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선언
2006.04.25 09:10
행복선언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기초) 박성희
아침을 먹고 나서 남편은 "11시까지 밭으로 밥 좀 해가지고 나와." 그리고 차를 타고 나가 버렸다.
'갑자기 또 무슨 밥을 해 오라는지........'
요즘은 시골에서 일을 해도 집에서 밥을 하지 않고 식당에서 시켜 먹는 편한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시대를 거꾸로 사는지 기회만 되면 밥을 하라며 갑자기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여자들은 말만 하면 도깨비 방망이를 두드려서 밥이 생기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입에서 한 번 떨어진 말이니 울며 겨자 먹기로 밥을 해가야지 생각하고, 우선 쌀부터 씻어서 담가 놓고 냉장고를 차근차근 뒤져 돼지고기, 고등어, 조기,전어, 냉동실 안에 있는 것들을 차례대로 내놓았다. 또 텃 밭으로 나가 두릅과 머위 순도 따고, 파도 뽑아 가지고 들어 오니 전화 벨이 울렸다.
"밥 준비 다 됐어? 밥 좀 넉넉하게 해 가지고 와." 하고 끊었다.
슬슬 약이 오르고 짜증이 나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밥을 하라고 했던 것이 걱정은 됐었는지 전화로 확인해 본 것 같다.
"마음이 그 곳에 있지 아니하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네."
남편은 내가 새댁 때부터 싫어하거나 정성이 부족해 보이면 언제나 이 말 한 마디로 기선을 제압하기 때문에 어차피 해야할 거라면 "정성껏 하자." 생각하며 손을 부지런히 놀렸다.
땅속에 묻어둔 묵은 김치도 꺼내다가 돼지고기를 썰어 넣고 김치찌개를 끓이며, 고등어는 무우를 밑에다 깔고 빨갛게 졸여 놓고, 조기와 전어는 튀겨서 가져 가기로 했다. 두릅은 끓는 물에 살짝 데치는데 진한 두릅 향이 코 끝을 자극하며 기분까지 상쾌해 진다. 또 된장을 되직하게 쪄서 머위 순을 데쳐서 무쳐 놓고 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제 밑 반찬으로 깻잎,고춧잎, 꼬들빼기김치, 파김치, 묵은 김치 , 초 고추장도 타야 하고, 입 맛에 맞지 않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 새우젖과 김까지 준비하고 나니, 등에서 땀이 줄줄 흐른다.
'이 영감탱이 어디 두고 보자. 나중에 늙어서 힘 빠지면 밥도 안 차려 줄 테니.'
혼자 구시렁거리면서 빠진 게 없는지 살펴보고 커피와 물까지 챙겨 담았다. 또 전화벨이 울렸다.
"아직 11시 안 됐어? 술은 냉장고에 있는 것 가져와."
"알았어요. 지금 출발하려고 해요."
꽁하고 있던 마음은 금세 사라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가겠다고 약속해 버렸다. 밥을 차에 싣고 밭으로 가다가 보니 길가에는 민들레며 꽃잔디, 이름 모를 꽃들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복사꽃, 찔레꽃, 갖 가지 색의 제비꽃들이 오순도순 모여 어서 오라고 손짓하며 반겨 주었다.
남편은 일을 한다기보다 선후배들을 불러다가 밭에서 파티라도 벌이려는 모양이다. 엉겁결에 나도 그분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선배 한 분이 "오늘은 글 쓰러 안 가셨어요?"하고 물었다. 나는 쑥스럽고 창피하여 "아. 예!" 어물쩡 대답하고 멋적게 웃으며 밥을 차렸다.
'미운 놈이 어쩐다고.' 남편은
"내가 당신 글 쓰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야외에 나가서 밥 먹자고 했어." 자랑스럽게 나를 위해 밥을 하라고 한 것처럼 생색까지 낸다. 창피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작가라도 된 것처럼 남편은 뻐기며 자기도 따라 웃었다. 점심식사를 하는 동안 여기저기를 둘러 보며 작년 이쯤을 떠올렸다.
