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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2016.12.06 10:15

한 알의 밀알이 떨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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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시대> 기획연재 / 미국에서 쓰는 한국문학 (3)             


                 

                       한 알의 밀알이 떨어지다

                                             

                                                                홍인숙(Grace)

 


   완연한 봄날. 햇살이 뜨겁다. 캘리포니아는 2월이면 벌써 꽃들이 앞을 다투어 피기 시작한다. 그동안 여러 가지 핑계로 잘 돌봐주지 못했는데도 정원의 꽃들은 계절에 순응하며 올해의 첫 꽃을 눈부시게 피워올렸다. 주홍빛 소담스런 군자란, 울긋불긋 시클라멘, 셀 수 없이 아름답게 솟아오른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순백의 칼라 릴리...

   정원은 어느 해와 마찬가지로 봄햇살에 찬란히 깨어나고 있는데 아직도 긴 침묵으로 동면하는 한구석의 텃밭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해마다 봄이면 각종 채소의 어린 모종을 다정히 품어 키우며 고국의 정과 함께 푸짐한 먹거리를 제공해 주던 텃밭이 잡초만 가득 안은 채 쓸쓸히 누워있다.

   채소밭을 만들까. 마켓에서 사다 먹을까. 집에서 채소 농사를 짓는다는 게 워낙 번거로운 일이라 매년 봄마다 똑같은 대화가 반복된다. 언제까지 살 집인지 모르니 정원을 더 예쁘게 꾸미자는 나의 의견과 달리, 남편은 기르는 재미도 있고 무공해 채소를 먹으니 작게라도 텃밭을 만들자고 한다. 새로운 사람이 와도 세계적으로 올게닉 붐이라 토질 좋은 텃밭이 있으면 더 좋아할 거라면서.

   미국생활은 시간적인 면으로는 바쁘지만 생활적이 면으로는 단조롭다. 한국처럼 퇴근 후 회식하는 문화가 아니고, 참여하는 문화센터나 동창 모임이 거의 없기에 대체로 생활이 가족 중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이 들어 은퇴라도 하면 더욱이나 단조로워진 삶으로 취미생활 겸, 건강 먹거리를 찾아 텃밭을 가꾸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 

   캘리포니아에는 수년 째 가뭄이어서 물 사용에 따라 벌금까지 내고 있다. 잔디에 물주는 것도 제한해서 집집마다 잔디들이 누렇게 말라가는 형편이다. 물값도 물값이지만 심고 기르는 정성까지 치면 차라리 마켓에서 사먹는 편이 훨씬 저렴하다. 그래도 사철 기후가 좋아 많은 한국 사람들이 집에 조그만 마당이라도 있으면 한국 마켓에서 씨앗을 사다 정성껏 모종을 내고 열심히 키운다. 고추, 상추, 오이, 호박, 깻잎 등은 기본적이고 배추, 무까지 심고, 밭농사가 잘되면 서로 나누어 먹기도 한다. 미국에 오래 살아도 어릴 때 한국에서 먹던 입맛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미국 마켓에 훨씬 더 채소가 풍성하고 값도 싸지만 우리의 입맛과 다르다. 음식을 해도 한국식 맛이 나질 않아 멀더라도 꼭 한국 마켓에 가서 한국 채소를 사야하는 번거로움이 있기에 집 농사를 선호하는 것 같다.

   한국은 서구식 식생활로 쌀 소비량이 줄었다는데 이곳 한인들은 한국보다 더 한국식 식생활을 하고 있다. 실제로 주위의 많은 분들이 된장, 간장, 고추장을 직접 담그고, 식혜나 약식, 한과도 만들어 먹으며, 막걸리도 집에서 만들어 먹는 사람이 있다. 이민생활의 외로움도 있겠지만, 떠나오기 전 내 나라에 대한 향수와, 어릴 때 어머니 손맛의 그리움이 큰 자리로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우리도 어느 정도 고생을 각오하고 해마다 정성을 기울여보지만 농사를 몰라서인지 좋은 성과가 나질 않는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분, 봄이면 더욱 생각나는, 마음속에 그리운 그분을 부르고 싶다. ‘봄아저씨’. 이른 아침. 멀리서 사그랑 사그랑 흙을 일구는 소리가 새벽하늘에 부딪쳐 신선하게 들려온다. 잠이 덜 깬 몸을 일으켜 살짝 커튼을 열어보면 영낙없이 아저씨가 오셨다. 언제 오셨는지 행여 나 우리의 단잠을 깨울세라 조심조심 텃밭 일을 하신다.

