ‘성대를 끊임 없이 가꾸라’고 늘 가르침을 주셨죠.”

―최근 공연이 대부분 크로스오버 위주였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런 비판은 처음 들어요. 공연할 때마다 합창곡과 교회 음악도 넣고,
정통 클래식과 한국인이 좋아하는 곡 사이에서 밸런스를 잘 맞추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전세계를 다니며 공연을 하는데, 집은 어디입니까? 결혼은 안하시나요.

“너무 늦어서 아무도 절….(웃음) 조금 조바심이 나긴 하네요. 이탈리아 로마에 집이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