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화집> 중앙일보

2011.11.30 20:04

김인자 조회 수:53

친구의 화집
김인자

    지난 주 서울에서 온 소포를 받았다. 포장을 열어보니 [김행자의 제2 화집]이라 써있다. 그림이 Post modernism 화풍이다. 원근도 실상도 없이 선이 단순 강렬하면서도 복잡한 색감에 깊이가 있다. 시적인 그림에는 그녀의 강렬한 꿈이 녹아있다.  

    책장 안의 글을 보니 생각했던 대로 대학동창이다. 우리는 약학대학에서 같은 크라스였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과학관 지하실에서 무기화학 실험을 했다. 실험도구를 설치하고 시험관에 물질과 시약을 넣고 온도를 맞춰 반응을 유도한 후 콘덴서를 거쳐 흘러나오는 새 약물이 결정체로 응고하는데 몇 시간씩 기다릴 때가 많았다.

실험결과는 빈칸으로 비어놓은 리포트를 후닥닥 써놓아도 1-2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살그머니 교수의 눈을 피해 도서관으로 향했다.

    2층의 작은 방엔 높은 책장에 그림, 음악, 건축 등 예술가들의 작품집이 꽂혀있었다. 그 책들의 대부분이 대학의 설립을 도왔던 선교사들이 기증한 도서들이다. 도서관에서 사서를 통하지 않고 직접 책을 빼볼 수 있는 곳은 이 방뿐이다. 나는 후기 인상파인 벤 고흐의 작품집을 들고 구석진 곳으로 갔다. 당시 썸머쎗 모옴의 소설 [달과 6펜스]를 읽고 고오갱이나 고흐의 예술성에 강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으며 그들의 슬픈 인생에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도서관 구석에서 뜻밖에도 행자를 만난 것이다. 그녀는 야수파 주동자였던 앙리 마티스의 작품을 사랑했다. 그 후 우리는 서로 예술에 남달리 의미를 두는 동지가 되었다. 시계바늘을 훔쳐보며 남몰래 과학관으로 돌아갈 때는 서로 동병상련의 친구가 되어있었다.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에는 또한 도서관으로 몰래 사라지는 공모자였다.

    빈센트 반 고흐...일생동안 지독한 가난과 고독, 가족에 대한 죄책감으로 시달렸던 영혼의 화가, 그에게 삶은 절대로 공정하지 않았다. 웅얼진 마음 속 밑바닥까지의 표현이 가능했던 것은 오브제를 그대로 정확하게 복제하는 사실주의가 아닌, 그의 심혈을 대상 속에 쏟아 부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 순간의 삶을 강렬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별을 그릴 땐 검고 푸른 우주가 소용돌이치며 마음 속 응혈 덩어리를 쏟아내는 희뿌연 콧김에 쌓인 신비 속을 회전하는 별의 굉음까지 들리도록, 태양을 그릴 땐 엄청난 빛과 열 파로 전 우주를 태워버릴 것 같은 파워로 이글거리며 내뿜는 태양의 속도까지를, 해바라기는 지글대는 태양열에 잎과 몸과 마음이 말라버린 지독한 외로움에 씨가 여물어 터져 나오려는 몸부림을 느끼도록 그렸다.

   아- 그가 그린 인물화들은 어떤가... 그들이 그 때까지 살아온 전 생애를, 사랑과 슬픔과 괴로움과 기쁨의 모든 생의 단면이 얼굴에 각인된 주름사이로 베어 나오고 햇빛의 반사로 여지없이 굴곡이 드러나는 엇가고만 인생...

    오랜 세월동안 그의 그림은 나의 예술에 대한 인식을 지배해왔다. 그는 진정한 예술의 탄생은 한 인간의 희생 위에 세워짐을 말해주었다. 그의 전 생애가 그림 그리는 일로 채워져서 생의 마지막에는 진정으로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했던 그... "신이여 얼마나 더 기다려야하나요!" 그러나 살아생전 그는 [붉은 포도밭]이란 작품 하나밖에 팔지 못하고 간질 성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오베르에서 권총자살로 생을 마쳤다.

    "화가들은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다"는 그는 그래서 정신병동에서 치료를 받기 시작한 후로도 [병원 안마당] [붓꽃] [라일락] 또 [실 편백나무가 있는 별이 반짝이는 밤] 등을 그렸다.

    70년대 나는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살았었다. 휴가철이면 자동차여행을 했는데 한번은 고흐가 살았던 아르를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곳의 어디를 가든 [밀밭 풍경] [씨 뿌리는 사람] [수확]에서 보는 작렬하는 태양아래 완만한 구릉이 펼쳐져 있고 밀밭과 농가와 곡식창고와 마차 길이 한없이 뻗어있어 그의 생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남편을 따라다니느라 행자와는 40년 가까이 서로 연락이 없었다. 이제 그녀는 약사가 아닌 화가로 변신했다.

    "여름방학 때 남해에서 보았던 해돋이 생각나니? 도서관 뒤의 좁은 숲길을 걸으면서 왜 우리들 설익은 인생관을 제법 심각하게 주고받았지? 아름다운시절이었어! 이젠 할머니 됐니?" "그래..." 전화선을 통해 40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다 생각나는구나 우리, 세월이 하나도 흐르지 않았구먼!..." 그녀의 마지막 말의 톤은 진정 할머니 같은 느릿한 저음으로 후물거렸다. 아득히 지나가 버린 시절은 다시는 붙잡을 수 없기에...

11-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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