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삼십 분만

2011.06.09 15:31

이영숙 조회 수:61


  이십대 초반이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 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가 잠시 머물러 있었던 때였다.  가까운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그간 나누지 못한 세월의 회포를 풀고 있었다.  한참 웃으며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던 친구가 불쑥 심각해지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얘, 우리 30분 동안만 남의 흉보는 시간 가지면 안 될까?”  정말 남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좋은 친구였다.  특히 다른 사람의 단점을 쉽게 말하지 않는 친구임을 내가 알고 있었다.  얼마나 속상했으면 그랬을까싶었다.  웃으며 편안히 이야기 하라고 했다.  이야기는 함께 친하게 지내는 친구 A의 이야기였다.  A는 정말 악의도 없고 마음씨는 착한 아이인데 좀 주책이어서 가끔 다른 이들로부터 말을 들을 때가 있는 친구였다.  내가 없는 동안 둘이서 뭔가 잘 맞지 않아 마음이 상했나보았다.  친구는 편안히 흉(?)을 보았다.  나도 그 친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터라 한 마디만 해도 상황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남았다.  A의 주책으로 인해 속상하고, 황당하고, 어이없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래, 맞아”,  “걔가 그러고도 남았겠지”, “왜 아니겠니?” “야, 너 정말 잘 참았다.”함께 맞장구치며 친구의 속마음을 풀어주었다.  이야기를 끝낸 친구는 쌓였던 것들이 다 내려갔다며 좋아했다.
  삼십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끔 그 친구 생각이 날 때가 있다.  뭔가 답답할 때, 특히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꼭꼭 마음에 담아놓았던 그 이야기를 속 시원히 털어놓을 대상을 찾아다니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억울할 때, 속상하고 분할 때, 이유 없이 불이익을 당해 화가 났을 때.  누군가에게 속을 열고 내가 이렇게 당하고 있다고 하소연하고 싶다.  
  내가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닌 것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남을 억울하게 만들거나 거짓으로 남을 모함하는 일은 없다.  나의 책임회피를 위해 남을 파는 일을 결코 하지 못하는 위인인 것도 사실이다.  좀 손해가 와도 시인할 것은 당당히 시인하고 살려 한다.  내 것이 아닌 것을 탐내지도 않는다.  기어이 내 것을 빼앗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웬만하면 빼앗기고 살 때도 있다.  내 앞에서는 이렇게 말 하고 남에게 가서는 다른 말 하는 사람에게도 울음을 삼키며 참기도 한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세상이 다 나 같지는 않더라, 슬프지만.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남을 모함 하는 사람이 개중에는 있다.  자기가 잘못한 일을 덮기 위해서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남에게 떠넘기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는 나도 주위를 두리번거려본다.  혹시 누군가가 있을까 해서.  
  내가 억울하다고, 너무 많이 속상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었으면 좋겠다.  ‘세상에나....’  ‘그래요?’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아휴... 화나셨겠네요.’  ‘그 사람 정말 나쁘다....’ 등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러고 나면 내 마음이 다 풀릴 것 같아서.  사람의 마음이란 아무리 화나서 씩씩대다가도 나의 입장을 이해하는 사람이 한두 사람만 있어도 그것이 위로가 되니까.  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게 아니다.  그저 이야기 들어주고 내가 옳았다고 적당히 맞장구만 쳐주면 더 이상 바랄게 없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뿐이다.  그러나 빡빡한 이민살이에 가깝게 지내는 편안한 사람 만나는 게 어디 쉬워야지.  서로가 고만고만한 거리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우리네 삶이 아니던가.  
  원래도 그랬지만, 미국오고 난 다음 더욱 나의 억울함을 남에게 잘 털어놓지 않는다.  나만의 이유가 있다.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내 말을 사실대로 믿을까 의심스러워서다.  정말 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내 말을 듣는 상대는 나를 알고, 나를 억울하게 만든 사람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나의 일방적인 이야기만 듣고 내 마음을 다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은 주관적이다.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나의 말이 다를 수 있고, 상대방의 말이 다를 수 있다.  내 원통함을 풀어놓을 사람은 벌어진 상황을 알기 전에 나와 상대의 성격과 인간됨됨이를 먼저 알아야 대화가 된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남에게 쉽게 가슴을 열지 않는다.  상대와 나를 완전하게 알지 않는 사람은 믿을 수가 없다.  내가 정말 어렵게 입을 열었는데 듣는 사람이 혹여‘그건 당신 입장이고...’라고 생각할까봐서다.  그렇다면 말한 내가 더 억울하고 말테니까.  나와 상대의 마음과 성격을 잘 아는 사람을 만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딱, 삼십분만 남의 흉보는 시간 가지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