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냐의 변명

2006.03.13 05:54

유영희 조회 수:225 추천:48

소냐의 변명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유영희


내 이름은 '소냐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입니다. 남편은 그 잘난 '레프 니코라예비치 톨스토이'이고요. 1862년 9월 23일 꽃다운 열여덟의 나이에 열여섯 살 연상인 톨스토이와 결혼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궁중의사였고, 나는 빼어난 미모를 지녔으며, 부족함이 없는 어린 시절을 거쳐 처녀로 자라났습니다. 귀족집안답게 현숙한 여인이 지녀야할 법도를 몸에 익혔지요.
그는 1828년 8월 28일 '야스폴랴나'에서 백작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돈 많은 귀족집안의 아들로서 그가 펼친 여성편력은 화려하기만 하였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유명한 작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원래 톨스토이는 저보다는 언니와 돈독한 친분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그가 언니와 결혼할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행을 하다가 저희 집을 들렀던 톨스토이와 낱말 만들기 게임을 하다가 그의 고백과 청혼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저와 결혼하겠다는 톨스토이의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성질 급한 톨스토이는 청혼한 다음날 결혼식을 하려 했지만, 준비를 해야하는 부모님의 입장 때문에 일주일 뒤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악처라고 말합니다. 내 해명 따위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오직 대 문호 톨스토이의 편에서만 생각하고 말을 합니다. 오늘은 왜 내가 그런 말을 들어야만 하는지 억울한 마음을 풀고자 변론을 해볼까 합니다.

나는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라는 소설을 쓸 때, 소설 전편을 무려 일곱 번이나 퇴고를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인 '나타샤'가 나를 모델로 하였다는 것은 여러분이 다 아실 것입니다. 나의 이런 수고가 없었다면 그가 인류역사에 대 문호 톨스토이로 길이 남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남편의 집필 활동을 위하여 늘 숨을 죽이고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늘 자살을 꿈꾸며 마음은 아내에게 머무르지 않고 허공을 떠돌았습니다. 차라리 나보다 빼어난 미모라든가 집안이 좋은 여자라면 자존심이 덜 상했을 것입니다. 그가 취하는 여자는 대부분 가난한 농노의 딸을 위시하여 하찮은 천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율배반적인 것은 성적인 방종을 멈추지 않으면서 그의 윤리의식은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이 오십이 되던 해 귀족이란 신분을 팽개치고 그는 천민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아내의 의견 따위는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이런 속에서 어느 여자인들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내 텅 빈 가슴에 잘 생긴 총각이며 피아니스트였던 '타네예프'는 정신적 연인으로 다가왔습니다. 남편이 다른 여인을 향한 관심이나 소설을 쓰는 열정의 반의 반 정도만 내게 쏟아 주었어도 다른 남자에게 연정을 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 둘 곳이 없던 내게 그는 플라토닉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이었습니다. 톨스토이가 저지른 애정행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자신은 마구잡이 외도를 하면서도 아내의 정신적 연인을 용납할 수 없는 톨스토이의 질투로 인해 결국 '타네예프'는 조용히 제 곁을 떠났습니다.

남편과의 극심한 대립은 그것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흔을 훌쩍 넘겨 죽을 때가 가까운 어느 날, 남편은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유언을, 그것도 비서를 통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은 물론이려니와 앞으로 받게 되는 인세까지 전부를요. 물론 평민들의 극심한 가난을 퇴치하고 싶은 그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평생을 그의 곁에서 헌신한 내게도 재산에 대한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 아내나 자식들은 안중에도 없는 그의 처사에 나는 분노하였습니다. 갈수록 갈등의 골은 깊어져 갔습니다.

그렇다고 결혼 48주년 기념일 행사를 마치고 가출이라뇨? 무슨 사춘기시절 반항도 아니고 82세 된 노인의 가출이라니,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불화의 씨앗은 스스로 만들어 놓고 막내딸 '샤샤'에게만 행선지를 알린 뒤 가출한 것입니다. 이미 전 세계적인 대 문호가 되어 있던 그를 기차 안에서 사람들이 알아본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집을 나간 지 한 달 보름만에 '아스타포보'역장 사택에서 그는 생을 마쳤습니다.

말년에 대 문호 톨스토이를 가출하게 만들었고 객사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나는 역사에 길이 남는 악처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무덤에는 비석도 세우지 말라는 유언까지 남기어 풀로 덮인 작은 흙무덤만 남기고 그는 가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그늘에 가려 평생 한숨 속에서 살아온 아내 소냐에겐 악처라는 불명예스런 이름을 안겨 놓고……. 방종은 대 문호의 낭만일 뿐이며, 가족에게 재산 한 푼 남기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고, 귀족으로 태어나 평민으로 죽어 간 그는 대단한 휴머니스트로 추앙을 받습니다.

당신이 내 입장이라면 톨스토이라는 남자와의 삶 속에서 바가지를 긁지 않고 살았을까요? 어쩌면 당신 스스로 먼저 가출을 시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이젠 악처라는 오명을 벗고 싶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대 문호이기 전에 한 여자의 남편이었습니다.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방종한 가장이었습니다. 대 문호라는 이유로 그의 방종은 무조건 용서가 되고 그에 맞섰던 제가 악처라는 누명을 쓰게되는 것은 형평성에 심히 어긋난 처사가 아닌가요?   (06. 3.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