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삼의 시 민간인 감상
2017.02.05 12:23
김종삼의 『민간인』
정국희
1947년 봄
심야(深夜)
황해도 해주(海州)의 바다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의 경계선(境界線) 용당포(浦)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 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문학은 사실 너머에 사실성을 추구한다고 한다. 이 시는 철저하게 사실적인 목소리를 통해 끔찍한 역사적 비극을 극도로 절제된 언어만으로 그려냈다. 정확히 말하면 단어 하나하나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배어있고 행마다에 용당포의 수심이 들어있다. 시 한 편에 책 한 권이 들어있다지만, 이 시는 대하소설보다 더 긴 역사의 충격이 고요히 봉인되어 있다. 이를 테면, 분단으로 인해 죽음을 생산했던 공포의 세계를 죄의식으로 견지한 회복성의 표출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은 어떤 슬픔일까? 그것은 자식을 잃은 슬픔일 것이다. 이 시는 자식을 물에 넣어야 했던 부모만의 아픔이 아니다. 한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의 아픔인 동시에 세상의 모든 부모의 아픔이고 또 이 나라의 아픔이다.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 것은 상상력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상상력이 아닌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는 한의 도가니를 슬픔 없이 담담하게 그려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읽을 때마다 가슴이 더 아픈 시다. 이런 느낌의 정체는 아마 자녀를 둔 엄마의 마음이 동요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민간인은 가장 간결하면서 가장 긴 여백을 남기는 시다. 한 광경을 이해하는 것은 그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 사회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 광경의 산출을 통해 우리 모두는 진실된 상처를 바로 보아야 할 것이며 우리가 겪은 분단의 아픔을, 그리고 아직도 못가는 가족의 아픔을 좀 더 느껴야 할 것이다.
문학론에서 진실이라는 것은 사실성을 초월한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러한 진실은 역사학이 추구하는 사실의 세계와 대립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더 강하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9장>)
사실에 대한 언어의 지시성이나 환기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소통의 도구로서의 언어의 기능과 위상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구체적 사실에서 개념을 향할 때 언어는 대상이 불분명한 개념조차 소환 활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기호지만 언어의 지시능력이 약해질 때 그 언어는 소통의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 시대와 한 사회를 대표할 수 있는 대상을 고르고 그에게 집합 전체의 대표성을 가지게 하는 것은 놀랄 만한 시공간을 넘어서는 일이다. 이러한 전형이 거의 전 시대를 통하여 보편의 세계에 가 닿을 때 어쩌면 신화의 내러티브가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어는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 위에서만 겨우 언어이다. 『민간인』은 지난 시간의 현실의 정념을 극대화함으로써 지극한 시간 속으로 이입되어 들어간 사례를 보여 주었다. 역사의 한 순간을 영원 속에 고정시킨 사례를 통해 사실과 상상의 경계를 사유해 보는 『민간인』은 분단의 아픔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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