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커 한 조각의 여운

2011.12.31 02:35

김인자 조회 수:64 추천:1

스티커 한 조각의 여운
                                                          김인자(시인)

    70년대 초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살다가 아이들의 장래에 대한 열풍이 우리부부에게 휘몰아쳤다. 그것은 열병을 앓듯이 마음과 몸을 지배하고 장래가 훤히 내다보이는 대로를 마다하고 외로운 망망대해로, 얼음 덩어리 웅프라우로, 사하라 사막으로 우리의 진로를 바꾸게 했다. 드디어 1975년 봄 미국으로 우리의 미래를 옮겨왔다.

   그 후 지금까지 엘에이 북쪽의 작은 도시인 버뱅크에서 카드와 책과 선물을 파는 상점을 하고 있다. 벌써 30여 년이 지났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엄마와 함께 왔던 어린 소녀가 이제는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 상점에 오곤 한다. 그 때 그녀가 사갔던 핼로키티를 지금은 그녀의 아이들이 사간다. 어떤 때는 건장한 청년이 와서 반갑게 인사하며 '아줌마는 28년 전의 그 아줌마 맞죠?' 하고 묻기도 한다. 자세히 쳐다보면 말썽꾸러기 소년의 모습이 생각난다. 어느새 핸섬한 청년이 되었다. 동양여인이 백인동네에 와서 장사하니 인상에 남았나 보다. 아니면 타 주에 있는 대학에 갔다가 취직하고 결혼해서 살면서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방문하러 왔는지도 모른다.

  커다란 창문 밖으로 파킹랏에는 차들이 복잡하게 움직이고 있다. 퇴근시간이라 마켙에서 식료품을 사는 사람과 커피샾이나 레스트랑에서 약속한 사람들, 또는 파티에 가기 전 선물을 사러 온 사람들로 밖은 분주하다. 멀리 산기슭으로 지는 해가 붉게 타고 있다. 뭉게구름도 붉게 물결 지며 저무는 해의 후광에 물들여지고 있다.

   파킹랏에는 오늘따라 유난히 안개가 끼고 회색하늘의 끝자락이 지상에까지 내려온 듯 어둡고 음산해 보인다. 이런 날씨에는 손님이 많지 않기 마련이다. 그때 허름한 옷에 화장기 없는 얼굴의 젊은 여인이 4살쯤 되는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와서 카드진열대로 가드니 카드를 골라왔다.

     여인이 돈을 지불하는 동안 어린애는 계산대 옆에 있는 수십 종류의 스티커 롤을 보드니 환호하며 만져보고 신기해서 어쩔 줄 몰라한다. 보기만 하고 만지지 말라고 젊은 엄마가 타이른다.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갖고싶어서 보채고있다. 여인은 오늘은 돈을 5불만 가져왔는데 카드를 샀으니 안 된다고 알아듣게 타이른다. 그래도 어린애는 계속 만지며 반짝이는 스티커 사랑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내가 한 조각을 띠어주려고 하니 그녀가 괜찮다고 사양한다. 아이는 위니 더 푸, 트위디, 바비등 TV 만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만져보며 갖고싶은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듯 거의 울음을 터트리려 한다. 드디어 "오케이 한 조각만 골라라" 아이는 너무 좋아서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잡히는 대로 생각 없이 트위디 다섯 조각을 조금 찢어 내렸다. 오케이 네가 찢었으니 이 다섯 조각을 다 사야겠다하며 마저 띠어서 계산대 위에 놓는다.

그러나 아이는 스티커들을 더 자세히 살펴보더니 트위디가 아닌 위니 더 푸를 갖겠다며 때를 쓴다. 안돼 네가 벌써 찢었으니 그것을 사야된다. 단호한 엄마 말에 아이는 드디어 울음이 터졌다. 내가 얼른 위니 더 푸 한쪽을 띠어주려 하니 젊은 엄마는 다시 사양한다. '운다고 다 가질 수는 없어요' 하며 여인은 셈을 치른 후 우는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상점 밖에서 인도에 주저앉아 아이는 이유를 설명하는 엄마 무릎에 얼굴을 박고 서럽게 울고 있다.

     저 어린아이는 오늘 엄마 품에서 울고있지만 이제 좀더 자라면 누구의 품에 기대어 가슴 속 불만을 풀어버릴 수 있을까. 세상은 변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듯 인간의 의식도 시대에 물들여지고 이물질이 첨가되어 원래의 본질을 찾기 힘든 휴죤시대가 되었다. 다양한 세계화 시대에 들어와서 절대적 판단의 잣대가 희미해진 가운데 가치척도는 혼돈 되어 가고있다. 이러한 때 저들을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대를 초월한 변함없는 부모의 사랑과 교육일 것이다.

      한국 신문을 보면 슬픈 일들이 연거푸 일어나서 우리 이민 1세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천진난만하게 보이는 청소년들이 순간적인 분노로 엄청난 살인사건을 저지르고도 부모의 애통해하는 모습과는 달리 무심한 표정이다. 나중에야 깨닳게 되는 죄의식을 어떻게 감당하게될런지 암담하고 슬픈 일이다. 세상을 몰라도 이럴 수가...또는 인성교육이나 도덕의 부재 등 어떤 이유를 찾아 현실을 둘러보게 된다. 가족들의 참담함을 생각하면 우리 어른들 모두의 책임임을 절감하게된다. 어린아이 때 어른들의 도움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잘 잡아 주었을 것을 지나고 나서 후회하게되는 우리들의 각박한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영국의 교육자이며 철학자인 럿쎌경은 아동교육에서 생후 최초 5년 동안의 생활이 가장 중요하다하였으며 인간이 만들어져서 출생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져 간다는 것을 생각할 때 아이들의 성장과정에서 사랑과 인내의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그것은 내가 이루지 못한 과정이기에 더욱 절실하게 받아드려진다.

     밖에서는 계속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안쓰러운 생각에 위니 더 푸 스틱커를 가지고 나갔다. 아이는 계속 울고있고 젊은 엄마는 땅에 앉아서 아이의 등을 다독이며 아이가 진정하기를 말없이 기다리고 있다. 아이가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 일은 아이의 몫임을 그 여인은 무언중에 가르치고있었다.

     '친절한 부인이 이걸 네게 주시니 고맙다고 인사해라'는 엄마의 말에 아이는 수줍은 듯 댕큐라고 한다. 생활에 시달린 듯 초라한 모습의 여인이 바로 아이의 지혜로운 엄마라는 감동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저 젊은 여인처럼 인내와 사랑으로 아이들이 올바른 길을 스스로 터득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던가, 얄팍한 생각으로 깊은 보살핌대신 물질적 만족을 안겨주며 스스로 자족하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는가 지난날을 돌이켜보게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