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4일 2011년 LA중앙일보

때로는 고개를 숙이세요.

                                            조옥동/시인
뒤뜰이나 앞 정원에 나가면 연속 인사를 하고 싶다. 겨울동안 휴식을 취한 초목과 꽃나무들이 오랜만에 연한 새 잎이나 꽃을 피워내기 때문이다. 깨어나는 생기, 열리는 생명이 경이롭기에 고개가 숙여진다. 며칠 전엔 흰 밥알 튀김같이 수없이 꽃을 매단 앵두나무와 그 밑에서 초롱초롱 꽃눈을 열고 올려다보는 히야신스 파란 꽃에 인사를 했고 아침엔 잎도 피지 않고 어린가지 끝에 종알종알 꽃봉오리를 매단 수국에 탐스럽게 피어날 보라색 꽃을 연상하며 가볍게 꾸벅거렸다. 예쁜 꽃만큼 사람을 감동시키고 심상을 곱게 펴주는 효험을 가진 약이 어디 있을까.

연구실 창밖 연초록 봄 햇살의 유혹을 못 이겨 점심 후 모자를 쓰고 잠시 산책길에 나선다. 맨흙바닥이 벌겋게 갈라졌던 풀밭이 겨우내 비가 많이 내린 덕에 본연의 푸른 잔디밭으로 변하여 수많은 들꽃들이 봄을 수놓고 있다. 길쭉한 꽃대 끝에 달린 둥그런 민들레꽃이 마치 옆 골프장에서 날아온 골프공같이 수없이 널려있다. 알룩달룩한 밀짚모자를 쓴 나도 풀밭에 앉으면 한포기 들풀이 된다. 어김없이 찾아 온 봄 햇살의 축제 속에서 잠시나마 숱한 시름과 고통을 내려놓는다. 온 육신이 노곤해지며 감사의 늪에 침몰하다 보면 푸른 하늘조차 멀어진다.

사람뿐 아니고 동물들도 만나면 그들대로의 만남을 기뻐하는 인사법이 있다고 한다. 고양이와 강아지의 인사법이 서로 달라 오해를 하고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도 있으나 인사법을 제대로 알고 실행하면 별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도 마음과 마음을 포갤 수 있다. 각 나라마다 지역마다 인사법이 다르나 우리 인사법은 아무래도 허리를 가볍게 굽히고 머리를 상대편을 향하여 조용히 숙이는 것이 정중해 보인다.
이민을 온 30여 년 전엔 우린 이 곳 사람들을 상식이 없는 사람들로 치부하고 그들과 살아갈 일이 편치 않게 생각되었다. 인사법이 마음에 맞지 않음은 물론이고 아파트나 길에서 마주칠 때 대 여섯 살짜리 아이까지 어른의 이름을 부르며 ‘하이’ 하는 것이다. 이 땅에 살면서 이들의 문화를 알고서야 섭섭함이 좀 누그러졌다.

직장에서 어떤 이는 내가 코리언임을 알고 고개를 숙이며 ‘안녕 하세요’하고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반가워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친숙해진다. 30여년 전 이민초기엔 코리아가 지구 어디에 붙은 나라냐고 묻곤 했다. 그들이 이젠 김치를 좋아한다며 좀 아첨 섞인 말을 해 오면 코리안 임이 자랑스럽다. 그렇게 발전한 내 조국이 감사하여 그곳을 향하여 꾸벅 인사하고 싶다. 인사는 상대편에 대한 배려이고 존중의 표시이다.

좋은 책을 받으면 진정 감사하여 앞에 저자를 만난 듯 머리를 숙이고 싶다. 1969년 4월 창간 이래 한호의 결호도 없이 2010년 11월로 500호 기념탑을 쌓은 시인을 위한 시학만을 고집한 시전문지 ‘現代詩學’이 있다. 한 작가의 훌륭한 작품이나 예술품이 경외를 받는 일도 당연하나 한권의 시문예지를 만들기 위하여 시인들의 작품을 의뢰하고 모으고 편집하여 품위 있는 책을 매월 발행하는 일은 많은 경비가 필요한 재정적인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보통일은 아니다. 이제까지 맡아낸 그 정열에 고개를 숙이고 싶다.

사람은 원래 목이 곧은 동물이라 그런지 머리를 숙이는 일이 쉽지 않아 보인다. 작은 일이나 작은 사람에게도 감사하며 고개 숙이는 우리가 되면 삶이 훨씬 부드러워 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