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25 12:46

저녁별

조회 수 161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저녁별


      
                                                                                                 이 월란




찬연한 어둠의 무대가 차려지기도 전, 대본을 잃어버린 빙충맞은 신인배우처럼 허둥지둥 나와버렸다. 왜 태어났을까. 아직 어둠을 모르는데. 왜 생겨났을까. 저리 서투른 외눈박이 눈빛으로. 절망으로 빚은 삶의 좌판 위에 카스트로 목이 졸린 데칸고원의 달릿*같은 가녀린 목숨으로.


생리 중의 도벽같은 습관성 우울이 싸늘히 옆에 뜨고. 어둠의 정교한 끌로 세공되지 못한 저 어슴푸릇한 조명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생의 가녘으로 밀려난 내 잊혀진 사랑으로. 그 땐 내 작은 우주를 다 비추고도, 아니 태우고도 남았을 단 하나의 기억으로.


나의 시를 죽을 때까지 읽게 해 달라던, 나의 시어들을 따라 움직일 얼굴 없는 독자의 숨겨진 눈빛처럼. 마음을 구걸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겸허히도 떠 있다. 하늘의 오선지 위에 엇박자로 잘린 싱커페이션같은 음보 하나. 실낱같이 잦아드는 한숨도 위태한 저 혈연같은 여윈 빛에 잇대어 보면. 왜 태어났을까. 이 환한 저녁에.

                                                                                            



* 달릿(Dalit) : 산스크리트어로 ‘깨진’ ‘짓밟힌’이란 뜻으로 신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상위 카스트를 섬기는 최하위 계층인 불가촉천민(untouchable)을 가리킨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846 정월 강민경 2012.01.28 134
1845 정원에 서있는 나무 강민경 2009.01.20 292
1844 정용진 시인의 한시 정용진 2019.05.17 218
1843 정신분열 박성춘 2007.10.28 280
1842 정상은 마음자리 하늘호수 2017.03.05 170
1841 정독, 인생길 / 성백군 하늘호수 2023.09.05 254
1840 시조 점촌역 / 천숙녀 file 독도시인 2021.05.19 183
1839 절제 / 성백군 1 하늘호수 2022.03.24 110
1838 절규 성백군 2012.05.16 193
1837 전지(剪枝) 성백군 2007.01.18 206
1836 전자기기들 / 성백군 하늘호수 2018.12.11 167
1835 전령 1 file 유진왕 2021.08.06 93
1834 전구 갈아 끼우기 서 량 2005.12.18 439
1833 적폐청산 / 성백군 하늘호수 2018.08.10 100
» 저녁별 이월란 2008.03.25 161
1831 저, 억새들이 성백군 2008.11.20 152
1830 저 흐느끼는 눈물 - 김원각 泌縡 2020.02.27 64
1829 저 환장할 것들의 하늘거림을 이월란 2008.03.22 195
1828 저 하늘이 수상하다 성백군 2014.08.07 248
1827 저 붉은 빛 강민경 2009.05.03 549
Board Pagination Prev 1 ...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 114 Next
/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