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섬 / 이월란
2010.02.22 14:22
핀 어 같은 해저의 암호가 떠오른 것이다
바다가 결코 해독해내지 못하는
무성필름에, 새겨진 자막처럼 떠 있어
절망의 정부처럼 거적을 쓰고 버티고 있는 것이다
독설만 먹고도 가라앉지 않는 이 눈부신 부력
감추고 싶은 바다의 하체가 가슴까지 떠오른 것이다
결박당한 물의 사슬들이 밤새워 끊어지는 소리
허구의 영토를 적시고 또 적시는 것이다
미친 해풍이 뒤통수를 후려치더라도
길 잃은 바람의 신호등처럼 간간이 피어 있는
섬꽃들은 뭍이 그립지도 않은 것이다
자객처럼 뛰어드는 통통배 한 척 없어도
격랑의 발언조차 그늘의 영토가 되는 무인의 섬
바람이 물 위를 걸어와 전설 한 마디씩 던져주고 가는데
멀어지는 넋도 한 번씩 뒤척여 보는 흙의 몸이 되고파
바다의 음부가 유방처럼 솟아 오른 것이다
두려워라, 고립되어버린 질탕한 이 자유
끝나지 않는 끝말잇기처럼
파도가 말을 걸어와도 알아듣지 못한다
바다가 말을 걸어와도 대답이 없다
꽃의 철망이 자라는 유배지는 밤마다 별빛의 축배를 들고
바다가 뜯기는지 섬이 뜯기는지
출렁이던 비극이 딱지처럼 앉아 있는 이 자리
한 번씩 수정된 알들을 바다 깊숙이 빠뜨리면
부서져 돌아오는 이름, 이름들 사이로
바다 속 섬아기들이 열매처럼 자라는 소리
수평선을 잘라 만든 문장들이
하늘과 바다를 다시 나누어 주고 있는 것이다
멸종 당한 물고기들이 환생하는 쥐라기의 바다처럼
바다의 탈을 쓰고 두근두근 밤새 춤추는 섬
매일 아침 백지로 눈을 뜨는 것이다
댓글 0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487 | 봄-박영실 | 미주문협 | 2022.02.16 | 52 |
486 | 4월-박윤수 | 미주문협 | 2022.02.02 | 92 |
485 | 굴렁쇠를 굴린다-이희숙 | 미주문협 | 2022.01.22 | 59 |
484 | 안규복-겨울 수문가에서 | 미주문협 | 2022.01.01 | 90 |
483 | 사모곡-김희원 | 미주문협 | 2021.12.17 | 46 |
482 | 장미의 비밀-곽상희 | 미주문협 | 2021.12.06 | 52 |
481 | 가늠할 수 없는 길-최은희 | 미주문협 | 2021.11.14 | 55 |
480 | 이창범-정안수 | 미주문협 | 2021.11.01 | 46 |
479 | 이송희-가을바람 | 미주문협 | 2021.10.17 | 116 |
478 | 당신-정찬열 | 미주문협 | 2021.10.04 | 66 |
477 | 이송희-사우思友 | 미주문협 | 2021.09.16 | 95 |
476 | 신현숙-겨울나무의 노래 | 미주문협 | 2021.08.29 | 78 |
475 | 강화식-기억의 샤머니즘X-ray [1] | 미주문협 | 2021.08.01 | 59 |
474 | 김이듬 시인-여름문학캠프 초청 강사 | 미주문협 | 2021.07.04 | 61 |
473 | 최선호-꽃 잎 [1] | 미주문협 | 2021.06.17 | 72 |
472 | 현은숙-붉은비 | 미주문협 | 2021.06.02 | 47 |
471 | 유승희-꽃사돈 | 미주문협 | 2021.05.15 | 63 |
470 | 홍인숙-봄날의 희망 | 미주문협 | 2021.04.30 | 61 |
469 | 정국희-Guess의 문제점 | 미주문협 | 2021.04.20 | 57 |
468 | 서연우-베면 | 미주문협 | 2021.04.03 | 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