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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천(歸天)시인/ 천상병의 일기·편지 발견

2007.03.08 18:18

박영호 조회 수:60 추천:4

귀천(歸天)시인 천상병의 일기·편지 발견

 


"돋보기 살 돈 2만원만 꿔주세요"
"3.1절 아침에 만세 세번 불렀다"

 


▲ 생전의 천상병 시인(오른쪽)과 부인 목순옥 여사.

 

천상병(千祥炳·1930~1993) 시인이 1980년대 초반에 직접 쓴 일기 일부와 편지가 발견됐다.

편지는 1981년 국회의원 고(故) 정상구씨에게 2만원을 꾸어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형님에게 안부를 묻는 내용. 그러나 이 편지들은 보내지지는 않았다. 일기는 1983년 2~3월 쓴 것으로, 3·1절에 집에서 만세를 세 번 불렀으며 연동교회 김형국 목사의 설교에 감명을 받았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부인 목 여사는 “천상병 시인이 돌아가신 직후에 유고들을 정리했는데 그때 누락된 것 같다”고 말했다. 새로 발견된 유고에 대해 천 시인의 친구였던 학술원 회원이자 극작가인 신봉승씨는 “천상병 시인의 생활상과 사상 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역시 친구였던 강민 시인도 “처음 보는 것들로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했다.

 

천상병은 사후에 날이 갈수록 애독자가 늘고 있는 시인이다. ‘천상병 문학제’에 참여하는 사람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대표작인 ‘귀천(歸天)’은 도처에 시비(詩碑)가 세워졌고 교과서에도 실렸다. 대중가요로도 여러 가수가 불렀다. 문단에서는 “의정부에 있는 천 시인의 묘소에는 떡이 굳는 날이 없고 꽃이 시드는 날이 없다”는 말들을 한다. 그만큼 천 시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주 찾는다는 말이다. 새로 발견된 유고를 소개한다.

 

 

◎ 편지

 

정상구 의원에게 보내는 편지는 200자 원고지 3매로 돼 있다. 그 중 주요 내용은 안경값 2만원만 꾸어달라는 내용.

 

“…아내가 몇 달 전에 실직(失職)을 해서 요새는 밥도 못 해먹고 근처의 처가집에서 얻어먹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밥문제는 아니고 내가 수일 전에 돋보기 안경을 잘못 취급해서 못쓰게 되었는데 돋보기가 없으면 적은 활자는 읽을 수가 없어서 요새 가을인데 책을 못 읽어서 답답하기 그지 없어서 선생님께 편지를 씁니다. 아내에게 물으니 한 2만원이면 살 수 있다는데 좀 봐주십시오, 내년 4월이나 5월이면 본인의 책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글도 못 쓸 지경이니 어찌합니까. 책이 나오면 그 인세로 2만원 기어코 갚겠습니다. 선생님 딱 한번만 봐 주십시오.”

 

▲ 정상구씨에게 쓴 편지

 

천상병 시인은 원래 가난을 즐겼다. 그리고 아무리 어려워도 부자에게 손을 내밀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단지 오며가며 만나는 가까운 친구에게 장난삼아 손바닥을 내밀고 500원, 1000원을 얻어 막걸리를 마셨다. 돈을 적게 주던 사람이 갑자기 많이 주면 거스름돈을 주기도 할 정도였다.

 

1980년대 초반에 쓴 그의 시 ‘나의 가난함’을 보자.

 

나는 볼품없이 가난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부족하지 않다.

내 형제들 셋은 부산에서 잘 살지만

형제들 신세는 딱 질색이다.

각 문학사에서는 날 돌봐주고

몇몇 문인들이 날 도와주고

그러니 나는 불편함을 모른다.

다만 하늘에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가난해도

나는 가장 행복을 맛본다.

돈과 행복은 상관없다.

부자는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

 

이처럼 ‘가난이 행복’이라고 노래한 시인이 권력 가진 정치인에게 단돈 2만원만 빌려달라고 한 사정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아내의 실직’에 대해.

 

천 시인의 부인인 목순옥 여사는 1977년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친구와 함께 12평짜리 고가구점을 열었다. 워낙 가난한 부부였지만 친구들의 도움으로 문화인이 즐겨찾는 민화나 고가구 등을 파는 가게를 열었던 것. 목 여사는 1년 후에 가게를 독립했다. 그런데 돈이 없어 고리채를 쓰다보니 빚만 늘어갔다. 게다가 당시 금당(金堂)사건으로 알려진, 골동품 가게 주인이 살해되는 사건이 터진 다음부터는 골동품 거래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는 사람에게 꾸어준 돈을 떼였다. 천 시인이 어쩌다 쓰는 시의 원고료는 편당 3000~5000원에 불과했다. 한 달에 2만5000원 하는 방세도 세 달씩 밀리게 됐다. 목 여사는 마침내 1981년 가게를 정리했다. 그러자 빚쟁이들이 몰려들었다.

