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딸이 울고 있다

2018.08.07 05:34

서경 조회 수: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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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근 치고는 조금 늦은 시간, 딸로부터 전화가 왔다.
- 엄마! 어디 있어요?
- 응, 가게. 방금 일 끝내고 이제 쉬고 있는 중.
- 별일 없어요?
- 그래. 나야 별 일 있을 게 있나. 너는?
- 난 소식이 하나 있는데 조금 안 좋은 ...
  안 좋은 소식이란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일도 끝나고 모두 퇴근 했겠다, 모처럼 딸과의 정담을 나누려고 등의자에 앉아 다리 까지 쭉 뻗고 있는 상태였다. 정신이 번쩍 들어 자세를 고쳐 앉고 다급하게 물었다.
- 안 좋은 소식이라니? 
- 나, 직장 그만 둘지도 몰라요.
- 아니, 왜? 그 좋은 직장을? 
  딸 아이는 매장을 700개 이상이나 가지고 있는 미국 패션 컴퍼니에서 바이어로 8년 째  열심히 일 하고 있는 중이다. 젊은 여성이라면, 한번쯤 거쳐 가고 싶은 직장이기도 하다. 보수도 괜찮고 인정도 받고 있는데 웬 일인가 싶었다.
- 내 바로 위 보스 믿고 8년간 일해 왔는데 완전 투 페이스에요. 요즘 매일 정신적 어뷰스를 해요! 지금 5일 째 스트레스로 잠도 못 자고 배가 아파서 설사하고 있어요.
- 큰일 났네? 너한테 잘 해 주고 그 사람 똑똑하고 일도 잘 한다고 좋아하더니 왜 갑자기 바뀌었지? 
- 내 아래 사람이 하나 들어 왔는데 일을 너무 못해서 오는 첫날 부터 보스가 그 애 밀어내자며 ‘제 시간에 끝낼 수 없는 프로젝트를 주자!’ 고 하길래 난 불쌍하다고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반대 했어요. 아마 그거 때문인가 봐요. 자기 말 안 들었다고... 휴가 간 사이에 그 애도 내 보냈더라구요. 이제는 내가 안한 말도 지어내고 내 스스로 못견디어 나가도록 나까지 나쁜 아이로 만들고 있어요. 8년간, 믿고 일해 왔는데, 나를 아직도 몰랐나 싶어 상처가 너무 커요! 
  딸아이는 훌쩍이다가 감정이 고조 되는지 흐느끼기 시작한다. 아, 수화기 저 너머로 딸의 흐느낌이 들려 온다. 미어지는 어미의 가슴. 얼마나 힘들었으면 닷새나 홀로 삼키고 있다가 흐느끼면서 엄마한테 속내를 틀어 놓는 것일까.
-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요. 이렇게 하드 타임 받으며 일하다가는 금방 죽을 것 같아요. 안 그래도 바이어는 스트레스 받는 잡인데 ...  
- 그래, 그렇게 힘들면 일 하기 힘들지. 둘이 한번 얘기나 해 봤어?  
- 이미 마음 문 닫은 거 같아요. 8년 동안이나 함께 일 하면서 날 몰랐다면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한들 소용이 있겠어요? 이번 기회에 밀어 내려고 아예 작정한 것 같아요. 똑똑한 사람보다 따뜻한 사람이 더 좋은 리더라는 엄마 말이 맞았어요. 똑똑한 사람은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 위해서 머리 써요. 다른 사람 생각 안 해 줘요. 
  딸아이는 더 높이 흐느껴 운다. 믿는 사람으로부터 어느 날 갑자기 내침을 받았으니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클까. 그것도 조석으로 얼굴을 맞대어 일 해야 하는 직속 상관이다. 난, 딸아이의 포지션이 올라 갈 때마다 늘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따뜻한 리더’를 강조했다. 그래도, 엄마가 해 주는 말을 잊지 않고 가슴에 새겨 두었나 보다. 
- 그래, 동미야! 나올 땐 나오더라도 여지껏 해 온 그대로 흐트러짐 없이 끝까지 일을 잘 하고 나와야 한다. 이제 나갈 거라고 대충 대충 일을 하면 “저것 봐라!” 하며 얼씨구 하고 좋아 할 거야! 어렵겠지만, 얼굴에 싫은 내색 내지 말고! 그게 바로 너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고 마지막 승리자가 되는 길이야. 그 사람 하나 보고 일 해 온 건 아니잖아? 
- 나도 그렇게 할려고 하는데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이럴 때 어떻게 했나 싶어서 유튜브도 들어가 봤어요. 스티브 잡스도 자기가 만든 회사에서 밀려나고 오프라 윈프리도 뉴스 맡고 있다가 하루 아침에 잘렸더라구요. 그래도 그 사람들은 부자라 1-2년 푹 쉬면서 고비를 잘 넘겼지요. 당장, 페이먼트 있는 내가 쓸 방법은 아니더라구요. 
  왜 아니겠나. 자존심을 따르자니 돈이 울고, 돈을 따르자니 자존심이 운다. 아무리 직위가 높고 돈을 많이 받아도 이것이 바로 샐러리맨의 비애다. 