작년에는 남편이 밭에 가면 밭으로 따라갔고, 논에 가면 논으로 따라 다니며, 나물을 캐다가 삶아서 여기 저기 나누어 먹고, 쑥도 캐서 개떡도 쪄서 나눠 먹으며, 고사리도 끊고, 여러 가지 봄 나물로 비빔밥도 만들어서 이 사람 저 사람 불러 함께 먹었었다.
또 가을이 되면 여러가지 야생초들을 말려 두고 차로 끓여 먹었고, 그 중에 구절초는 그늘에 말려서 집안에 놓아 두면 겨우내 온 집안에 은은한 구절초향이 가득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올해는 글 바람이 들어 아무것도 못하고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다.
계절이 바뀌어 벌써 초여름으로 가고 있다. 날씨가 따뜻해지니 감자순도 올라왔고, 고추 모종도 꽤 자랐다. 들판에서는 여기저기 못자리를 만드느라 손들을 바쁘게 움직인다.
결혼 전 남편은 편지를 아주 잘 써서 언제나 두툼하게 편지를 보내주곤 했는데, 받을 때는 기분이 좋은데 답장을 쓰는 것이 어려워 늘 걱정이었다. 아무리 써보려 해도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어 끝을 찾을 수가 없었고 "안녕 하세요?"를 써 놓고 몇 날 며칠을 고민고민하다가 매번 전화로 답장을 했었다.
한 번은 미안한 마음에 예쁜 편지지에 "내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 라고 적어 보냈는데 남편은 이 편지가 무슨 뜻이냐며 우리 집으로 쳐들어 왔었다. 편지를 받아 보고 헤어지자고 하는 줄 알고 깜짝 놀라 쫓아 왔다고 했다.
나는 딱딱한 집안 분위기와 밖에도 잘 안 나가다 보니 순진하기만 했다. 친구들은 모두 나에게 천연 기념물 또는 걸어 다니는 도덕 책이라고 불렀었다.내가 남편을 좋아하게 된 것도 끝없이 보내는 편지와 해외연수를 가서 나를 생각하며 하나씩 고르고 골랐다며 작은 인테리어 소품들을 사가지고 왔기 때문이었다. 편지는 말로 전하는 것보다 더 믿음이 가게 만들었고, 그 사람을 자꾸 멋지게 보이게 했으며, 내용에는 사랑한다 좋아 한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뭔지 모르게 애타는그리움이 묻어나고,보고 싶다는 느낌을 그대로 전해 주었다. 내게 글 재주가 없었으니 더 멋져 보였겠지만, 내가 남편에게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살았던 것도 글 쓰는 재주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결심하였다. 그 동안 가족들의 시계에 맞추어 살았던 나를 잠시 접어두고, 지금부터 나를 위해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해 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하여 수필반에 도전장을 냈던 것이다.
2006년 봄은 작년과 같은 하늘을 보는데도 구름이 내게 말을 걸어 주며 흘러가고, 작년에 보았던 풀꽃인데도 더 아름답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을 다시 볼 수 있는 심안(心眼)을 갖게 되었다. 그동안 칙칙하고 무뚝뚝했던 나를 이 아름다운 세상으로 끌어내 준 것은 바로 수필이다. 나는 예쁜 마음과 부드러운 여자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아직은 글이라 볼 수는 없고 부끄럽지만 그래도 나는 수필과 자꾸 가까워지는 것 같아 늘 행복하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기초) 박성희
아침을 먹고 나서 남편은 "11시까지 밭으로 밥 좀 해가지고 나와." 그리고 차를 타고 나가 버렸다.
'갑자기 또 무슨 밥을 해 오라는지........'
요즘은 시골에서 일을 해도 집에서 밥을 하지 않고 식당에서 시켜 먹는 편한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시대를 거꾸로 사는지 기회만 되면 밥을 하라며 갑자기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여자들은 말만 하면 도깨비 방망이를 두드려서 밥이 생기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입에서 한 번 떨어진 말이니 울며 겨자 먹기로 밥을 해가야지 생각하고, 우선 쌀부터 씻어서 담가 놓고 냉장고를 차근차근 뒤져 돼지고기, 고등어, 조기,전어, 냉동실 안에 있는 것들을 차례대로 내놓았다. 또 텃 밭으로 나가 두릅과 머위 순도 따고, 파도 뽑아 가지고 들어 오니 전화 벨이 울렸다.