빚쟁이들은 목 여사에게 “돈 내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부부가 자는 방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 그런데 살림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천 시인은 “마누라를 경찰서로 데리고 가라”고 야단이었다고 목 여사는 말했다. 목 여사는 “이때가 경제적으로 생활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바로 이때 천 시인은 돋보기 안경을 깨뜨렸다.

 

천 시인은 누워있을 때 안경을 꼭 어깨 밑에다 놓았다고 한다. 잠이라도 자다가 몸을 뒤척이면 안경이 깨지기 십상이다. 몇 번이나 “다른 곳에 안경을 놓고 자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는 것. 이렇게 해서 테가 부러지면 테이프로 붙이고, 또 붙이고 해서 잠시 쓰지만 끝내 쓸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는 “안경을 살 돈조차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돈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정상구 의원에게 2만원이라도 꾸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고 목 여사는 추측했다.

 

당시 야당인 민한당 소속 국회의원이던 정상구씨는 부산여대를 운영하고 시인으로도 활동했다. 천상병 시인과 정상구씨가 특별히 안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정씨가 문단에서 어려운 작가들을 돕는 인물로 소문난 것도 아니었다. 정씨의 아들인 정영호 교수(부산여대)는 “부친이 가깝게 지내던 김춘수 시인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다른 시인을 도왔다는 기억은 없다”고 말했다. 김춘수 시인은 천상병 시인을 시단에 등단시킨 고교 은사이기도 하다. 정 교수는 그러나 “부친이 부산에서 가끔 가까운 시인들에게 식사대접을 하고 여비를 주었다는 말은 들었다”고 전했다. 정상구 의원 앞으로 쓴 편지는 결국 보내지지 않았다.

 

목순옥 여사는 1982년 친지가 운영하는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목기 코너를 열어 쌀과 연탄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됐다. 천 시인도 새로 돋보기 안경을 갖게 돼 다시 책을 볼 수 있게 됐음은 물론이다.

 

▲ 형님에게 쓴 편지
비슷한 시기에 형님에게 쓴 편지에서 천상병 시인은 핵가족제에 대한 불만을 터뜨린다.

 

“요새 세상은 핵가족이라고 하여 장남이 장가들면 딴 집에 살게 하는 것이 보통인데, 나는요 이 핵가족제가 영 싫어 죽겠습니다. 키운 보람이 무엇이겠습니까? 장남이 돈을 벌어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형님은 핵가족이다 하지 말고 같은 집에 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보면 보수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신봉승씨는 “천상병 시인이 보수주의자”라고 단언하며 가족과 관련된 두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천 시인은 1960년대에 신혼이던 신씨의 전셋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통금이 있던 당시 천 시인은 매일 밤 11시59분에 집을 찾았다. 그래서 신씨가 “야, 집주인한테 미안하다. 좀 일찍 들어와라”고 하면 천 시인은 “너 같으면 일찍 들어올 수 있겠냐”고 반문하더라는 것. 남에게 더부살이하는 주제에 일찍 들어와 집안차지를 할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또 한번은 천 시인이 밤에 술을 마신다고 마신 것이 알고 보니 스킨로션을 반 병이나 마셨다. 그래서 신씨가 하루 종일 걱정했는데 그날은 밤 10시30분에 나타나더니 동네 동장집에 문상을 갔다오는 길이라고 하더라는 것. 천 시인은 걱정하는 신씨에게 “동네에서 흉사(凶事)가 있으면 문상을 가야지 혼자 살려고 하냐”고 말하더라는 것. 신씨는 이러한 시인의 언동이 다소 우습긴하지만 보수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 일기

 

이번에 발견된 일기는 1983년 2~3월 씌어진 것이다. 이전에 발견된 일기는 1989년 8월에 쓴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일기 서두에 “오늘 비로소 아내한테서 일기책을 구했다”고 돼 있다. 천 시인은 이때부터 처음으로 일기를 쓰는 것처럼 쓰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발견된 일기는 그보다 6년 전에 쓴 것들이다.

 

이번에 발견된 일기를 쓸 때는 부인 목 여사가 인사동에서 친지의 권유로 천 시인의 대표시 이름을 딴 카페 ‘귀천’을 운영하기 시작해 생활이 비교적 안정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 일기에는 천 시인의 크리스천으로서의 면모가 드러나 있다.

