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나선 봄 사냥
2006.04.11 19:03
혼자 나선 봄 사냥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유영희
"당신 내려주고 내장산에 갈래요. 그 다음 어디로 갈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요. 오늘 넘기지 않고 돌아 올 거니까 기다리지도 말고, 전화도 하지 마세요." 예배 후 급한 약속이 있어 집에도 들리지 못한다는 남편에게 문득 혼자 봄 사냥을 가겠다고 통보하였다.
예배를 마치자 곧바로 지난 밤 가슴을 들뜨게 하였던 여행길에 올랐다. 아침 일찍 남편은 김밥 전문점을 다녀 왔나보다. 차안에서 솔솔 풍기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며 마른침을 삼키게 한다. 아내를 생각해주는 남편이 진정으로 고마웠다.
전주에서 금산사 가는 길을 달렸다. 벚꽃은 끄트머리만 살짝 하얀 꽃잎을 내비치고 있었고 다닥다닥 달려있는 꽃망울들은 마치 프라이팬에서 튀겨지기 직전의 옥수수 알갱이 같았다. 성급한 알갱이는 그새 입을 활짝 벌린 팝콘이 되어있는데 대부분은 열기가 조금 더 필요하다며 열 듯 말 듯, 애매한 미소를 띠고 있다. 며칠만 지나면 벚나무 가지 위에는 눈처럼 하얗게 튀겨진 팝콘이 소복소복 달려 있으리라. 활짝 열어제치는 웃음도 아름답지만 웃을 듯 말 듯한 미소가 더 은근하고 도발적인 유혹으로 다가왔다.
내장산으로 가는 국도로 들어섰다. 지나다가 마음을 사로잡는 풍경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그 앞에 차를 세웠다. 살구꽃인가? 작은 나무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하얀 꽃잎이 미완의 봄을 완성하려는 의지처럼 보였다. 목련은 담 안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매여 있었나 보다. 자목련보다 백목련이 훨씬 우아하다고 생각하며 길가에 핀 목련꽃 아래서 '4월의 노래'를 불러보고 다시 길을 떠났다.
내장사로 가는 길에서 갑자기 퍼붓는 비를 만났다. 새로 난 길로 가지 않고 일부러 내장 저수지를 끼고 돌았다. 벚꽃이 만개하여 병풍처럼 저수지를 끌어안고 있었다. 이제 막 핀 듯 비에도 꽃잎은 스러지지 않았다.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이 눈에 띤다. 저들이 낚으려는 것이 봄인지, 세월인지 궁금해진다. 내장사로 들어가지 않고 곧 바로 백양사로 가는 산길로 향했다. 설익은 봄임을 아는지 의외로 상춘객이 드물어 호젓하다.
급경사에 급커브 길을 몇 구비 돌아 추령다리를 건넜다. 파라솔을 세워놓고 차를 파는 노점 앞에 어렵사리 차를 세웠다. 한 잔에 천 원하는 커피 값이 비싸다는 생각보다 산 정상에서 차 한 잔의 여유를 제공해 준 여인이 고맙다. 내장사가 내려다보이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내장산은 아직 초봄이다. 까마득히 멀어 보이는 주차장에 활짝 핀 벚꽃이 하얗게 눈에 들어오건만 아기 단풍은 손을 펼치기 직전이다. 손가락을 쫙 펼친 단풍보다 이제 막 피어나는 단풍이 한없이 곱다.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기를 보는 기분이다. 비와 함께 부는 바람이 의외로 차다.
다시 차를 몰아 장군봉 아래에 있는 작은 산장을 찾았다. 몇 년 전 그곳엔 노천명 시인의 '사슴'을 연상케 하는 젊은 여자가 살고 있었다. 등산로를 따라 한참 들어와야 하는 곳에 위치한 산골식당에 어울리지 않는 수려한 미모를 지닌 여자였다. 언젠가 점심을 먹고 평상에 앉아 앞산을 마주보며 그녀의 삶터에 부러움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잠깐 왔다 가는 것과 여기에서 몸을 묻고 사는 것은 달라요. 눈만 내리면 갇히기 일쑤고, 너무 답답해요." 갈라진 목소리를 기억하며 그녀의 희고 긴 얼굴과 사슴 닮은 눈을 다시 보길 기대하였다. 낯선 여인이 고개를 내밀며 그녀는 진즉 도시로 떠났다고 알려주었다. 내가 소유하고 싶던 조건이 그녀에게는 벗어버리고 싶은 굴레였던 모양이다.
