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비 오는 날의 보고서
2006.04.17 19:53
어느 봄비 오는 날의 보고서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중) 이민숙
새벽부터 봄비가 간질이듯 창문을 두드린다. 어제는 불현듯 찾아와서 미처 대처할 새도 없이 날 순식간에 포위했다. 오늘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맞이할 태세를 하니, 내 모습이 당당하고 새삼 그가 반갑기조차 하다. 준비 없이 무료하게 보내버린 게 어제였지만, 다시 그 봄비가 찾아온다면 같이 잘 지낼 방법을 연구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기회는 바로 찾아왔다. 오늘 또 그 봄비가 온 것이다.
_1단계
FM에서는 비와 관련된 곡들이 간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Rhythm of the rain
Rain and tears
Rain…….
보통 비를 눈물이라고 표현한다. 하늘의 흠집에서, 마음의 상처에서, 사랑의 슬픔 때문에 가슴에서 짜내는 생채기의 아픔을 눈물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비가 꼭 눈물의 대명사로 낙인찍혀야만 할까.
비는 마음의 갈증을 식혀주는 냉각제가 될 수도 있다. 극도로 고조된 감정을 해소시켜주는 카타르시스. 열정이 지나칠 때 가라앉게 해주는 진정제. 이처럼 구원의 약이라고 표현하더라도 잘 어울린다. 그래도 눈물과 비의 등식을 깨기엔 어딘가 부족하다.
이제 나이 탓인 지 모국어로 부르는 우리 가요가 더 쉽게 마음에 와 닿는다. 가사 하나 하나마다에 인생여정의 묘미가 있고 모두가 내 얘기인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단계 없이 공감이 빠르게 간다. 이렇게 비 오는 날이면 더욱 초고속의 느낌이 온다.
우순실의 '잃어버린 우산'
누군가의 '창밖엔 비'
그 중에서도 오늘은 김추자의 '봄비'가 더 어울리는 날이다.
봄비, 봄비, 봄비…….
-2단계
너무 늘어진다, 지금쯤이 전환점을 찍을 시각. 창문을 열어 손으로 오늘의 주인공인 비를 맞는다. 손끝으로부터 감촉이 전해져 온다.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고 신선하다. 움츠러들던 세포가 살아나고 생기가 돈다. 더 가까이 접해 보고 싶은 호기심이 인다. 밖으로 나가야겠다.
-3단계
자제하던 커피도 오늘은 예외. 잔을 들고 문 밖으로 나오니 기분이 한결 업그레이드 된다. '여자는 청각적이고 남자는 시각적'이라던가. 가만히 듣는 느낌과 직접 부딪쳐서 보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한결 또렷하고 정리가 되어 간다. 이왕이면 개나리, 산수유 닮은 샛노란 우산을 쓰자. 한 방울 한 방울 빗소리의 속삭임을 들으며 한 줄기 한 줄기 빗줄기의 리듬을 나도 같이 타 보자. 그래서 단순 반복되는 몰입의 세계로 빠져 버리고 싶다.
-4단계
이제 대문 밖이다. 일부러 땅바닥에 붙여 놓은 듯한 민들레도 오늘은 허리를 펴고 있다. 대책 없이 추해가던 목련꽃도 오늘은 숨을 수 있어 편하겠다. 뾰족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어린 풀잎이 간지럼을 타듯 갸웃거리니 그 고개가 앙증맞다. 화려한 시절은 끝났다고 투덜거리며 몇 개씩 떨어지는 벚꽃 무리는 퇴장하는 장면마저 환상적이다.
그렇게 한동안 비 때문에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었다. "행복이란 가장 가까운 것과 가장 잘 지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행복의 조건'이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에 있다고 한다. 오늘 난 봄비 때문에 삶의 교훈을 느꼈다. 행복하다는 것은 이처럼 자연과 내가 동화되어 '하나가 됨'을 느끼는 단순한 것에 있다는 진리를.
너무 세차게 가슴을 때려 그 기에 눌려 꿈쩍도 못하게 하는 여름비와는 다르다. 부질없는 낙엽을 만들어서 쓸쓸한 고독감만 느끼게 해주는 짓궂은 가을비와도 다르다. 부푼 맘으로 기다리는 눈 대신 불쑥 찾아 온 눈치 없는 겨울비와는 더더욱 다르다. 수줍은 듯 살며시 임 가까이 다가가고픈 새색시처럼 은근히 마음을 적시며 내리는 이 가랑비, 꽃비, 봄비라야 내가 주체가 되어 맛볼 수 있다. 1시간여 정도의 여유를 빗속에서 비의 운율에 따랐다.
