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얻어지지 않아도
2006.03.23 09:47
꼭 얻어지지 않아도
전북대 평생교육원 수필창작(중) 김정자
마라톤이었는지 경보였는지, 막 반환점을 돌고 있었고 앞으로 갈 길은 멀어 보여 걱정하던 참이었다.
‘휴 언제가지?’
그런데 남편이 꿈속을 헤매는 나를 흔들어 깨웠다. 눈이 왔다고 했다.
“뭐, 눈이 왔어? 많이 온 거야?”
“그래, 3월의 눈치곤 많이 온 거야. 일어나 봐. 사진 찍으러 가려는데 같이 갈까?”
남편은 3월의 눈 오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을 하는 남편을 따라가는 것은 여행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전에 촬영했던 곳을 다시 가는 일이 많았고, 그렇지 않다 해도 한곳의 촬영지에서 파인더를 맞춘 채 길게는 두세 시간을 기다리는 일도 허다했다. 여행지의 볼거리도 잠시이고 보면 아무 할 일 없이 혼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날이 많기도 하여 선뜻 따라 나서지 않는 때도 많다.
같이 사진을 하면 좋으련만 난 기계치인데다가 기다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만도 아니다. 여러 사람들 속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을 자신도 없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댈 자신도 없다보니 아예 배울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얀 지리산과 어울린 노란 산수유 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리고 봄눈 녹듯 한다지 않는가? 오전 중이면 눈이 녹아 사진을 찍는 상황은 끝날 것이고 그러면 많은 시간을 혼자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말하는 남편의 이야기에 솔깃하여 따라나서기로 했다. 눈이 녹기 전에 찍어야 했으므로 아침식사도 거른 채 이른 아침 구례 산동의 산수유마을에 도착했다.
남편은 몇 년 전부터 봄이면 가보는 촬영장소인지라 촬영 포인트를 점찍어 놓은 듯 이리저리 둘러보지도 않고 한곳에 차를 주차 시켰다.
요 며칠 따뜻한 날씨로 산수유는 벌써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고 작년에 수확하지도 않은 빨간 산수유 열매와 섞여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우리밖에는 사람들도 없어 안심이 되었는지 가까운 곳에서 예쁜 산새들이 열매로 아침식사를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멀리 눈 쌓인 지리산의 만복대와 성삼재를 배경으로 한 노란 산수유의 어울림, 소복하게 눈을 덮어쓴 커다란 바위를 감고 흘러내리는 청아한 물소리가 3월의 아침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남편은 눈이 쌓인 바위를 앞에 두고 눈 덮인 밭가에 앉아 먼 지리산을 배경으로 노란 산수유를 찍을 생각인 것 같았다. 추울 텐 데도 꼼짝하지 않고 카메라를 장착한 삼각대 앞에 서서 지리산 위의 검은 구름이 비껴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의 눈 내린 산골의 찬바람은 구경도 할 겸 밖으로 나온 나를 다시 차 속으로 밀어 넣었다. 몹시 추웠다. 벌써 한 시간을 기다리며 눈밭에 웅크리고 있는 남편은 오늘 한 점의 작품이라도 건져 가려나? 저렇듯 고생하며 건져내는 게 사진작품의 세계인 것을…….
남편은 그러고도 몇 시간 더 그 근처에서 구름과 해의 숨바꼭질에 의해 달라지는 산수유와 어울리는 구도를 잡아내고 있었다. 그 사이 눈이 녹아 내렸다. 그리고 쑥과 냉이들이 눈에 들어오고 날이 풀렸다. 그 추운 날씨에 알몸으로 버티고 있는 나물의 여린 잎들이 신기하게도 싱싱했다.
나물을 캐기도 하고, 차 속에서 노곤하게 비쳐주는 햇살과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노라니 퍽 오랜 시간이었는데도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까만 비닐봉투 속에는 내가 캔 쑥과 냉이, 씀바귀 그리고 지금까지 본적도 없는 커다란 마늘크기의 달래 등 봄나물들이 차 속을 봄의 향기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꿈속에서는 반환점을 돌면서 긴 시간이 걸려 멀다고 느꼈는데 경쾌하게 제자리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2시가 넘어서야 남편의 구름과의 싸움은 끝났다. 끈질기게 기다린 남편의 몇 롤의 필름에는 하얀 지리산 위의 구름과 노란 산수유가지가 걸려 있을 것이다.
