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황금어장 미얀마

2006.03.31 08:40

조명택 조회 수:114 추천:43

복음의 황금어장 미얀마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중) 조명택



남녀복장이 따로 없는 나라, 론지라는 치마를 걸치고 다니는 나라 미얀마. 어린이나, 청년, 어른도 같은 복장만을 아직도 고집하는 나라 미얀마, 그 치마 속은 알몸이지만 불편함도 부끄러움도 안 느끼는 나라, 남자도 앉아서 소변을 보아야하고, 혹 여성들 앞에서 발기라도 한다면 부끄러움을 면하려고 뒤돌아서야 하는 나라, 나는 그곳 미얀마가 복음의 황금어장임을 보았다.

미얀마에서 가정교회의 준공예배에 참석하였다. K선교사님과 우리 일행은 행사가 끝날 무렵 음식을 나누고 있을 때 도착하였다. 선교사님의 안전을 위하여 처음부터 참석할 수 없는 환경이 안타까웠지만 나눔의 기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음식을 먹고 있었으며, 성도들은 우리일행을 2층에서 환영하여 주었다. 150여명을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며 준공을 기념하는 성도들의 모습은 천사와도 같았다. 음식은 닭죽이었으며, 반찬은 마르게 볶은 한두 가지였다. 맛있게 먹는 그들에게는 부족함이나 불만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모두들 만족해하고 있었다. 대성황을 이루는 행사를 바라보니 그 비용이 궁금하였다. 3만원으로 모든 준비를 했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비용으로 기쁨을 안겨줄 수 있는 그곳이야말로 분명 복음의 황금어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J선교사님이 운영하는 기숙사를 방문하였다. 대지 3,000평에 건평 300평이었다. 운동장까지 만들어진 기숙사에 총 1억 원을 투자하였다고 했다. 지도하는 교사와 직원이 10명이었으며, 학생들은 중학교에 해당하는 5학년이 18명, 7학년이 18명이었다.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양육하고 있었다. 그들은 학교교육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기숙사로 돌아와 숙식을 제공받는다. 학생들을 모집할 때 너무 지원자가 많아 우수학생만을 선발하였다고 하였다. 주일이었으므로 학생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학생들은 학년별로 앞에서 특별찬양을 드렸다. 목소리가 우렁찼다.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부끄러워하거나 어색해 하는 학생은 눈에 띄지 않았다. 선교사님이 현지어로 설교를 하시자 아멘! 아멘! 하며 화답하는데 성령이 역사하시는 불붙은 도가니였다.
예배를 마치고 선교사님께서 우리일행을 소개하더니 학생들에게 악수를 하라고 하였다. 그 순간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통역을 부탁하며 단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나를 소개하고 미얀마에 온 목적을 설명한 뒤 그들에게 하나님과 더불어 키울 수 있는 꿈들을 설명해주었다. 모든 아이들의 시선은 집중되었으며 내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전하시려고 나 같은 부족한 종을 사용하고 계셨다. 끝나고 문 앞에서 아동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안아주기도 하고 등도 다독여주며 기쁜 만남을 나누었다. 그들의 빛나는 눈동자와 밝은 표정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셨다.
"이곳에 들어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라고……."
학생들과 악수를 마치자 선교사 사모님께서 곁으로 오더니, 선교사님이 설교한 내용과 똑 같은 내용을 소개하였다고 칭찬하였다. 나는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선교사님의 설교를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한 제가 어떻게 같은 내용을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셨지요."라고 대답하였다.
기숙사 운영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보니 학생들의 월 양육비는 1만원이었으며, 한 끼 식사비용은 100원이었다. 10명의 교사급여까지 월 1백만 원이면 운영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월 1만원으로 한 아동을 양육할 수 있는 그곳이야말로 복음의 황금어장이라고 확신되었다.

