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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저 씻나락 담그는 풍경

2005.05.14 10:22

윤석훈 조회 수:183 추천:9

하느님의 죄마저도 다 드러내줄 듯한
청명도 쾌청명 아래
뭇 생명의 기미들 한결같이 제 생명의 욕구에
스스로 놀라 부르르 떠는 모습 생생한 날
내 또한 무슨 그리움 하나 찾아볼까 들썩이며
동네 한 바퀴 돌러 나선다

봄은 와도 더는 심을 것 없는 마을에 봄은 짙어
앞집 뒷집 사방에 새하얀 한 살구꽃 보니
문득 세상의 때 벗은 죽음 같은 것이라도
와락 눈앞에 달겨들 것 같고
사시장철 대숲에서 고요지경을 시샘해쌓던
바람의 흐름 속으로 살구꽃이 또 난분분 진다

그러면 어디에 있는가 내 찾는 그리움은
이제 강아지조차도 얼씬 않는 고샅길 도니
마을 앞 삼밭의 샛노란 장다리꽃 무리가
광기로도 모자란 독기로도 모자란
원색의 화냥기로 자꾸만 꽃사래 쳐대고
그 위로 흰나비 쌍쌍 비몽사몽 속인 듯 날으고
또 바람에 물결치는 앞들 초록의 보리 앞에서
일순 내 넋은 고압의 전류 흘러 깜감하다

하지만 그 초록의 물결 앞에서
우리는 왜 진즉 승천해버리지 못했을까
나도 예전엔 거기에서 보리피리를 불었었다
나도 예전엔 거기에서 애써 앙탈하던
사랑 하나를 눕혔었지만
이제 한사코 바람은 불고
이제 아니라고 아니라고 보리는 도리질 치고
그 위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재잘대는
종달새 노래에 나는 그만 문둥이처럼 서럽다

그러면 어디에 있는가,길 위에서 길을 찾듯
그리움으로 그리움을 찾는 내 그리움은
썰렁한 회관 옆,지난 겨울 끝내 밤 봇짐 싼
명수형 집의 박살난 대문이거나
거기 그가 남기고 간 한숨 탄식 눈물 들 하나같이
푸른 노여움의 싹이 되어 돋는 마당이거나
지난 가을 심어놓고 미처 캐가지 못한
텃밭의 한 자쯤이나 자라 있는 마늘 싹
이제는 그 임자 없는 희망 속에나 있을까

익숙하던 길 위에서 문득 서먹거리는
이 쓰거운 마음의 행로
새벽이면 새벽같이 댓잎 뜬 각시샘에서 물을 긷고
푸르른 연기를 곧게 피워 올려 하늘과 내응하거나
새하얀 연기를 옆으로 흐트려 세상을 위무하던
생속 연기의 나라의,어머니 아버지들의
곧고 부드러운 정신을 이제 더는 볼 수 없다
온통 나간 집 같다
다만 거기 파랗게 옷 입은 길섶에
좁쌀 뿌려놓은 듯한 냉이꽃 마구 피어나고
그 귀여운 제비꽃은 오늘도 꾸벅꾸벅 인사하고
논둑에 빽빽이 돋은 서러움의 쑥잎은
거기 꽃다지 개불알꽃 코딱지꽃들 함께
이제 짙어버린 봄의 정액을 자꾸만 탐하는데

저 뒷들 몇몇 검은 그루에 초벌갈이꾼도 있긴 하다
이 논 저 논의 비닐하우스에선 김도 푹푹 새어나온다
하지만 저 뒷산 바우배기에서
이제 마악 들려오기 시작하는 소쩍새의 피울음
그 피울음 먹고 이제 마악 미친 듯 피어나는
저 묵정논의 핏빛 자운영 꽃불은 누가 끄는가
어느 순간 걷는데 푸드득 날아오르는 들비둘기 떼 쫓아
내로 산으로 달리던 함성이 환청으로 살아온다

그리하여 고독의 키가 무척은 자라면
저 강변 미루나무처럼 연둣빛 이파리라도
온몸에 달고 반짝거릴 수는 있을까
거기 맑은 냇물에 은피라미 떼가,꿩 꿔엉
느닷없이 울리는 장끼 소리에 놀라 뛰어드는
개구리 몇 마리에 혼비백산하는 모습
물가의 빛나는 조약돌 함께 들려다보다간
냇물이 흘러가는 저 먼 곳을 또 한참은 바라보거니

이윽고 풀이란 풀은 다 성난 들을 질러
사방산천 연두초록 물감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광경 한눈에 보이는 뒷동산에 오르니,거기 지금은
조팝나무 새하얀 꽃자루가 자꾸만 끄덕이는 때
찔레꽃 말고 찔레꽃 속니파리가 마악 피어날 때
거기 지금은 비비비 우는 비비새거나
쭉쭉쭉 우는 머슴새거나,한창
잡덤풀 사이로 쫓고 쫓기는 사랑놀음으로 바쁜 때
그럴지라도 내 신명나는 그리움은
저기 발치 아래 가슴 저미도록 휑한 마을의
동구 밖 정자나무에 있지 않다
그 위의 까치집 몇 채에 있지 않다
하마 남은 집들은 진달래 꽃잎을 따서 술을 담고
하마 집집의 장독마다 햇간장 맑게 우러날지라도
한번 흘러버린 화농르 덧들일 뿐인 이 그리움

그러나 그러나 내가 아직 말하지 않는 것은
아까 웃뜸 샛길 접어오다
어느 집 담 너머로 그만
황망간에 바라보고 놀라 급히 고개 돌렸던
그 씻나락 담그는 풍경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나도 아는 일이다
바람도 알고 꽃도 알고 햇빛도 아는 일이다

지난 겨울 집채만한 외국산 태풍이
이윽고 이 들녘을 마지막으로 덥쳐
아버지도 어머니도 앞집도 뒷들도 농기계도
온통 갈기갈기 찢어놓았을 때
우리는 그저 폐허의 상처나 뒤적이던 나날 속에서
결국 씨나락만큼은 간수해왔더라니
그리하여 씻나락만큼은 그예 감그더라니

이제 그 아침 다시 오지 않으리라던 마을에
이제 다시 땅이 발정의 신열에 들떠
아지랑이를 피워올리고
급기야 저기 저렇게 논 봇도랑에서
수많은 개구리들 암놈 수놈 업히어 걀걀걀걀
불 앓는 소리 만발케 하는 그 힘 그 유정 속에서
가래톳 서는 내 그리움 하나쯤은 끝네 찾나니

봄 햇살 융융한 봄날 보리밭 너머 저 지평선이여
뭇 생명의 싹들 무장무장 자라는
그 경이의 찰나까지 드러내줄 듯한 청명이여
온몸 다 문드러지는 절망,그 뿌리에서 돋는
새싹의 욕구 하나로 또또 진저리치는 만물 위에
내 그리움의 금가루 은가루 마구 뿌려보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