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09 14:20

이영숙 조회 수:60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저 세상에 있는 모든 것 다 배우겠다는 듯 이것저것 쓰잘데기 없는 것들을 배우려 다닐 때였다.  한 때 서예를 열심히 하다가 어느 순간 수묵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난을 치는 날 가슴이 다 설레었다.  먹을 갈 때부터 내 마음은 경건해졌다.  물론 그것은 서예를 할 때나 난을 칠 때나 다 같은 것이다.  그것은 가슴속에 있는 모든 욕심과 탐욕을 들어내는 작업이었다.  수구(연적)에는 깨끗한 물을 담는다.  지금으로 말하면 정수한 물을 이를 것이다.  넘치지 않도록, 너무 모자라지도 않게.  수구에 있는 물을 벼루에 따를 때도 오른손으로 연적을 잡고 왼손으로는 연적 밑을 받쳐서 조심스레 부어야 한다.  천천히, 마음에 충분한 여유를 가져야 한다.  결코 급하게 먹을 갈면 안 된다고 선생님은 열심히 설명했다.  혹여 먹물이 옆으로 튀는 것은 먹 가는 법이 틀려서이다.  먹을 두 손으로 잡고 반듯하게 갈아야 한다.  먹이 닳은 면을 보면 얼마나 정성스레 먹을 갈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맑은 물이 뻑뻑한 먹물로 변할 때까지 시간은 꽤 많이 소요된다.  먹물의 농도를 적당히 맞추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너무 묽으면 먹물이 화선지에 퍼져서 안 된다.  너무 뻑뻑하면 붓이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않는다.  
  정성을 다해 먹을 잘 갈고 나면 화선지를 편다.  화선지에 밑에 까는 담요를 소중히 간직하는 것도 중요하다.  담요위에 화선지를 깨끗하게 편 후 화선지가 움직이지 않게 아래위로 지지대를 대준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난을 칠 시간이 되었다.  난을 칠 때는 손목의 움직임이 중요하다.  선생님이 하시는 모습을 따라 손목을 열심히 움직여보지만 내가 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을 배웠음에도 난 잎이 꺾이는 것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손목에 힘을 주고, 적당할 때 빼고 해야 한다.  선을 하나 그어도 힘의 양에 따라 선의 모양이 바뀌기도 하고 색깔의 농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몇 달 배운 것으로 과연 무얼 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난 잎도 치고, 난 꽃도 그리며 먹 묻어 시꺼멓게 된 내 손을 들여다보고 낄낄대는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어쩌다 난 잎이 잘 꺾여 제법 흉내를 내었을 때는 혼자서 얼마나 좋았던지.  환호하고 박수치며 즐거워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내가 쳐놓은 난을 다듬어 조금은 그림이 되게 만들어 주셨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군데군데 점을 찍은 게 아닌가?  난을 그린 그림에 이 점은 무엇이며, 왜 점이 필요한가를 물었다.  빈 공간을 채워 그림의 허전함을 메워주는 작업이라 하셨다.  “점을 자유롭게 찍을 정도가 되면 다 배운 것이다.”고 덧붙이셨다.  

  점.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구나.  그 때 비로소 느꼈다.  아무런 필요 없는 듯 느껴지는 점.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듯한 그 점.  그것은 꽃이 아니다.  꽃을 바치는 잎도 아니고 줄기도 아니다.  그림을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점이 있는지 없는지도 느끼지 못한다.  꽃을 들여다보느라, 난 잎을 바라보느라 점 따위는 신경을 쓰지도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난을 다 치고 난 후 점을 찍어주지 않으면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고 하니.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점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 것인가.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작은 점이 나를 만들고, 부족한 나를 완성시킬 터이다.  화려한 것이 아니다.  멋진 것이 아다,  훌륭하고 가치 있어 보이는 그런 것이 아니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하나의 점이 나는 완성시킨다.  “점이 이어지면 선이 되고 선이 나아가다 처음으로 돌아오면 원이 된다.  원이 수축하면 점이 되고, 원이 팽창하면 처음엔 곡선으로 후엔 직선으로 보이나 점의 연결이다.”라는 글을 읽었다.  돋보이지 않는 작은 점은 선이 되고, 그 선은 원이 되어 내 모습을 그릴 것이다.  

  많이 배운 사람도, 잘 생긴 사람도, 부를 누리는 그 사람도 때로는 작은 점이 온전히 찍히지 못해 뭔가 허전하고 부족함을 느낄 때가 있다.  결코 크게 보이지 않는 작은 부분.  얇은 미소하나, 그냥 스쳐버릴 수 있는 순간 어깨위에 슬쩍 올려 진 부드러운 손길, 남들은 느끼지 못할 상황임에도 가볍게 던진“힘내” 한마디.  그 작은 점들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한 인간으로서의 완성도가 달라질 수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이라도 점이 잘 찍히지 않으면 완성도가 떨어지듯이 말이다.  
  이제부터 매일 점 하나 찍으며 살아야겠다.  웃음의 점, 칭찬의 점, 격려의 점, 따뜻한 위로의 점.  그 작은 점들이 이어져 내 모습으로 나타날 그 때까지 나는 점을 찍으며 살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