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12 16:06

여든 여섯 해

조회 수 24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여든 여섯 해


                                                                                     이 월란




이젠
그녀의 이름보다, 수액이 다 흘러내려 쪼그라든 그녀의 키보다
여든 여섯이라는 숫자가 그녀의 모든 신상기록을 대변해 주게 된 지금
버려진 이력서같은 그녀의 구겨진 몸뚱이가 침대 위에 엎드러져 있었다
장성같은 아들이 넷이나 되어도
그들을 위해 평생을 허리 굽혀 밥을 지었던 그녀의 휘어진 등을
어느 한 아들도 펴줄 순 없단다

그녀의 부고장이 당장 날아들어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늙어버린 두 자리 숫자
이제 남겨진 모퉁이 하나 마저 돌면 절벽같은 미말의 휘장
그녀는 이제 정신이 먼저 놓아버린 목숨을 배로 기어 건널 것이다
피안의 담장 너머로 버려져도 억울타 할 수도 없는 여든 여섯 해
그녀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고된 발목을 내리고
질긴 육신을 향해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깔끔했던 그녀는 치매에 걸려서도 실수할까 늘 두려워 온종일 보챈단다
<오줌 마려워요, 저 좀 데려다 주세요. 녜?>
양반댁 규수시절의 연분홍 아씨로 돌아가 버린 것일까
그녀의 말투는 시종일관 고운 존대말이다

덧없는 세상이 더욱 덧없어 마음이 먼저 떠나가버린 그녀의 작고 둥근 몸은
만지면 오그라드는 쥐며느리같다
강보에 싸여 그대로 늙어버린 아기같다
그녀의 딸이 볼을 비벼주며 <엄마, 이쁜 시계도 찼네? 지금 몇 시야?> 물으니
<녜, 7시 5분이에요> 하신다
첫정인과의 약속 시간이었을까, 어미의 자궁같은 고국을 훨훨 떠나온 시간이었을까
주저 없이 대답하던 그 7시 5분이란 시각은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이젠 쓸모없는 시간의 바닥을 꿈틀꿈틀 기어다니는
그녀의 작은 몸을 쓰다듬고
마디 굵은 그녀의 목질같은 두 손을 꼭 잡았다 놓고
값싼 눈물 몇 방울 떨어뜨려 두고 집으로 오는 길
버텨낼 수 없을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저 질긴 목숨의 길
그녀의 목소리가 자꾸만 따라온다


<오줌이 마려워요. 눈물이 마려워요...>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829 해는 달을 따라 돈다 JamesAhn 2007.08.25 337
1828 최후의 이동수단 - 꿈의 이동장치 박성춘 2012.01.29 337
1827 바람을 붙들 줄 알아야 강민경 2013.10.17 337
1826 어느새 / 성백군 하늘호수 2018.12.30 337
1825 겨울 홍시 강민경 2014.02.08 336
1824 잘 박힌 못 성백군 2014.04.03 336
1823 길 위에서, 사색 / 성백군 하늘호수 2015.06.13 336
1822 평론 런던시장 (mayor) 선거와 민주주의의 아이로니 강창오 2016.05.17 336
1821 유실물 센터 강민경 2015.07.24 335
1820 詩똥 이월란 2008.03.09 334
1819 어머니의 마당 성백군 2005.08.12 333
1818 방전 유성룡 2006.03.05 333
1817 송어를 낚다 이은상 2006.07.19 333
1816 바람의 길 4 이월란 2008.02.23 333
1815 가을 밤송이 성백군 2014.10.10 333
1814 아침이면 전화를 건다 김사빈 2005.04.02 332
1813 아이들과갈비 강민경 2005.09.19 331
1812 수필 새삼 옛날 군생활얘기, 작은글의 향수 강창오 2016.07.05 331
1811 기타 거울에 쓰는 붉은 몽땅연필-곽상희 미주문협 2017.11.07 331
1810 무 궁 화 강민경 2005.07.12 330
Board Pagination Prev 1 ...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 114 Next
/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