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연

2014.03.14 16:43

채영선 조회 수:0

어떤 인연

  참 멀고도 먼 길이었습니다.
헤어져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지난 것이 삼십여 년, 언제 만난 적이 있다고 꼬집어 말하기도 어려운 그런 사이라 할까요, ‘시’하고 저는. 온 생애를 두고 다시 만나는 희열이 이렇게 클 수 있다는 걸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것입니다.
‘시’는 그렇게 저의 곁을 지나쳐갔고 다시 저를 찾아와 주었습니다.
막연한 그리움 같은 것이 치밀어 올 때마다 모아두었던, 사진이나 그림이 곁들어 있어 마음을 찡하게 하는 표지의 노트가 아직도 책장 한쪽에 몇 겹 쌓여 있습니다. 속이 비어 있는 노트를 묶고 있는 헝겊 고무줄이 가을 낙엽처럼 물들어가는 마음을 늘 잡아당기고 있었습니다. 열병처럼 도지는 증세 때문에 집시 아닌 집시가 되어 태평양을 건너고 대륙을 오르내리며 무언가를 찾아 끝도 없이 헤매고 다닌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봅니다.
  아무리 오고 가도 끝나지 않는 여행의 종착점은 어디일까요.
한 자리에 서 있는 모든 것은 어딘가를 향하여 떠나가기를 소망하며, 철새처럼 정처 없이 떠다니는 모든 것의 무의식 속에서는 한 곳에 안주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걸고 사막이나 광야를 떼 지어 오고 가면서 살아가며 죽으며 태어나며 하는 모든 목숨들은 바로 인간의 보이지 않는 마음 밭을 벌써 알아채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연과 사물이 인간을 위하여 존재한다면 분명코 그들은 인간의 따뜻한 눈길과 다정한 손길을 바라고 있겠지요. 궁궐 안의 모든 궁녀가 임금 한 사람을 바라보듯 하지 않을까요.
이름을 부르자 달려오던 점박이 양 한 마리가 주인의 손에 선택되었습니다. 털가죽이 찢어질까봐 그런지 왜 그런지 모르지만 주인은 양을 품에 안고 배를 갈랐습니다. 배 속에 손을 넣어 심장인지를 하나 잘라 내었습니다. 양은 까만 눈으로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무 소리도 못 내고 주인의 가슴에 기대어 숨을 멈추었습니다. 채 감지도 못하고 동그랗게 뜬 까만 눈동자가 눈에 선합니다.
주인이 이름을 불렀기에 당하는 고통은 더욱 크지 않았을까요. 어떤 경우든 아름을 모르는 사람이 당하는 어려움에 대하여 우리는 극적인 느낌을 가지기 못합니다. 동물이나 식물은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오직 사람이지요, 그것은 사람이 이름을 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든 생명체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이름을 지어준 인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더 나아가 얼마나 많은 수의 생명을 거두어 내 것으로 만들었는지 명예롭게 여기기까지 하니까요.  
다른 생명도 나의 목숨처럼 살아갈 명분이 있음을 알게 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짧고 긴 것의 별스럽지 않은 차이가 있을 뿐 십년이니 백년이니 하는 시간 이야기는 영원이라는 명제 앞에서 얼마나 큰 가치가 있을지도 생각해 봅니다.
그들만의 이야기와 그들만의 만남, 그들만의 사랑과 그들만의 기쁨.....이 있다고 감히 단언하고 싶습니다. 그 설레는 눈짓과 웃음을 우리는 등 뒤로 느끼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알고도 모르는 체하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다면 너그러운 사람이겠지요. 우리는 자신에 대한 연민에 빠져있는 나머지 타인의 한숨에 귀를 기울일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뿐
만 아니라 21세기라는 척박한 언덕에 뿌리 내린 채 한 사람 한 사람 따로따로 서서 피할 곳도 없는 모진 비바람을 하루하루 견디어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는 것이 좋은 방법의 하나라고 합니다. 모든 사물은 귀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지요. 거실 안에 키우는 화초도 애완견도 싱크대 속에서 자리나 차지하는 냄비나 커피 잔도 그들 나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요.
  이제 다시 시를 쓴지 겨우 몇 년 되지 않는 저는 사랑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염색을 해야 할 나이에 사랑이라니 참 주책 같기도 하지만 기독교라는 토양 위에서 사랑이라는 달콤한 단어에 귀에 못이 박혀 자란 저에게는 별로 이상하지도 않지요. 아마 세월이 조금 지나면 색이 바랜 그리움으로 액자에 걸리는 날이 오겠지요. 그러나 ‘그리움’이니 ‘정’이니 하는 것이 사실은 ‘사랑’이라는 것보다 더 끈질기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어머니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후부터 느끼는 그리움은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시간까지 지고 가야할 무거운 짐일 것입니다. 떼려고 하면 할수록 살 속 깊이 파고드는 족쇄 같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혈연이나 어떤 종류의 인연에 매여 사는 인간으로서 그것을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것은 무모한 일일 것입니다.  
  다시 ‘시’라는 인연을 만나고부터 저는 남은 한쪽 귀로만 들어야하는 것이 답답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주역이 되어 흘러가는 시간의 뒤안길에는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보도블록을 뚫고 나오는 잡초처럼 강인하면서도 가냘픈 음성이 언제나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참, 오늘도 우리 막내 딸 강아지 해피가 뭐라고 잠꼬대하는지 곰곰 들어보아야 하겠습니다.



2014. 2. 20. 아이오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