- 그래, 한 쪽으로는 잡 찾으면서 한 쪽으로는 마인드 컨트롤 하는 수 밖에 없겠구나! 이럴 때, 바로 기도 제목 하나 생기는 거야! 
- 벌써 몇 군데 레주메 보냈어요. 나도 이게 하느님 뜻인가 하고 마음을 다듬고 있어요. 이젠 돈 적게 받아도 절대로 스트레스 받는 바이어 잡 안 하고 싶어요. 세일즈하고 똑 같아요. 너무 스트레스풀해요. 이번 기회에 내 커리어 완전히 바꾸고 싶어요. 
    또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스트레스 안 받는 잡이 세상에 어디 있나. 경중의 차이요, 견딜 수 있나 없나의 차이일 뿐. 그동안 경력을 쌓아 가며 한 번씩 옮길 때마다 몸값이 뛰지 않았나. 이제, 커리어를 바꾸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인데 어쩐담. 그래도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힘을 실어 준다. 
- 그래, 그렇게 스트레스 받는 잡 같으면 한 번 바꾸어 보는 것도 좋지! 아트 쪽으로 한 번 찾아 봐! 넌 손으로 못하는 게 없으니 남보다 빠르고 잘 할 거야! 그렇지만, 잡도 찾지 않고 갑자기 나오면 안 된다. 한 사람 때문에 회사를 나와 버린다는 건 너 자신에게 지는 거야. 우리, 잘 해 왔잖아? 
- 네...  그런데 내일 당장 둘이 같이 또 뉴욕 출장 가야 해요. 너무 괴로워요! 
  딸아이의 울음 소리는 조금 잦아지는가 싶더니 또 높아지고 길어졌다. 감정을 추스르고 싶지만, 냉혹한 현실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 정말 일 분 일 초가 함께 있기 괴로울 것이다. 사람 때문에 상처 받는 일보다 더 큰 괴로움은 없다. 하지만, 어쩌랴. 상황을 바꿀 수 없으면 내 마음을 바꾸는 수밖에. 당장 뛰쳐나올 수도 없으니 시간을 갖고 작전을 세워야 한다. 
- 그래, 울고 싶을 땐 실컷 울어! 그 사람 하고 계속 같이 움직여야 하니 힘들긴 힘들겠구나! 그래도 어쩌겠니. 사회가 내 편이 아니면 내가 마인드 컨트롤 해서 맞추어 가야지! 쥬이시들은 한 발은 문 안 쪽에, 다른 한 발은 늘 바깥에 두고 있대! 촛불 두 개를 켜 놓고 있는 거지! 힘들겠지만, 스스로 무너지진 마. 난 널 믿어! 이때까지도 잘 해 왔잖아! 출장 잘 갔다 오고!
- 엄마! 고마워요!
- 고맙긴... 너가 열심히 살아 줘서 내가 더 고맙지! 
  딸과의 전화는 끝났지만, 그 애가 지금 겪고 있는 심적 고통을 생각하니 나도 마음이 무거웠다. “새끼 눈에 눈물 나면, 에미 눈에는 피눈물 난다”는 어머니 명언이 생각났다. 
  모쪼록, 이 어려운 시간을 잘 넘겨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 오 헨리의 말처럼, 인생은 역시 미소와 훌쩍임과 흐느낌으로 빚어진 게 맞는 것 같다. 불과, 몇 년 전에 딸의 프로젝트가 대성공을 거두어 두둑한 캐시 보너스까지 받고 제 힘으로 집까지 사지 않았는가. 
  엄마가 모처럼 제 집에 놀러 가도 잠시 시간을 보내 주다가, 영화 한 프로 틀어 주고는 밤 열 두 시가 지나도록 일에 매달려 있지 않았나. 내 일처럼 열심히 일해 온 딸은 정말 억울할 터이다. 
  어찌 보면, 스트레스 받으며 일한 8년이란 세월은 너무 긴 지도 모른다. 5년마다 회사를 바꾸어야 한다 했는데 왜 3년이나 더 있었나 싶기도 하다. 삼십 대 중반을 넘어 40을 향해 가는 딸. 모험보다는 이제 안정을 취해야 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 것일까. 진취적이던 딸 아이 한테서도 나이에 대한 위기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의 하느님! 당신은 또 무슨 계획이 있어 내 딸을 광야 한 가운데로 내 모는 겁니까? 하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은 예비해 두셨겠지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기돈지, 푸념인지 차창 너머 밤하늘 별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하느님은 인간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신 계획에 맞추어’ ‘당신 시간 속에서’ 일 하신다 들었다. 그 말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밤 늦은 시간에도 제 향방을 찾아 가는 차량들로 프리 웨이는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용트림 하고 있었다. 달리는 차량의 소음도 밉지 않다. 우리는 여기, 살아 있다. 감정도 살아 있는 자의 특권이요, 울 수 있는 것도 살아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주님의 선물이다. 눈물은 성수라 했던가. 
  딸아! 울고 싶을 땐 울거라. 웃는 날 또 오리니. 엄마도 그렇게 살아 예까지 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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