"밥 준비 다 됐어? 밥 좀 넉넉하게 해 가지고 와." 하고 끊었다.
슬슬 약이 오르고 짜증이 나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밥을 하라고 했던 것이 걱정은 됐었는지 전화로 확인해 본 것 같다.
"마음이 그 곳에 있지 아니하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네."
남편은 내가 새댁 때부터 싫어하거나 정성이 부족해 보이면 언제나 이 말 한 마디로 기선을 제압하기 때문에 어차피 해야할 거라면 "정성껏 하자." 생각하며 손을 부지런히 놀렸다.
땅속에 묻어둔 묵은 김치도 꺼내다가 돼지고기를 썰어 넣고 김치찌개를 끓이며, 고등어는 무우를 밑에다 깔고 빨갛게 졸여 놓고, 조기와 전어는 튀겨서 가져 가기로 했다. 두릅은 끓는 물에 살짝 데치는데 진한 두릅 향이 코 끝을 자극하며 기분까지 상쾌해 진다. 또 된장을 되직하게 쪄서 머위 순을 데쳐서 무쳐 놓고 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제 밑 반찬으로 깻잎,고춧잎, 꼬들빼기김치, 파김치, 묵은 김치 , 초 고추장도 타야 하고, 입 맛에 맞지 않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 새우젖과 김까지 준비하고 나니, 등에서 땀이 줄줄 흐른다.
'이 영감탱이 어디 두고 보자. 나중에 늙어서 힘 빠지면 밥도 안 차려 줄 테니.'
혼자 구시렁거리면서 빠진 게 없는지 살펴보고 커피와 물까지 챙겨 담았다. 또 전화벨이 울렸다.
"아직 11시 안 됐어? 술은 냉장고에 있는 것 가져와."
"알았어요. 지금 출발하려고 해요."
꽁하고 있던 마음은 금세 사라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가겠다고 약속해 버렸다. 밥을 차에 싣고 밭으로 가다가 보니 길가에는 민들레며 꽃잔디, 이름 모를 꽃들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복사꽃, 찔레꽃, 갖 가지 색의 제비꽃들이 오순도순 모여 어서 오라고 손짓하며 반겨 주었다.
남편은 일을 한다기보다 선후배들을 불러다가 밭에서 파티라도 벌이려는 모양이다. 엉겁결에 나도 그분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선배 한 분이 "오늘은 글 쓰러 안 가셨어요?"하고 물었다. 나는 쑥스럽고 창피하여 "아. 예!" 어물쩡 대답하고 멋적게 웃으며 밥을 차렸다.
'미운 놈이 어쩐다고.' 남편은
"내가 당신 글 쓰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야외에 나가서 밥 먹자고 했어." 자랑스럽게 나를 위해 밥을 하라고 한 것처럼 생색까지 낸다. 창피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작가라도 된 것처럼 남편은 뻐기며 자기도 따라 웃었다. 점심식사를 하는 동안 여기저기를 둘러 보며 작년 이쯤을 떠올렸다.
작년에는 남편이 밭에 가면 밭으로 따라갔고, 논에 가면 논으로 따라 다니며, 나물을 캐다가 삶아서 여기 저기 나누어 먹고, 쑥도 캐서 개떡도 쪄서 나눠 먹으며, 고사리도 끊고, 여러 가지 봄 나물로 비빔밥도 만들어서 이 사람 저 사람 불러 함께 먹었었다.
또 가을이 되면 여러가지 야생초들을 말려 두고 차로 끓여 먹었고, 그 중에 구절초는 그늘에 말려서 집안에 놓아 두면 겨우내 온 집안에 은은한 구절초향이 가득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올해는 글 바람이 들어 아무것도 못하고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다.
계절이 바뀌어 벌써 초여름으로 가고 있다. 날씨가 따뜻해지니 감자순도 올라왔고, 고추 모종도 꽤 자랐다. 들판에서는 여기저기 못자리를 만드느라 손들을 바쁘게 움직인다.