순창군 복흥면을 거쳐 백양사로 들어섰다. 들어가는 입구의 벚꽃은 만개한 상태. 단풍은 여전히 꼼지락 꼼지락 손가락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절 가까운 곳에 차를 세우고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길옆에 위치한 전통 찻집에서 독경소리가 들려왔다. 아침 예배를 마치고 달려온 크리스천의 귓가에 독경 소리가 무던히도 아늑했다. 기독교가 추구하는 사랑과 불교의 자비가 화합을 이룬 것일까? 멈추어 선 채 한참 듣고 있으려니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이 화음을 넣어 주었다.
바위틈에 이름 모를 야생화가 보랏빛 꽃을 피우고 있었다. 여린 몸뚱이가 어떻게 바위틈에 자리를 잡았는지 생명의 경이를 느꼈다. 계곡에는 맑은 물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물고기들의 몸짓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언제까지라는 구속도 없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나는 너무도 편안하다. 어디든 멈추고 싶은 곳에서 발을 세우고, 눈길을 던지고 싶은 곳에서 마음을 놓는다.
남편이 준비해준 김밥을 차안에서 먹는다. 혼자 하는 여행도 결코 외롭지 않건만 지금껏 나는 왜 그리 두려워했을까? 혼자라는 것을 견디지 못해 끊임없이 사람을 찾고, 그러다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아왔었다. 이미 내 것으로 존재하는 여유는 발견할 줄 모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가다 서다 하였지만 출발한지 벌써 다섯시간이 지났다. 체력의 한계를 느낄 때, 피로가 엄습해왔다. 다른 곳으로 가고자 하는 잠깐의 고민을 접고 집에 도착하니 오후 네시가 넘었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는 포만감과 달콤한 피로가 함께 했던 봄 사냥이었다. (06. 4. 11.)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유영희
"당신 내려주고 내장산에 갈래요. 그 다음 어디로 갈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요. 오늘 넘기지 않고 돌아 올 거니까 기다리지도 말고, 전화도 하지 마세요." 예배 후 급한 약속이 있어 집에도 들리지 못한다는 남편에게 문득 혼자 봄 사냥을 가겠다고 통보하였다.
예배를 마치자 곧바로 지난 밤 가슴을 들뜨게 하였던 여행길에 올랐다. 아침 일찍 남편은 김밥 전문점을 다녀 왔나보다. 차안에서 솔솔 풍기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며 마른침을 삼키게 한다. 아내를 생각해주는 남편이 진정으로 고마웠다.
전주에서 금산사 가는 길을 달렸다. 벚꽃은 끄트머리만 살짝 하얀 꽃잎을 내비치고 있었고 다닥다닥 달려있는 꽃망울들은 마치 프라이팬에서 튀겨지기 직전의 옥수수 알갱이 같았다. 성급한 알갱이는 그새 입을 활짝 벌린 팝콘이 되어있는데 대부분은 열기가 조금 더 필요하다며 열 듯 말 듯, 애매한 미소를 띠고 있다. 며칠만 지나면 벚나무 가지 위에는 눈처럼 하얗게 튀겨진 팝콘이 소복소복 달려 있으리라. 활짝 열어제치는 웃음도 아름답지만 웃을 듯 말 듯한 미소가 더 은근하고 도발적인 유혹으로 다가왔다.
내장산으로 가는 국도로 들어섰다. 지나다가 마음을 사로잡는 풍경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그 앞에 차를 세웠다. 살구꽃인가? 작은 나무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하얀 꽃잎이 미완의 봄을 완성하려는 의지처럼 보였다. 목련은 담 안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매여 있었나 보다. 자목련보다 백목련이 훨씬 우아하다고 생각하며 길가에 핀 목련꽃 아래서 '4월의 노래'를 불러보고 다시 길을 떠났다.
