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있는 욕

2014.10.17 15:56

김학천 조회 수:72

  한 25년 전 쯤 인가보다. 미국에 갓 온 후배부부와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고 메뉴를 보고 있는데 ‘Kalbi’가 눈에 띄었다. 혹시나 해서 설명을 읽어보니 확실히 우리의 음식 갈비였다. 그 당시는 한국음식이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때라 신기하기도 했지만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데 갑자기 후배가 소리쳤다. ‘아니? 순대도 있네요!’ ‘정말?’ 다시 보니 정말 순대가 보였다. ‘아니 이게 웬?’ 하다가 그만 웃음이 터졌다. ‘Sundae’- 다름 아닌 아이스크림.    
  모르던 알던 외국어 단어를 접했을 때 모국어에 가깝게 읽혀지는 걸 탓할 수는 없겠다. 모국어의 숨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포유리창에 쓰여 있는 ‘Sale’을 ‘살래?’라고 읽거나 ‘Hi, Jane!’을 보고 ‘어이, 자네’로 인사를 한다는 농담도 있지만 설사 그런들 무슨 잘못일까. 결국엔 서로 인사한 셈인 것을.
  하지만‘지놈(Genome)이 개놈(Genome)아닌가?’하게 되면 우습다기 보단 발음상 곤란한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점잖은 체면에 욕할 수는 없고 하니 시치미 뚝 따고‘이놈 저놈’ 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아주 오래전 한국에서 택시 정류소 같은데서 줄서 기다리다 볼썽사나운 사람들이 앞에 있으면‘전자(前者)들은 말이야’하며 욕을 했던 게 기억나서다. ‘앞에 있는 놈들’이란 뜻이다.
  그랬던 것이 이젠 그 말도 사람 따라 이민을 왔는지 근래에는 아랫사람들이 윗사람들에게‘needle’이라고 한다고 한다. 웃사람에게 대 놓고 욕할 수 없으니‘바늘’이라고 표현하면 ‘니들(너거들)’이 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얼라’들은 idle(아이들)이 되나? 아무튼 품위를 지키기 위해선 욕도 요령이 필요할 텐데 상대가 여성이면 어떨까? 아무래도 여성에 대한 욕은 ‘놈 자(者)’자 보다는 듣기에도 거북하고 표현하기도 상스러워 내뱉기 곤란하겠지만 일찍이 우리의 천재시인 김삿갓이 일러준 비법이 있다.
  하루는 그가 어느 집 앞을 지나가는데 그 집 아낙네가 설거지물을 밖으로 뿌린다는 것이 하필 김삿갓이 뒤집어썼다. 과객의 행색이 초라해선 지 이 아낙네 사과는 커녕 홱 돌아서 그냥 들어가 버렸다. 화가 난 김삿갓 선비 체면에 욕을 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해해’하고는 갔더란다. 웃어 넘겼단 말일까?‘해’는 한문으로‘년(年)’이요 그것이 두 개, 곧 쌍(双)이니 욕도 그런 욕이 없다.
  따지고 보면 욕도 우리의 삶의 일부분인 감정의 발산인데 그렇다고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지 못해 상스러운 욕과 악담 욕을 퍼붓는다면 본인은 속이 시원할지 몰라도 듣는 상대방은 아프다. 해서 욕은 파괴적이고 반사회적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욕이 다 부정적이지만도 않다. 김삿갓처럼 품격 있는 욕을 한다거나 욕쟁이 할머니의 애정 어린 욕은 오히려 우리네 감정을 풍부하게 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사람사이의 친밀감을 높여주는가 하면 스트레스 해소에도 좋고 사회를 비판하고 풍자함으로써 사회질서에도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욕쟁이 할머니의 욕은 욕이 아니라 오히려 음식을 맛깔나게 돋우는 양념이라지 않던가. 그것은 해학과 기지가 담겨 있는 욕이기 때문일 것이고 그렇지 않은 욕은 내뱉은 사람에게 되돌아 갈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요새 너무 막 욕이 난무해서 한마디 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579 처럼 오영근 2009.01.12 0
10578 징소리 정용진 2007.12.06 0
10577 몰래 카메라 김동찬 2007.12.06 0
10576 빈 방 있습니까? 지희선 2007.12.10 0
10575 나는 지금 어디 서 있어야하나 ? 이 상옥 2007.12.10 0
10574 가을 이야기 2 밤과 한가위 / 김영교 김영교 2007.12.11 0
10573 사랑은 산행 김영교 2007.12.11 0
10572 대통령을 찾습니다 오영근 2007.12.12 0
10571 추워지는 늦가을 노기제 2007.12.14 0
10570 옷갈이 노기제 2007.12.14 0
10569 ○ 만여 번째 박치기 이주희 2013.04.15 0
10568 봄날의 꿈 박정순 2009.04.11 0
10567 부활의 아침의 기도 박정순 2009.04.11 0
10566 삶이란 성백군 2009.04.13 0
10565 양란(洋蘭) 앞에서 이용애 2008.10.26 0
10564 어둠숨쉬기 이월란 2008.10.26 0
10563 빈궁 2007 송명희 2008.10.26 0
10562 삼 복 날 이상태 2012.08.11 0
10561 불로장수(不老長壽) 정용진 2012.08.12 0
10560 8월 오연희 2012.08.1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