전국남전도회 회장 신신우 장로님과 명예회장 이재천 장로님, 총무 김영진 장로님과 함께 두 번째로 미얀마를 방문하였다. 교회를 세우기 위한 방문이었으므로 선교사님들의 안내를 받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수많은 선교지를 찾아다녔다. 안내 받은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셨으며, 결국 한해에 17개소의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그중 내가 소속되어 있는 전주노회 남전도회연합회에서도 병원1동, 고아원 1동 교회 4개소를 건축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6개소를 계획하고 기도했었다. 출국하기 하루 전에 메일로 현황을 현지로부터 받으니 9개소였다. 6개소를 선정하도록 150%의 현황을 받아든 신신우 회장님은 임원회의를 소집하고 9개소 모두를 지원하기로 확정하고 출국하였다. 미얀마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기도 전에 호텔로비에서 E선교사님께서 지원현황을 설명하시는데 12개소를 소개하고 있었다. 밤에 기도하신 신신우 회장님과 임원들은 요청 받은 곳을 모두 품에 안으셨다. 당시는 이해되지 않았다. 지원 받을 현황이 날마다 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성령께서 이끌고 계셨던 듯싶다.

우리 일행은 새벽에 일어나면 한곳에 모여 신 회장님과 명예회장님의 인도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구했다. 전국 임원들은 이 시대에 찾아보기 드물게 믿음이 좋은 어른들이셨으며,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고 계시는 분들이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전폭적으로 맡기고 의지하며 선교지를 탐방하는 모습에서 작은 예수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 분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분량은 많은 교회를 세우고도 남을 큰 믿음이었다. 나는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고 계심을 볼 수 가있었다.

처음에 방문할 때는 4월이어서 40도를 오르내리는 찜통더위였다. K선교사님의 차량이 20년도 넘은 차량이어서 에어컨이 작동되지 않아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며 다녔는지 모른다. 소개받은 E선교사님은 45년 식 미국산 찦차를 타고 다녔다. 차량의 모든 계기판은 작동되지 않았다. 어쩌다 에어컨이 들어온 차량을 타게 되는 날은 숨을 제대로 쉬었다. 전국 임원들과 방문한 8월에는 우기여서 날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6개월 내내 비가 내리지만 그곳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잘 견디고 있었다.
전국 임원들은 먼저 귀국하고 나는 남아서 건축할 교회들을 확인하러 다녔다. 하루는 고아원 신축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다른 K선교사의 안내를 받았다. 모비라는 곳에 도착하여 도로에 차를 세운 다음 바지를 걷어올리고 손에는 우산을 들고 마을에 들어서니 모든 집들이 물에 잠겨 있었다. 진입로도 물에 잠겼다. 울타리와 수목들과 집들만 물위에 떠 있었다. 집들은 목재기둥으로 지면에서 1m이상 높이에 마루를 깔고 그 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벽들은 대부분 대나무 껍질로 망을 떠서 막았고 지붕은 간혹 양철지붕이 보였다.

캄보디아 동양 최대 호수인 톤레샆의 수상마을같이 물위에 떠있는 그런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눈뜨고는 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입고 있는 옷가지도 남루하고, 굶주려서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연약함은 겨울나무들의 앙상한 모습을 연상케 하고 있었다. 무릎까지 물에 잠긴 골목길을 따라 한참 걸어가니 비어있는 허술한 집이 눈에 들어왔다. 헐어버리고 새로 건축하여 고아원을 운용하고 싶다고 했다. 땅을 사서 건물을 지어주면 고아원을 운영할 수 있단다. 그리고 월 13만 원 정도면 10명의 고아들을 양육할 수 있다고 하였다.
복음을 전하는데 고아들에게는 아무런 장애물도 없다. 그들에게는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면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한다면 100% 복음을 받아드리겠다 싶은 생각이 들자, 그 자리에서 지원을 약속하였다. 천하만물보다 귀한 것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천하를 하나만 얻어도 놀라운 일인데 월 10여 만 원으로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을 많이 구원할 수 있는 그 환경은 분명 복음의 황금어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2월에 혼자 방문하였을 때는 공항 앞에 있는 호텔에 짐을 풀었다. E선교사님과 K선교사님이 안내계획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다음날 두 분 모두가 다른 일정이 잡혀있다면서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속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하였지만 미소로 그들을 돌려보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 나를 단단히 훈련시킬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무릎을 꿇었다.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동안 기도하는 중에 "환경은 극복할 수 있다."라는 지혜로 응답하셨다.
군대생활을 통하여 '생존'이라는 과목을 교육하며 실습하였던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인적도 시설도 없는 산골짜기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아오지 않았던가? 도심지에서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려니 싶었다. 나는 "환경은 극복할 수 있다."를 되풀이하며 다짐하고 있는데 불현듯 8월에 방문하였을 때 만났던 전주에서 들어온 이 사장이 생각났다. 한인교회 윤 목사님께 연락처를 받아서 전화를 하였더니 다음날 데리러 온다고 하였다.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깊은 산 속에서 구원자를 만나는 느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홀로 두지 않으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날은 이 사장의 안내를 받아 수도인 양곤시내를 관광하며 그들의 문화와 생활상을 돌아보았다. 도심지의 상가마다 위생시설이 열악하였으며, 거리마다 노점상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 노점상에서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로 볶아서 파는 음식과 국수 정도였는데 가까이 가서보니 도저히 먹을 수 없어 보였다. 선교사님들의 노점상 음식은 사먹으면 안 된다는 주의를 받지 않았다면 먹어보고 싶었다. 선교사님들과 다녔던 곳과는 다른 새로운 환경으로 안내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계셨다. 저녁에 호텔에 돌아와 혼자가 되자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혼자 시내를 구경하고 싶었다. 낮에 다니며 기록하였던 수첩을 보고 계획을 세웠다. 도심지와는 먼 거리에 호텔이 있었으므로 택시기사와 요금을 흥정하고 시내에 나가서 밤거리를 구경한 다음 무사히 숙소로 돌아왔다. 어젯밤과 같이 "환경을 극복할 수 있다."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 그러나 그 날 외침에는 승리의 미소가 넘쳤다.

