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
2014.11.30 01:06
통계란다. 한국 사람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이 ‘밥 한 번 먹자’라고 한다. 너나없이 흔하게 쓰는 말이다. 거짓말이라고 보면 그렇기도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정이 많은 민족성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냥 스치는 것 보다 마주보고 이야기 하면 정이 더 들고,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 보다 밥을 한 끼 나누어 먹고 나면 더 많은 정이 든단다. 그러니 ‘밥 한 번 먹자’는 서로의 정을 듬뿍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이야기가 아닐까.
바쁜 이민생활에 시달린 우리들은 ‘밥 한 끼 먹자’ 보다는 ‘언제 커피 한 잔 마시자’를 많이 쓴다. 나만하더라도 그렇다. 참 많은 친구들과 이웃들과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어쩌다 통화를 해도, 우연히 마주치기만 해도 그냥 편안하게 ‘다음에 커피 한 잔 하자’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만다. 지금은 가볍게 헤어지지만 언젠가 시간이 나면 좀 더 깊은 정을 나누자는 약속이다. 물론 지켜지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은 약속.
친구와 이웃과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도, 밥을 한 끼 먹으려도 건강해야 한다. 나이가 드니 그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아침마다 집 가까이 있는 공원에서 걷는다. 많은 노숙자들이 거기서 밤을 세고 있다. 여름은 그래도 덜 안쓰럽다. 겨울이 되면 그들을 보는 마음이 너무 시리다. 칼바람을 친구삼고, 밤새 별 이불을 덥고, 곁에 있는 가느다란 나무를 기둥삼아 잠을 청하는 그 모습이 안타깝다. 멀쩡한 정신으로 밤에만 공원을 찾아 잠을 청하고 낮에는 자기의 길을 다시 가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세상사 다 잊고 아무것도 모른 체 바람도 구름도 별도 함께 친구 되어 이야기 나누는 사람도 있다.
얼마 전 노숙자의 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씩씩하게 걸어 지나가는 내게 불쑥 내미는 손이 있다. 내민 손은 찰나적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얼른 거두어들이고 다시 혼자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무것도 줄 표정이 아니라고 읽었나보다. 미안하다. 아침운동 나온 나의 주머니는 열쇠와 전화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날 낮에 다음 날 새벽을 위해 얼마의 돈을 준비하며 생각했다. 그는 돈을 쓸 수 없는 형편으로 보인다. 항상 앉는 그 자리. 전혀 움직임이 없어 보이는 자세. 앉은 체 잠을 자고 깨서도 그 모습으로 있는 듯하다. 무엇을 사먹으러 갈 정신도 없어 보인다. 더욱이 음식을 사기 위해 가게에 들어가도 반기지 않을 듯한 모습. 돈보다는 뭔가 먹을 걸 주어야겠다. 그 날 빵가게에 가서 빵을 잔뜩 사왔다. 두 개를 제하고 모두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매일 아침 전기오븐에 살짝 녹여서 가져가야지.
아침, 좀 더 일찍 일어나 준비했다. 커피를 끓여 조금이라도 덜 식으라고 일회용 컵 두 개를 겹쳐 가득히 담고 랩으로 씌웠다. 빵 두 개와 바나나 하나, 그리고 아직도 뜨거워 마시기 조심스러운 커피. 건네주는 내게 문득 몇 시나 됐냐고 물었다. 6:20이라 알려줬다. 하루가 그냥 한 줄로 이어지는 그에게도 시간은 궁금한가보다. 그리고는 연이어 감사의 말을 했다. 따뜻한 커피를 들고 반가워하는 그가 도리어 내게 고맙다. 추위에 떨고 있는 그에게 따듯한 커피는 이렇게 좋구나. 두 손을 감싸 쥐고 아껴가며 마시는 커피.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까지 커피 잔을 손에 쥔 체 이제는 커피 잔과 이야기 나누는 지 계속해서 뭐라고 웅얼거리는 그 모습이 눈이 띄었다. 배고픔을 잊게 하는 빵도 반갑지만 따뜻한 커피가 밤새 떨고 있은 온 몸을 포근한 이불마냥 데워주겠구나. 다음 날부터 매일 아침 운동가는 내 손에는 빵과 끓고 있는 커피가 들려진다. 작은 것, 보잘 것 없는 사소한 것이 어떤 이에게는 이렇게 기쁨이 되고, 따뜻함이 되고, 행복이 된다.
한 잔 커피의 힘을 다시 느낀다. 가까운 이웃과 만나, 다정했던 친구와 함께, 잊고 있던 고마운 사람들과 이 따뜻한 커피를 마셔야겠다. 이민생활에 불어 온 칼바람에 시린 온 몸을 데워 줄 커피. 어색한 문화와 어려운 영어 때문에 상처 난 마음 포근하게 해 줄 커피 한 잔. 지금 바로 전화해야겠다. ‘이번 토요일 오후 6시에 6가와 웨스턴 코너에 있는 미스터 커피에서 우리 커피 한 잔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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