사진은 기다림의 예술이라고 한다. 또한 버림의 예술이기도 하단다. 초보자들은 아름다운 경치를 모두 한 컷의 필름 속에 넣으려 하지만 거기엔 눈으로 인식된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그저 밋밋한 풍경이 있을 뿐이다. 아름답다고 생각한 부분에 눈을 빼앗겨 오히려 주제의 힘을 약하게 하는 사진들을 많이 보게 된다. 어디 사진뿐일까? 그림도 그렇고. 수필도 그럴 것이다.
넣어야 할부분과 과감히 없애야 할 부분을 구분해 내는 능력이 프로로 가는 길이지 싶다. 필요 없는 부분을 잘 정리하여 주제에 충실한 한 컷의 사진과 수필 한 점에 우리는 감동한다. 추운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원하는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너무 쉽게 무엇이든 얻으려 하는 나를 뒤돌아보게 되었다.
3시가 넘어서 먹은 점심 한 끼로 오늘 세끼의 식사를 한꺼번에 해결했다. TV에선 WBC 세계야구대회에서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을 우리나라가 이기고 있었고 식사가 끝날 무렵엔 미국을 넘어 4강에 안착하였다. 우리나라 야구보다 수준이 한 수가 위인 일본과 미국을 이기려고 열심히 준비한 우리나라 선수들의 감격적인 승리다.
남편의 그 많은 필름 속에 작품성이 있는 것은 몇 점이나 있을까? 그러나 한 점이 나온다 해도 그건 알맞은 구도를 이미 짜 놓은 채 어울리는 기상변화를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야구에서처럼 아주 좋은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남편은 아마 많이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올 때마다 좋은 작품을 얻는다면 누가 사진을 찍지 않겠느냐고 오히려 날 위로하며 현상한 사진을 몇 번이고 바라보며 내년엔 어떻게 포인트를 잡을 것인지 준비하고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마음에 꼭 드는 사진을 찍어낼 것이다. 옛날 마이산 사진을 근사하게 찍었던 것처럼…….
(96. 3. 14.)
전북대 평생교육원 수필창작(중) 김정자
마라톤이었는지 경보였는지, 막 반환점을 돌고 있었고 앞으로 갈 길은 멀어 보여 걱정하던 참이었다.
‘휴 언제가지?’
그런데 남편이 꿈속을 헤매는 나를 흔들어 깨웠다. 눈이 왔다고 했다.
“뭐, 눈이 왔어? 많이 온 거야?”
“그래, 3월의 눈치곤 많이 온 거야. 일어나 봐. 사진 찍으러 가려는데 같이 갈까?”
남편은 3월의 눈 오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을 하는 남편을 따라가는 것은 여행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전에 촬영했던 곳을 다시 가는 일이 많았고, 그렇지 않다 해도 한곳의 촬영지에서 파인더를 맞춘 채 길게는 두세 시간을 기다리는 일도 허다했다. 여행지의 볼거리도 잠시이고 보면 아무 할 일 없이 혼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날이 많기도 하여 선뜻 따라 나서지 않는 때도 많다.
같이 사진을 하면 좋으련만 난 기계치인데다가 기다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만도 아니다. 여러 사람들 속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을 자신도 없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댈 자신도 없다보니 아예 배울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얀 지리산과 어울린 노란 산수유 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리고 봄눈 녹듯 한다지 않는가? 오전 중이면 눈이 녹아 사진을 찍는 상황은 끝날 것이고 그러면 많은 시간을 혼자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말하는 남편의 이야기에 솔깃하여 따라나서기로 했다. 눈이 녹기 전에 찍어야 했으므로 아침식사도 거른 채 이른 아침 구례 산동의 산수유마을에 도착했다.
남편은 몇 년 전부터 봄이면 가보는 촬영장소인지라 촬영 포인트를 점찍어 놓은 듯 이리저리 둘러보지도 않고 한곳에 차를 주차 시켰다.
