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회상 하며
아아, 잊으랴 어찌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혀 오던 날을, 6.25 노래를 부르려고 하니 가사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 6.25노래가 사라졌다. 올해는 주일이라서 예배드리고 나오는 남자 집사님에게 물어 보았다. 6.25노래 가사를 아세요. 하니 글쎄요 하더니
아아, 잊으랴 어찌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모르겠는데요. 한다.
“요새는 6,25날에 6.25노래를 안 부르나 봐요“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네요” 한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치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부르던 6.25노래다. 더욱이 행사장에서는 목청껏 부른 노래이다. 사변으로 죽어간 우리 형제와, 삼촌들을 생각하며 악을 쓰며 부르던 노래가 언제 부터인지 슬쩍 자취를 감추고 6.25란 말이 신문에서 언론에서 사라져 가는 것을 본다. 해외에서 살다보니 내가 무관심하여 그런가 하고 물어 보았는데 , 그분도 30년을 외국에 사신 분이라, 글쎄요, 언제부터 부르지 않는지 몰라,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눈으로 물어 보게 되었다. 집에 와서6.25노래 가사를 정확히 알려고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다.
6.25노래 / 박두진 작사 / 임동진 작곡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6.25노래를 찾다가, 6.25의 전쟁 기록 사진들이 많이 올려 져 있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서울,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의 모습, 전쟁을 피하여 피난 가는 모습들, 참전군이 죽어가는 처참한 모습들. 참으로 아픈 상처들이었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전쟁을 모르는 다음 세대들은 그런 전쟁이 있었대. 할 정도일 것이다.
우리가 얼마 전 이순신 드라마에서, 일본의 무모한 야망이 불후에 명장 이순신 장군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서, 우리 역사를 드라마로 보면서 바로 알게 되었다. 정말 잘 본 기억이 난다. 요즈음에는 주몽을 통하여 건국 고구려를 보는 중이다. 흥미진진하고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이 배움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다른 나라 일본과 싸움이지만. 6.25를 우리 후손에게 조명하여 줄때는 부끄러울 것이다. 그렇게 많은 희생을 치른 전쟁이라고 설명 하려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6.25는 많은 사람이 죽었다. 남북한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필설로 말하고 싶지 않다. 참전군은 얼마나 많이 죽었는가. 왜 전쟁을 치러야 했나.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이 왜 북은 남을 갑자기 침략하여 전쟁을 하였나. 후손이 물어 온다면 무어라고 가르칠까, 하는 생각이 온다.
인제는 괴뢰 도단 , 북괴라든가 하는 말은 안 써서 좋다 . 초등학교 시절에는 빨갱이가 온몸이 빨갛게 물이 든 괴물이었는지 알았다.
실지로 6 25당시 8살이었다. 이북에서 내려온 인민군과 무주구천동에서 여름에 잠간 같이 지낸 적이 있었다. 냈다. 학교 사택에 사는 우리 집은 인민군 장교 숙소이고, 학교는 일개 사단의 주둔 장소로 사용하여 나는 그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던 사람이다. 그들은 빨갱이도 아니고 , 괴물도 아니었다. 그들은 다정한 우리 이웃집 아저씨이고 ,자상한 오빠였다. 자상한 언니도 있었다. 그런데 이념이 다르다고 이웃집 아저씨도 죽이고 ,오빠도 죽이고, 언니도 잡아갔다. 그런 걸 보고 자란 나는 6.25 생각하면 이중의 생각이 동시에 떠오른다. 괴물 빨갱이들이 저지른 만행과, 무주구천동에서 한집에서 살았던 인민군들이다. 무섭고 힘들었던 세월 전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저린 가슴으로 살아야 하였는가,
6.25 전쟁을 북은 북침이라고 하고 있다. 억지를 쓰고 있다. 그렇게 세습 정치하던 공산주의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가 되어 세계에다 구호의 손을 벌리는 나라가 아닌가. 역사가들은 어떻게 쓸 것인가, 6.25가 무엇이요, 물어 오고, 같은 민족끼리 무엇 때문에 싸웠어요, 하고 물어 온다면 무어라고 대답 하여야 할까,
얼마 전에 14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다. 왜 저들은 50년 동안 사랑하는 가족이 헤어져서 살아야 하는가, 우리 후손들이 물어 온다면 무어라고 대답 할까, 엄마 차타고 가던지, 걸어가면 되지 않아, 전쟁을 모르는 천진한 아이들이 물어 온다면 무어라고 대답 하나. 우리는 자라면서 반공반공 하며 살아온 우리세대이다. 이제는 세대가 바뀌어 가는지, 그 아픔이 희석이 되어 가서 인지 반공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간첩소리도 쏙 들어갔다.
인터넷에서 보니, 김대중 전 대통령 북한 방문 저지 궐기대회가 여기저기서 일어 난 사진을 싫었다. 해외에서는 신문에 안 나면 고국 사정을 모른다.
인제는 공산주의를 적당이 받아 드리고 살자는 뜻인지 궁금하다. 북한도 같은 민족이니, 사랑하고 끌어안아야 하지만, 공산주의는 철저히 막아야 한다.
우리는 자유주의를 수호하는 나라이다. 그리고 공산주의를 지향한 나라들 가난하고 못살아서 다 무너졌다. 정치적으로 다 실패 하였다. 종교의 자유도 인정 안하는 나라 아닌가,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를 박탈하는 주의가 아닌가. 김정일이나, 김일성은 같은 민족이기 이전에 공산주의자인 것을 명심 하여야 할 것이다.