   새봄이 오면 제일 먼저 봄을 안고 오시던 분. 매해 봄마다 각종 한국 채소 씨앗을 모종내어 우리 집 마당에 옮겨 심어 주시던 아저씨. 이불처럼 누워있는 잡초를 거두어 내고, 겨우내 홀로 있던 땅을 일구어 비료를 섞은 후, 빼꼼히 솟아난 오이, 호박, 고추, 깻잎, 상추 등..어린 싹 모종을 옮겨 심으시고 달팽이 약까지 솔솔 뿌려 주시곤 했다. 그리고는 출가시킨 딸을 보듯, 싹이 제대로 잘 자라나, 벌레가 연한 새싹을 먹어 버리지는 않나 매일 둘러보시며 정성껏 가꾸어 주셨다.
서너 주가 지나 제법 모종이 자라면 어디서 구해 오셨는지 여러 개의 가늘고 긴 나뭇가지를 휘어 일렬로 아치형을 만든 후, 커다란 비닐을 둥글게 씌워 훌륭한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놓으셨다. 아저씨의 정성아래 가녀린 모종들은 안심하고 가지를 쭉쭉 뻗고 말끔한 얼굴로 꽃을 피워 풍성한 열매를 맺어냈다. 야자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서있고 화려한 서양 꽃들이 만발한 정원 한 쪽에서 한국 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정겨운 풍경이 풋풋한 향수를 자아내곤 했다.

   남편과 나는 서울 토박이어서 정원에 있는 과일나무도 제대로 가꾸지 못하는 처지에 텃밭을 일구어 채소를 키운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런데 같은 교인이신 아저씨께서 매년 봄마다 찾아와 수고를 해주셨다. 우리 집만이 아니었다. 아무도 부탁한 것도 아닌데, 손수 한국 씨앗을 모종내어 여러 집을 다니며 채소를 심어 주시고 가꾸어 주셨다. 행여 부담이라도 될까 차 한 잔도 마다 하시고, 살짝살짝 다녀가시며 사이사이 뒷손질을 해주시던 분. 수줍고 겸손하셨던 그 분은 고국의 정서와 한국인의 훈훈한 인심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시면서 그저 우리가 잘 자란 채소를 즐겨 먹어주는 것만으로 보람을 느끼시는 것 같았다.

   그 분 덕에 매년 여름이면 무공해 야채로 고국에서나 맛보던 풍성한 식탁을 차려 더위에 지친 가족들의 입맛을 상큼하게 돋굴 수 있었다.잘 자란 한국 오이로 냉국이나 소박이를 만들고, 호박과 깻잎을 넣고 부침개도 자주 만들었다. 수시로 상추를 솎아 쌈장을 곁들여 풋고추와 상추쌈도 즐겨 먹었다. 또 상추와 오이와 깻잎을 송송 썰어 무치면 향긋한 상추 겉절이가 되었고, 국수에 얹어 맛있는 비빔국수를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풍성한 채소 덕에 오이지도 담그고, 먹고 남은 가지나 호박은 햇살에 말려 겨우내 볶아 먹기도 했다.

   집 정원에 채소밭이 있으니 가족들의 반찬은 물론, 갑자기 찾아온 손님들의 식사도 힘들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고, 친지들과 나누며 이웃과의 정을 돈독케 하기도 했다. 자칫 잊기 쉬운 계절의 흐름도 민감하게 느낄 수 있었고, 보이지 않는 땅속의 신비함과, 무심히 여기던 어린 싹들의 경이로운 생명력, 그에 따른 감사와 소중함 등, 우주만물의 오묘함을 직접 체험하고 느낄 수 있었다. 그뿐인가. 무성하게 자란 채소밭을 볼 때마다 마치 한국의 평화로운 시골에서 전원생활을 하는 듯한 행복을 느낄 수 있어 더욱 좋았다.

   이제는 봄이 되어도 그 분을 만날 수가 없다. 육십세를 갓 넘기신 아저씨는 몇 해 전, 동네 마켓에 가신다며 잠시 혼자 외출하셨다가 차안에서 핸들을 잡으신 채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유난히 근면하시고 건강하셔서 누구보다 장수하실 것으로 생각했던 분의 갑작스런 죽음은, 가족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이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 분의 장례식에서도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살아 계실 당시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기억해 내고 고마워하며 금방 어디선가 평소처럼 빙긋이 웃으시며 나타날 것 같다고 웅성거렸다.

   바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수년 동안 여러 집을 농사지어 주시던 분. 한 번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이웃사랑을 실천하시는 그분의 선행에 고마움을 담아 지역 신문에 글을 기고한 적이 있었다. 그 글이 실린 신문을 전해드리자 몹시도 수줍어하시며 미소 지으시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텃밭에 쪼그리고 앉아 땅의 숨소리를 듣는다. 어느새 훈풍에 실려 잔잔히 번져오는 그 음성, 그 호미질 소리와 함께 정원 가득 어른거리는 아저씨. 그리운 그림자.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구절이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아침, 몇 가지 채소 모종을 아저씨의 호흡이 남아있는 흙속으로 조심스레 옮겨 심는다. 비록 '봄아저씨'는 다시 만날 수 없지만, 그분이 일구어 주시던 흙은 그분의 영혼을 소중히 간직한 채 캘리포니아의 하늘 아래서 고국의 채소를 풍성히 키워 올리리라. 우리들의 가슴에도 살아서 자라고 있는 사랑의 밀알처럼.

                                           (새봄 아저씨 1.2편을 한편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수필시대> 통권 68호  5/6-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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