-5단계
비 오는 날 운전은 꺼리는 편인데 오늘은 용기를 냈다. 시동을 켜고 와이퍼는 1단으로 작동하도록 하고 빗속으로 들어갔다. 차창 앞에서 살며시 노크하는 봄비가 새삼 예의 바르다. 구겨진 휴지처럼 집안에서 위축돼 있지 말고 이렇게 나와서 바라보고 마주하며 느끼면 되는 것을. 지금까진 왜 외면하고 피하려고만 했는지 아쉽다. 저 잘난 태양 앞에서라면 늘어져 있을 신경이 상큼하다. 의식이 싱싱하다. 그렇다면 오늘 난 비와의 기 싸움에서 승리한 셈인가. 하지만 내일 또다시 비가 계속 온다면 무장을 해제하고 승리를 포기하는 게 낫겠다. 오늘 긴장되고 집중한 나머지 근육이 초긴장상태이다. 이제 느긋이 근육을 이완시키고 모른 척하리라. 하지만 '내일'이 되어야만 확실한 것이지 어찌 감히 장담할 수 있으랴.
-6단계
봄비가 잔잔하게 하루 종일토록 내렸다. 해가 있는 날이라면 지금쯤, 오늘의 노을 빛이 그립고 궁금해질 시간이다. 오늘은 거꾸로 아침의 커피와 순서를 바꿔 지금 녹차를 마신다. 요즈음 읽고 있는 '마시멜로 이야기'를 마저 펼쳐들었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먼 인생여정을 슬기롭게 연마할 수 있는 길을 알게 해 주는 책이다. 순간의 만족에 빠지지 않고, 당장 달콤한 마시멜로를 먹어 치우는 유혹을 참아낸 자만이 진정한 결실을 얻을 자격이 있다는 교훈을 준다. 그동안 일상의 편안함에 안주하며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는 않았는지 새삼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오늘 하루 내내 만끽했던 감성을 이젠 잠재우고, 지금부터는 다시 이성의 날을 세워야겠다. 그래야 오는 '내일' 은 가는 '오늘' 과는 다른 특별한 날이 될 테니까.
(2006. 4. 18.)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중) 이민숙
새벽부터 봄비가 간질이듯 창문을 두드린다. 어제는 불현듯 찾아와서 미처 대처할 새도 없이 날 순식간에 포위했다. 오늘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맞이할 태세를 하니, 내 모습이 당당하고 새삼 그가 반갑기조차 하다. 준비 없이 무료하게 보내버린 게 어제였지만, 다시 그 봄비가 찾아온다면 같이 잘 지낼 방법을 연구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기회는 바로 찾아왔다. 오늘 또 그 봄비가 온 것이다.
_1단계
FM에서는 비와 관련된 곡들이 간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Rhythm of the rain
Rain and tears
Rain…….
보통 비를 눈물이라고 표현한다. 하늘의 흠집에서, 마음의 상처에서, 사랑의 슬픔 때문에 가슴에서 짜내는 생채기의 아픔을 눈물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비가 꼭 눈물의 대명사로 낙인찍혀야만 할까.
비는 마음의 갈증을 식혀주는 냉각제가 될 수도 있다. 극도로 고조된 감정을 해소시켜주는 카타르시스. 열정이 지나칠 때 가라앉게 해주는 진정제. 이처럼 구원의 약이라고 표현하더라도 잘 어울린다. 그래도 눈물과 비의 등식을 깨기엔 어딘가 부족하다.
이제 나이 탓인 지 모국어로 부르는 우리 가요가 더 쉽게 마음에 와 닿는다. 가사 하나 하나마다에 인생여정의 묘미가 있고 모두가 내 얘기인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단계 없이 공감이 빠르게 간다. 이렇게 비 오는 날이면 더욱 초고속의 느낌이 온다.
우순실의 '잃어버린 우산'
누군가의 '창밖엔 비'
그 중에서도 오늘은 김추자의 '봄비'가 더 어울리는 날이다.
봄비, 봄비, 봄비…….
-2단계
너무 늘어진다, 지금쯤이 전환점을 찍을 시각. 창문을 열어 손으로 오늘의 주인공인 비를 맞는다. 손끝으로부터 감촉이 전해져 온다.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고 신선하다. 움츠러들던 세포가 살아나고 생기가 돈다. 더 가까이 접해 보고 싶은 호기심이 인다. 밖으로 나가야겠다.