내장사로 가는 길에서 갑자기 퍼붓는 비를 만났다. 새로 난 길로 가지 않고 일부러 내장 저수지를 끼고 돌았다. 벚꽃이 만개하여 병풍처럼 저수지를 끌어안고 있었다. 이제 막 핀 듯 비에도 꽃잎은 스러지지 않았다.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이 눈에 띤다. 저들이 낚으려는 것이 봄인지, 세월인지 궁금해진다. 내장사로 들어가지 않고 곧 바로 백양사로 가는 산길로 향했다. 설익은 봄임을 아는지 의외로 상춘객이 드물어 호젓하다.
급경사에 급커브 길을 몇 구비 돌아 추령다리를 건넜다. 파라솔을 세워놓고 차를 파는 노점 앞에 어렵사리 차를 세웠다. 한 잔에 천 원하는 커피 값이 비싸다는 생각보다 산 정상에서 차 한 잔의 여유를 제공해 준 여인이 고맙다. 내장사가 내려다보이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내장산은 아직 초봄이다. 까마득히 멀어 보이는 주차장에 활짝 핀 벚꽃이 하얗게 눈에 들어오건만 아기 단풍은 손을 펼치기 직전이다. 손가락을 쫙 펼친 단풍보다 이제 막 피어나는 단풍이 한없이 곱다.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기를 보는 기분이다. 비와 함께 부는 바람이 의외로 차다.
다시 차를 몰아 장군봉 아래에 있는 작은 산장을 찾았다. 몇 년 전 그곳엔 노천명 시인의 '사슴'을 연상케 하는 젊은 여자가 살고 있었다. 등산로를 따라 한참 들어와야 하는 곳에 위치한 산골식당에 어울리지 않는 수려한 미모를 지닌 여자였다. 언젠가 점심을 먹고 평상에 앉아 앞산을 마주보며 그녀의 삶터에 부러움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잠깐 왔다 가는 것과 여기에서 몸을 묻고 사는 것은 달라요. 눈만 내리면 갇히기 일쑤고, 너무 답답해요." 갈라진 목소리를 기억하며 그녀의 희고 긴 얼굴과 사슴 닮은 눈을 다시 보길 기대하였다. 낯선 여인이 고개를 내밀며 그녀는 진즉 도시로 떠났다고 알려주었다. 내가 소유하고 싶던 조건이 그녀에게는 벗어버리고 싶은 굴레였던 모양이다.
순창군 복흥면을 거쳐 백양사로 들어섰다. 들어가는 입구의 벚꽃은 만개한 상태. 단풍은 여전히 꼼지락 꼼지락 손가락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절 가까운 곳에 차를 세우고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길옆에 위치한 전통 찻집에서 독경소리가 들려왔다. 아침 예배를 마치고 달려온 크리스천의 귓가에 독경 소리가 무던히도 아늑했다. 기독교가 추구하는 사랑과 불교의 자비가 화합을 이룬 것일까? 멈추어 선 채 한참 듣고 있으려니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이 화음을 넣어 주었다.
바위틈에 이름 모를 야생화가 보랏빛 꽃을 피우고 있었다. 여린 몸뚱이가 어떻게 바위틈에 자리를 잡았는지 생명의 경이를 느꼈다. 계곡에는 맑은 물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물고기들의 몸짓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언제까지라는 구속도 없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나는 너무도 편안하다. 어디든 멈추고 싶은 곳에서 발을 세우고, 눈길을 던지고 싶은 곳에서 마음을 놓는다.
남편이 준비해준 김밥을 차안에서 먹는다. 혼자 하는 여행도 결코 외롭지 않건만 지금껏 나는 왜 그리 두려워했을까? 혼자라는 것을 견디지 못해 끊임없이 사람을 찾고, 그러다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아왔었다. 이미 내 것으로 존재하는 여유는 발견할 줄 모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가다 서다 하였지만 출발한지 벌써 다섯시간이 지났다. 체력의 한계를 느낄 때, 피로가 엄습해왔다. 다른 곳으로 가고자 하는 잠깐의 고민을 접고 집에 도착하니 오후 네시가 넘었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는 포만감과 달콤한 피로가 함께 했던 봄 사냥이었다. (06.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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