2일째부터는 바쁘게 움직였다. 완공된 교회들을 찾아다녔고 선교지 현장들을 순회하였다. 모두들 열심히 하고 있었다. 잘하고 있는 곳을 안내하기도 하겠지만 현지인들의 시선에서 배우고 받아들이려는 모습들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하루는 K선교사의 안내로 2시간 거리의 똥세라는 도시를 찾았다. 전기사정이 좋지 않은 도시였다. 도로에 줄지어 차려진 노점상들은 촛불을 사용하고 있었다. 가정집들도 일일 2-4시간 정도의 전기만을 공급받고 있었다. 안내된 집은 200평 대지에 35평 2층 판잣집이었다. 젊은 두 부부가 환영해주었다. K선교사가 파송한 현지인들이었다. 세 들어 살면서 매주 1박 2일씩 선교사님한테 훈련을 받아 주위의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이었다.
집세와 생활비를 포함하여 월 3만원을 지원하고 있었으며 그들 때문에 수만 명이 살고 있는 그 도시를 복음을 전하려는 단계에 있다고 하였다. 미얀마 대부분의 선교사역장이 수도인 양곤에 있는 현지 사정을 감안하면 그곳은 성경의 원리를 적용하는 선교지였다. 선교사님은 북으로, 북으로의 복음 확장계획을 설명하며 이곳이 중간 선교센터로 적합한 곳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얼마 전부터 이곳을 센터가 되도록 기도하고 있다고 하였다. 토지나 건물, 위치 등이 선교센터로서의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서도 성령은 나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결국 새순교회 이병록 목사님의 도움으로 300만원에 그 집을 구입하여 주었다. 기도의 응답이라며 무척 좋아했다. 그들이 기뻐하니 나도 기뻤다. 하나님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항상 채워주시는 분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곳에서 1시간 더 떨어진 북쪽에 위치한 조빙가웃 이라는 소도시에도 가정교회를 150만원에 구입할 수 있었다. 할렐루야!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직항로가 개설되지 않아 방콕을 경유하여야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 미얀마, 비자를 받아야 입국할 수 있고, 3개월에 한 번씩 출국하여 다시 상용비자를 발급 받아야 하는 곳 미얀마, 말라리아의 위험이 많고, 아직도 청소년들이 거리에서 아편을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라 미얀마, 1948년 1월 4일에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하였으나 아직도 군사정권에 의하여 과도기정부인 나라 미얀마, 인구 88%가 소승 불교도이며, 135개 종족이 242개 언어로 살아가고 있는 나라 미얀마, 농업이 58%이며 제조업과 공업은 17%인 나라 미얀마, 의료수준도 열악하여서 한국인들은 국내에서 무보험 수준의 진료비를 부담하여야 하는 나라 미얀마, 선교사 활동이 노출되면 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강제로 영구 출국시키는 나라인 미얀마이지만, 성령께서는 복음의 황금어장이라며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