-3단계
자제하던 커피도 오늘은 예외. 잔을 들고 문 밖으로 나오니 기분이 한결 업그레이드 된다. '여자는 청각적이고 남자는 시각적'이라던가. 가만히 듣는 느낌과 직접 부딪쳐서 보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한결 또렷하고 정리가 되어 간다. 이왕이면 개나리, 산수유 닮은 샛노란 우산을 쓰자. 한 방울 한 방울 빗소리의 속삭임을 들으며 한 줄기 한 줄기 빗줄기의 리듬을 나도 같이 타 보자. 그래서 단순 반복되는 몰입의 세계로 빠져 버리고 싶다.
-4단계
이제 대문 밖이다. 일부러 땅바닥에 붙여 놓은 듯한 민들레도 오늘은 허리를 펴고 있다. 대책 없이 추해가던 목련꽃도 오늘은 숨을 수 있어 편하겠다. 뾰족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어린 풀잎이 간지럼을 타듯 갸웃거리니 그 고개가 앙증맞다. 화려한 시절은 끝났다고 투덜거리며 몇 개씩 떨어지는 벚꽃 무리는 퇴장하는 장면마저 환상적이다.
그렇게 한동안 비 때문에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었다. "행복이란 가장 가까운 것과 가장 잘 지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행복의 조건'이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에 있다고 한다. 오늘 난 봄비 때문에 삶의 교훈을 느꼈다. 행복하다는 것은 이처럼 자연과 내가 동화되어 '하나가 됨'을 느끼는 단순한 것에 있다는 진리를.
너무 세차게 가슴을 때려 그 기에 눌려 꿈쩍도 못하게 하는 여름비와는 다르다. 부질없는 낙엽을 만들어서 쓸쓸한 고독감만 느끼게 해주는 짓궂은 가을비와도 다르다. 부푼 맘으로 기다리는 눈 대신 불쑥 찾아 온 눈치 없는 겨울비와는 더더욱 다르다. 수줍은 듯 살며시 임 가까이 다가가고픈 새색시처럼 은근히 마음을 적시며 내리는 이 가랑비, 꽃비, 봄비라야 내가 주체가 되어 맛볼 수 있다. 1시간여 정도의 여유를 빗속에서 비의 운율에 따랐다.
-5단계
비 오는 날 운전은 꺼리는 편인데 오늘은 용기를 냈다. 시동을 켜고 와이퍼는 1단으로 작동하도록 하고 빗속으로 들어갔다. 차창 앞에서 살며시 노크하는 봄비가 새삼 예의 바르다. 구겨진 휴지처럼 집안에서 위축돼 있지 말고 이렇게 나와서 바라보고 마주하며 느끼면 되는 것을. 지금까진 왜 외면하고 피하려고만 했는지 아쉽다. 저 잘난 태양 앞에서라면 늘어져 있을 신경이 상큼하다. 의식이 싱싱하다. 그렇다면 오늘 난 비와의 기 싸움에서 승리한 셈인가. 하지만 내일 또다시 비가 계속 온다면 무장을 해제하고 승리를 포기하는 게 낫겠다. 오늘 긴장되고 집중한 나머지 근육이 초긴장상태이다. 이제 느긋이 근육을 이완시키고 모른 척하리라. 하지만 '내일'이 되어야만 확실한 것이지 어찌 감히 장담할 수 있으랴.
-6단계
봄비가 잔잔하게 하루 종일토록 내렸다. 해가 있는 날이라면 지금쯤, 오늘의 노을 빛이 그립고 궁금해질 시간이다. 오늘은 거꾸로 아침의 커피와 순서를 바꿔 지금 녹차를 마신다. 요즈음 읽고 있는 '마시멜로 이야기'를 마저 펼쳐들었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먼 인생여정을 슬기롭게 연마할 수 있는 길을 알게 해 주는 책이다. 순간의 만족에 빠지지 않고, 당장 달콤한 마시멜로를 먹어 치우는 유혹을 참아낸 자만이 진정한 결실을 얻을 자격이 있다는 교훈을 준다. 그동안 일상의 편안함에 안주하며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는 않았는지 새삼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오늘 하루 내내 만끽했던 감성을 이젠 잠재우고, 지금부터는 다시 이성의 날을 세워야겠다. 그래야 오는 '내일' 은 가는 '오늘' 과는 다른 특별한 날이 될 테니까.
(2006.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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