요 며칠 따뜻한 날씨로 산수유는 벌써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고 작년에 수확하지도 않은 빨간 산수유 열매와 섞여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우리밖에는 사람들도 없어 안심이 되었는지 가까운 곳에서 예쁜 산새들이 열매로 아침식사를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멀리 눈 쌓인 지리산의 만복대와 성삼재를 배경으로 한 노란 산수유의 어울림, 소복하게 눈을 덮어쓴 커다란 바위를 감고 흘러내리는 청아한 물소리가 3월의 아침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남편은 눈이 쌓인 바위를 앞에 두고 눈 덮인 밭가에 앉아 먼 지리산을 배경으로 노란 산수유를 찍을 생각인 것 같았다. 추울 텐 데도 꼼짝하지 않고 카메라를 장착한 삼각대 앞에 서서 지리산 위의 검은 구름이 비껴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의 눈 내린 산골의 찬바람은 구경도 할 겸 밖으로 나온 나를 다시 차 속으로 밀어 넣었다. 몹시 추웠다. 벌써 한 시간을 기다리며 눈밭에 웅크리고 있는 남편은 오늘 한 점의 작품이라도 건져 가려나? 저렇듯 고생하며 건져내는 게 사진작품의 세계인 것을…….
남편은 그러고도 몇 시간 더 그 근처에서 구름과 해의 숨바꼭질에 의해 달라지는 산수유와 어울리는 구도를 잡아내고 있었다. 그 사이 눈이 녹아 내렸다. 그리고 쑥과 냉이들이 눈에 들어오고 날이 풀렸다. 그 추운 날씨에 알몸으로 버티고 있는 나물의 여린 잎들이 신기하게도 싱싱했다.
나물을 캐기도 하고, 차 속에서 노곤하게 비쳐주는 햇살과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노라니 퍽 오랜 시간이었는데도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까만 비닐봉투 속에는 내가 캔 쑥과 냉이, 씀바귀 그리고 지금까지 본적도 없는 커다란 마늘크기의 달래 등 봄나물들이 차 속을 봄의 향기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꿈속에서는 반환점을 돌면서 긴 시간이 걸려 멀다고 느꼈는데 경쾌하게 제자리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2시가 넘어서야 남편의 구름과의 싸움은 끝났다. 끈질기게 기다린 남편의 몇 롤의 필름에는 하얀 지리산 위의 구름과 노란 산수유가지가 걸려 있을 것이다.
사진은 기다림의 예술이라고 한다. 또한 버림의 예술이기도 하단다. 초보자들은 아름다운 경치를 모두 한 컷의 필름 속에 넣으려 하지만 거기엔 눈으로 인식된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그저 밋밋한 풍경이 있을 뿐이다. 아름답다고 생각한 부분에 눈을 빼앗겨 오히려 주제의 힘을 약하게 하는 사진들을 많이 보게 된다. 어디 사진뿐일까? 그림도 그렇고. 수필도 그럴 것이다.
넣어야 할부분과 과감히 없애야 할 부분을 구분해 내는 능력이 프로로 가는 길이지 싶다. 필요 없는 부분을 잘 정리하여 주제에 충실한 한 컷의 사진과 수필 한 점에 우리는 감동한다. 추운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원하는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너무 쉽게 무엇이든 얻으려 하는 나를 뒤돌아보게 되었다.
3시가 넘어서 먹은 점심 한 끼로 오늘 세끼의 식사를 한꺼번에 해결했다. TV에선 WBC 세계야구대회에서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을 우리나라가 이기고 있었고 식사가 끝날 무렵엔 미국을 넘어 4강에 안착하였다. 우리나라 야구보다 수준이 한 수가 위인 일본과 미국을 이기려고 열심히 준비한 우리나라 선수들의 감격적인 승리다.
남편의 그 많은 필름 속에 작품성이 있는 것은 몇 점이나 있을까? 그러나 한 점이 나온다 해도 그건 알맞은 구도를 이미 짜 놓은 채 어울리는 기상변화를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야구에서처럼 아주 좋은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남편은 아마 많이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올 때마다 좋은 작품을 얻는다면 누가 사진을 찍지 않겠느냐고 오히려 날 위로하며 현상한 사진을 몇 번이고 바라보며 내년엔 어떻게 포인트를 잡을 것인지 준비하고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마음에 꼭 드는 사진을 찍어낼 것이다. 옛날 마이산 사진을 근사하게 찍었던 것처럼…….
(96.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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