다시 6.25노래를 불러 본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 수없이 목청껏 부르며 이를 갈며 공산당인데, 세월이 가니 희석하여 가는지, 이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같은 민족이라고 껴안으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껴안으면 안 되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혀 오던 날을, 6.25 노래를 부르려고 하니 가사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 6.25노래가 사라졌다. 올해는 주일이라서 예배드리고 나오는 남자 집사님에게 물어 보았다. 6.25노래 가사를 아세요. 하니 글쎄요 하더니
아아, 잊으랴 어찌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모르겠는데요. 한다.
“요새는 6,25날에 6.25노래를 안 부르나 봐요“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네요” 한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치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부르던 6.25노래다. 더욱이 행사장에서는 목청껏 부른 노래이다. 사변으로 죽어간 우리 형제와, 삼촌들을 생각하며 악을 쓰며 부르던 노래가 언제 부터인지 슬쩍 자취를 감추고 6.25란 말이 신문에서 언론에서 사라져 가는 것을 본다. 해외에서 살다보니 내가 무관심하여 그런가 하고 물어 보았는데 , 그분도 30년을 외국에 사신 분이라, 글쎄요, 언제부터 부르지 않는지 몰라,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눈으로 물어 보게 되었다. 집에 와서6.25노래 가사를 정확히 알려고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다.
6.25노래 / 박두진 작사 / 임동진 작곡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6.25노래를 찾다가, 6.25의 전쟁 기록 사진들이 많이 올려 져 있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서울,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의 모습, 전쟁을 피하여 피난 가는 모습들, 참전군이 죽어가는 처참한 모습들. 참으로 아픈 상처들이었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전쟁을 모르는 다음 세대들은 그런 전쟁이 있었대. 할 정도일 것이다.
우리가 얼마 전 이순신 드라마에서, 일본의 무모한 야망이 불후에 명장 이순신 장군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서, 우리 역사를 드라마로 보면서 바로 알게 되었다. 정말 잘 본 기억이 난다. 요즈음에는 주몽을 통하여 건국 고구려를 보는 중이다. 흥미진진하고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이 배움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다른 나라 일본과 싸움이지만. 6.25를 우리 후손에게 조명하여 줄때는 부끄러울 것이다. 그렇게 많은 희생을 치른 전쟁이라고 설명 하려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6.25는 많은 사람이 죽었다. 남북한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필설로 말하고 싶지 않다. 참전군은 얼마나 많이 죽었는가. 왜 전쟁을 치러야 했나.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이 왜 북은 남을 갑자기 침략하여 전쟁을 하였나. 후손이 물어 온다면 무어라고 가르칠까, 하는 생각이 온다.
인제는 괴뢰 도단 , 북괴라든가 하는 말은 안 써서 좋다 . 초등학교 시절에는 빨갱이가 온몸이 빨갛게 물이 든 괴물이었는지 알았다.
실지로 6 25당시 8살이었다. 이북에서 내려온 인민군과 무주구천동에서 여름에 잠간 같이 지낸 적이 있었다. 냈다. 학교 사택에 사는 우리 집은 인민군 장교 숙소이고, 학교는 일개 사단의 주둔 장소로 사용하여 나는 그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던 사람이다. 그들은 빨갱이도 아니고 , 괴물도 아니었다. 그들은 다정한 우리 이웃집 아저씨이고 ,자상한 오빠였다. 자상한 언니도 있었다. 그런데 이념이 다르다고 이웃집 아저씨도 죽이고 ,오빠도 죽이고, 언니도 잡아갔다. 그런 걸 보고 자란 나는 6.25 생각하면 이중의 생각이 동시에 떠오른다. 괴물 빨갱이들이 저지른 만행과, 무주구천동에서 한집에서 살았던 인민군들이다. 무섭고 힘들었던 세월 전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저린 가슴으로 살아야 하였는가,
6.25 전쟁을 북은 북침이라고 하고 있다. 억지를 쓰고 있다. 그렇게 세습 정치하던 공산주의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가 되어 세계에다 구호의 손을 벌리는 나라가 아닌가. 역사가들은 어떻게 쓸 것인가, 6.25가 무엇이요, 물어 오고, 같은 민족끼리 무엇 때문에 싸웠어요, 하고 물어 온다면 무어라고 대답 하여야 할까,
얼마 전에 14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다. 왜 저들은 50년 동안 사랑하는 가족이 헤어져서 살아야 하는가, 우리 후손들이 물어 온다면 무어라고 대답 할까, 엄마 차타고 가던지, 걸어가면 되지 않아, 전쟁을 모르는 천진한 아이들이 물어 온다면 무어라고 대답 하나. 우리는 자라면서 반공반공 하며 살아온 우리세대이다. 이제는 세대가 바뀌어 가는지, 그 아픔이 희석이 되어 가서 인지 반공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간첩소리도 쏙 들어갔다.
인터넷에서 보니, 김대중 전 대통령 북한 방문 저지 궐기대회가 여기저기서 일어 난 사진을 싫었다. 해외에서는 신문에 안 나면 고국 사정을 모른다.
인제는 공산주의를 적당이 받아 드리고 살자는 뜻인지 궁금하다. 북한도 같은 민족이니, 사랑하고 끌어안아야 하지만, 공산주의는 철저히 막아야 한다.
우리는 자유주의를 수호하는 나라이다. 그리고 공산주의를 지향한 나라들 가난하고 못살아서 다 무너졌다. 정치적으로 다 실패 하였다. 종교의 자유도 인정 안하는 나라 아닌가,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를 박탈하는 주의가 아닌가. 김정일이나, 김일성은 같은 민족이기 이전에 공산주의자인 것을 명심 하여야 할 것이다.
다시 6.25노래를 불러 본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 수없이 목청껏 부르며 이를 갈며 공산당인데, 세월이 가니 희석하여 가는지, 이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같은 민족이라고 껴안으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껴안으면 안 되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