 

2월 21일 천상병 시인은 아치방(당시 카페 이름)에 가서 이호종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크리스처니즘도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말이 “너무나 놀라운 해석이지만 원시인에게도 하나님은 성령을 베푸셨지 않을까. 일단은 수긍이 갈 만한 말로 들었다”고 한다. 목 여사에 따르면 이호종이라는 사람은 나중에 불승(佛僧)이 됐다.

 

▲ 일기

 

2월 27일 일요일에 천 시인은 교회에서 김형태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동했다. 천 시인이 찾은 교회는 연동교회다. 천 시인은 원래는 가톨릭이다. 그런데 1981년 기독교 방송을 통해 김형태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동해 연동교회를 나가게 됐다는 것. 처음 나가는 날 천 시인은 김 목사를 찾아가 큰 소리로 “목사님, 저는 가톨릭입니다. 저는 배신자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목사님 설교가 좋아서 들으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일찍이 이러한 입장을 ‘연동교회’라는 시로 썼다.

 

나는 지금까지 약 30년 동안은

명동 천주성당에 다녔는데

그러니까 어엿한 천주신도인데도

81년부터는

기독교 연동교회로 나갑니다.

주임목사 김형태 목사님도

대단히 훌륭하신 목사님으로

그리고 기독교 방송에서

그동안 두번 설교를 하셔서

나는 드디어 그분의 연동교회엘

나갈 것을 결심하고 나갑니다.

교회당 구조도 아주 교회당답고

조용하고 아늑하여 기뻐집니다.

아내는 미리 연동교회였으나

그동안 가톨릭에 구애되어 나 혼자

명동 천주 성당에 나갔으나

그런데 81년부터는 다릅니다.

한번밖에 안 나갔어도 그렇게 좋으니

이제는 연동교회에만 나가겠습니다.

물론 개종은 않고 말입니다.

배신자라는 말 듣기는 아주 싫습니다.

 

천 시인이 김 목사의 설교를 좋아하게 된 데 대해 목 여사는 “김 목사님의 설교가 당시 다른 목사님들과는 달리 매우 조리있고 차분했었기 때문에 천 시인이 좋아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최근 “내 신학이 가톨릭과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며 신부들과의 교제도 스스럼없이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에는 군사독재 시대라서 민주화와 인간화에 대한 설교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천 시인은 “부활 예수님은 반드시 한국에서 나실 것”이라는 김 목사의 설교에 충격을 받는다. 천 시인은 일기에서 “3월 1일 아침에 3·1절 만세를 세 번 불렀다”고 썼다. 그리고 감동적인 마음으로 한국일보의 3·1절 특집기사를 죄다 읽었다.

 

천 시인 부부는 연동교회에서 늘 예배당 내부가 가장 잘 내려다 보이는 교회 3층 제일 앞줄 한가운데 좌석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예배를 보는 동안에는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예배를 본다. 그리고 기도를 할 때는 자주 “하나님 용서해주이소. 용서하이소”라고 말했다고 목 여사는 전했다. 천 시인은 예배 마지막 순서인 축도가 시작되면 재빨리 1층으로 내려간다. 김 목사와 먼저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김 목사는 당시의 천 시인에 대해 “교회에 잘 나왔으며 만나면 늘 인사하는 정상인이며 밖에서 말하는 것 같은 이상한 사람이 전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천 시인이 “존귀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천 시인은 3월 7일 ‘막걸리’라는 시를 썼다. 천상병의 시 중에는 ‘막걸리’라는 제목의 시가 모두 3편이 있다. 이 중 두 편은 1984년에 발표된 것이다. 목 여사는 당시 문학지에 발표되지 않은 다음의 시가 1983년에 지은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술을 좋아하되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

막걸리는

아침에 한 병(한 되) 사면

한홉짜리 적은 잔으로

생각날 때만 마시니

거의 하루 종일이 간다.

맥주는

어쩌다 원고료를 받으면

오백 원짜리 한 잔만 하는데

마누라는

몇달에 한번 마시는 이것도 마다한다.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음식으로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때는

다만 이것뿐인데

어찌 내 한가지 뿐인 이 즐거움을

마다하려고 하는가 말이다.

우주도 그런 것이 아니고

세계도 그런 것이 아니고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니다.

목적은 다만 즐거움인 것이다.

즐거움은 인생의 최대 목표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나 마찬가지다.

밥일 뿐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느님의 은총인 것이다.

 

 

우태영 조선일보 출판국 기획위원.(tywoo@chosun.com">tywo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