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덕혜옹주'를 보고서

2016.09.16 07:38

고안상 조회 수:75

영화 ‘덕혜옹주’를 보고서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금요반 고안상



유난히도 무덥고 짜증나는 여름이다. 온 세상이 열탕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더위도 피하고 교양도 넓힐 겸 아내와 영화 덕혜옹주를 감상하고자 극장을 찾았다. 이 영화는 구한말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의 삶을 그렸다. 배우 손예진이 덕혜옹주 역을 맡았고, 어릴 적 친구 김장한 역으로 박해일이 열연하며, 덕혜옹주의 시종 복순은 라미란이, 영친왕은 박수영, 김장한의 후배 복동은 정상훈, 일본인 앞잡이 한택수는 윤제문 등이 조연으로 가세해 이야기가 전개 된다.

덕혜옹주는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잃은 그 이듬해에 고종황제와 귀인 양씨사이에 태어난 마지막 조선의 황녀다. 국권을 일본에게 넘긴 고종황제는 그나마 덕혜옹주를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헤이그에 특사를 보내고 왕으로서 국권을 되찾고자 은밀히 노력하지만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들의 감시아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고종은 영친왕 이은처럼 덕혜옹주가 볼모로 일본에 보내지거나 일본인과 정략결혼을 강요당할 것을 염려해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비밀리 약혼을 계획하지만 일본의 방해로 실패한다. 침략자 일본과 그들의 하수인인 친일파의 입장에서는 국권을 되찾고자 애쓰는 고종은 눈엣가시다. 그래서 고종을 은밀히 독살한 것 같다.

갑작스런 고종황제의 승하로 덕혜옹주는 어머니 양귀인의 보호아래 생활하면서 교육을 받는다. 친일파 황실담당자로부터 일거수일투족 감시와 간섭을 받으면서도 옹주로서의 품위와 권위를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애처롭게 했다. 옹주가 14살 되던 해 이왕직차관은 순종에게 덕혜옹주가 신식교육을 받을 수 있게 일본유학을 가도록 결정되었음을 통고한다. 이에 옹주는 반대하지만 어머니 양 귀인에게 피해가 간다는 협박에 그만 두 손을 들고 일본유학을 강요하는 그들의 뜻에 응하고 만다.

일본에 유학한 옹주는 학교생활에 적응하고자 애쓰며 독살을 염려한 나머지 손수 보온병에 물을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물을 마시는 등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힘쓴다. 일본에서 아리따운 숙녀의 모습으로 성장한 옹주에게 어느 날 어릴 때의 친구 김장한이 일본군 장교가 되어 나타난다. 장교의 모습으로 나타난 김장한에게 덕혜옹주는 실망한 나머지 쌀쌀하게 대한다. 그러나 김장한은 일본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엘리트 장교이지만 은밀히 조국의 독립을 위한 지하조직에 참여하고 있는 독립운동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덕혜옹주는 기쁜 마음으로 그를 만나게 되고 조금이나마 조선의 독립을 위한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조선 백성들을 위하여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다.

일본은 덕혜옹주에게 파업을 벌이고 있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설득하면 귀국해 어머니를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에 마지못해 응하여 그들을 설득하고자 연단에 섰으나 강제노동으로 손가락이 잘리거나 상처투성이인 노동자들을 보고서 차마 일본인들이 요구한 연설을 할 수 없어 우리말로 “동포 여러분!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찾아옵니다.”라고 말하며 끝을 맺지 못한다. 옹주의 연설을 듣는 그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곳에 모인 노동자들이 박수를 치고 아리랑을 부르며 단합된 모습을 보이자 일본헌병들이 동포들을 강압적으로 해산시킨다. 그 뒤 옹주의 주변에는 감시가 더욱 강화된다. 상해 임시정부와 도쿄에 있는 지하조직은 영친왕 내외와 덕혜옹주를 은밀히 상해로 모셔가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영친왕 일행을 모셔가는 과정에서 일본군들에게 발각되어 그만 실패하고 만다.

그 뒤에 일제는 덕혜옹주를 대마도 번주 소 요시아키라의 양자로 백작의 지위를 계승하는 도쿄제국대학 영문과 3학년인 소 다케유키와 결혼시키기로 결정한다. 1931년 5월 6일 도쿄에서 결혼식을 올린 옹주는 결혼 초부터 완전한 실어증상을 보였으며 조현병이 상당이 진행되고 있었다. 해방이 되어 꿈에 그리던 조국에 돌아오고자 했으나 이승만 정부는 왕정복고를 염려한 나머지 왕족들의 입국을 거부한다. 그 뒤 덕혜옹주는 조현병이 악화되어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런 가운데 소 다케유키와는 이혼하고 딸 소 마사에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는 불행을 겪는다.

서울신문 도쿄특파원으로 활동한 김을한 기자가 덕혜옹주 귀국을 추진하던 중 1961년 11월 미국 방문길에 도쿄에 들른 박정희 의장이 영친왕비와 만나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귀국을 약속했다. 그 결과 37년간의 일본 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조국 대한민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한 뒤 옹주는 병마와 싸우며 여생을 조용히 살다가 1989년 4월 21일 78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영화 덕혜옹주는 영화로서의 재미를 더하기 위하여 실제 내용과는 거리가 있는 픽션이 일부 가미되었다. 덕혜옹주를 보고서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나라를 잃고 일제에 의해 모든 것들을 박탈당한 채 평생 간섭과 감시 속에서, 병마와 싸우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는 옹주의 불행한 모습을 보며 너무나 안타깝고 서글프다는 생각을 했다. 또 백성들의 삶은 얼마나 고단하고 힘들었을 것인가?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국가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깨우치게 했다. 현재 우리는 옹주와는 달리 자유로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평안하게 많은 혜택을 누리며 잘 살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우뚝 서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 모두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국가의 발전과 안위를 위하여 마음과 지혜를 모아 나라를 지키는데 온힘을 다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16. 0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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