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받은 날

2014.09.04 12:13

김수영 조회 수:84






청천벽력이란 말이 참으로 실감 나는 오늘 하루였다. 살아가다가 상상치도 못한 일이 갑자기 발생할 때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미국에 이민 온 후 이런 스캠(Scam)은 처음 당하는 일이라, 오늘 아침은 내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어처구니없는 연기를 한바탕 치르고 난 기분이어서 허탈감마저 느꼈다. 어안이 벙벙하고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뒤통수를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 하다.
하루 일을 끝낸 다음 저녁 10시에 취침하는 것이 건강에 아주 좋다고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지만 나는 주말에는 자정이 넘어서 잠을 자곤 한다. 규칙적인 생활습관은 건강에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키지 못할 때가 있다. 어젯밤에도 1시 반에 잠이 들어 늦잠을 자 아침 8시경에 일어났다.
숙면을 취하지 못한 것 같아 몸이 개운치가 않았다. 모닝커피를 한 잔 마시고 정신을 차리겠다고 생각하고 커피를 준비하고 있었다. 갑자기 요란한 전화벨이 온 집안의 정적을 깨웠다. 시간을 보니 8시 반이 조금 지났었다. 놀랍게도 연방정부세무국(IRS) 직원이라 사칭을 하면서 밀린 세금을 내지 않아서 기소해 둔 상태라 법정에 출두해야 하고 감옥살이를 할 수도 있다고 협박을 했다.
등기우편을 여러 번 보냈으나 편지가 되돌아왔다고 했다. 한국에 가고 없을 때 편지를 보내어 되 돌아간 줄 알고 감쪽같이 속았다. 오늘 현금으로 밀린 세금을 지불하면 법정까지 가는 수속을 중단하고 변호사를 살 필요도 없다면서 그럴듯한 거짓말을 꾸며댔다.
나는 누누이 세금이 밀린 적도 없고 안 낸 적도 없다고 설명을 했다. 우선 당장에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 세금을 지불하고 나중에 죄가 없으면 낸 돈을 되돌려받을 수가 있다며 감언이설로 나를 꼬드겼다. 오늘 현찰로 밀린 세금을 내면 벌금과 서류 수속비 등 다 면제해 주고 법정에 설 필요도 없고 깨끗이 해결된다고 했다. 오늘 내지 않으면 운전면허 정지되고, 신용카드 하나도 못쓰고 은행 계좌도 다 중단되고 출국도 할 수 없다면서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고 겁을 주었다.
나는 얼떨결에 놀라서 속았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돈을 현찰로 지불하겠다고 했더니 지불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은행 가서 돈을 찾아서 Ralphs Super Market에 가서 Green. money Pak (Reload Prepaid Card)을 2장 사서 돈을 지불하라고 했다. 절대로 휴대전화를 끊지 말고 자기와 계속 대화하면서 송금이 끝날 때까지 전화기를 들고 다니라고 했다.
카드를 사서 돈을 지불하려고 담당 지배인을 불렀더니 꼬치꼬치 송금내용을 물어보아서 사실대로 다 얘기했더니 스캠이라며 돈을 절대로 송금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전화기를 계속 켜 놓고 있었기 때문에 대화 내용을 다 들은 상대방은 스스로 전화를 끊었다. 담당 지배인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사기를 당할 뻔했다. 전화기를 끄지 말고 송금할 때까지 들고 다니라고 한 것은 다른 데다가 전화해서 내용을 알아볼 까봐 고의적으로 돈을 지불 할 때까지 자기와 계속 통화를 해야 한다고 한 것 같다.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늦잠을 절대로 자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여야 겠다고 마음을 굳히었다. 일찍 일어나 맑은 정신이었으면 사기란 것을 눈치를 알아 차렸을 텐데 막 잠에서 깨어 난 상태라 다른 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겁부터 집어먹었다, 경찰관이 체포하러 올지 모른다는 말에 기가 질려 큰 실수를 저질렀을 뻔 했던 아찔했던 하루였다. 내가 남을 속이는 것도 절대 안되지만 남에게 속지 않는 지혜도 절대로 필요하다는 천금같은 교훈을 뼈저리게 느낀 긴 하루였다.


8월26일자 중앙일보 '이 아침에'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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