결혼 전 남편은 편지를 아주 잘 써서 언제나 두툼하게 편지를 보내주곤 했는데, 받을 때는 기분이 좋은데 답장을 쓰는 것이 어려워 늘 걱정이었다. 아무리 써보려 해도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어 끝을 찾을 수가 없었고 "안녕 하세요?"를 써 놓고 몇 날 며칠을 고민고민하다가 매번 전화로 답장을 했었다.
한 번은 미안한 마음에 예쁜 편지지에 "내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 라고 적어 보냈는데 남편은 이 편지가 무슨 뜻이냐며 우리 집으로 쳐들어 왔었다. 편지를 받아 보고 헤어지자고 하는 줄 알고 깜짝 놀라 쫓아 왔다고 했다.
나는 딱딱한 집안 분위기와 밖에도 잘 안 나가다 보니 순진하기만 했다. 친구들은 모두 나에게 천연 기념물 또는 걸어 다니는 도덕 책이라고 불렀었다.내가 남편을 좋아하게 된 것도 끝없이 보내는 편지와 해외연수를 가서 나를 생각하며 하나씩 고르고 골랐다며 작은 인테리어 소품들을 사가지고 왔기 때문이었다. 편지는 말로 전하는 것보다 더 믿음이 가게 만들었고, 그 사람을 자꾸 멋지게 보이게 했으며, 내용에는 사랑한다 좋아 한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뭔지 모르게 애타는그리움이 묻어나고,보고 싶다는 느낌을 그대로 전해 주었다. 내게 글 재주가 없었으니 더 멋져 보였겠지만, 내가 남편에게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살았던 것도 글 쓰는 재주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결심하였다. 그 동안 가족들의 시계에 맞추어 살았던 나를 잠시 접어두고, 지금부터 나를 위해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해 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하여 수필반에 도전장을 냈던 것이다.
2006년 봄은 작년과 같은 하늘을 보는데도 구름이 내게 말을 걸어 주며 흘러가고, 작년에 보았던 풀꽃인데도 더 아름답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을 다시 볼 수 있는 심안(心眼)을 갖게 되었다. 그동안 칙칙하고 무뚝뚝했던 나를 이 아름다운 세상으로 끌어내 준 것은 바로 수필이다. 나는 예쁜 마음과 부드러운 여자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아직은 글이라 볼 수는 없고 부끄럽지만 그래도 나는 수필과 자꾸 가까워지는 것 같아 늘 행복하다.
댓글 0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 274 | 조명택 수필가의 처녀수필집 <섬김의 향기> 출간에 부쳐 | 김학 | 2006.05.05 | 221 |
| 273 | 엎드려 세상 보기 | 정현창 | 2006.05.05 | 75 |
| 272 | 수필반 병아리들의 청 보리밭 나들이 | 박성희 | 2006.05.04 | 88 |
| 271 | 우리들의 특별한 하루 | 염미경 | 2006.05.04 | 64 |
| 270 | 철쭉은 초록잎이 있어서 더 붉다 | 정현창 | 2006.05.02 | 74 |
| 269 | 또 하나의 사랑 | 염미경 | 2006.05.02 | 72 |
| 268 | 희망의 꿈나무 | 유영희 | 2006.05.01 | 62 |
| 267 | 진달래 아줌마 | 염미경 | 2006.05.01 | 148 |
| 266 | 수필이 마라톤보다 좋은 다섯가지 이유 | 정현창 | 2006.04.30 | 120 |
| 265 | 물파스로는낫지 않는다 | 이종택 | 2006.04.30 | 66 |
| 264 | 청 보리밭에선 모두가 꿈을 꾼다 | 정현창 | 2006.04.29 | 72 |
| 263 | 아름다운 착각 | 조종영 | 2006.04.28 | 71 |
| 262 | 겨울 어느 날 | 염미경 | 2006.04.28 | 66 |
| 261 | 어느 날의 일기 | 강용환 | 2006.04.27 | 69 |
| 260 | 청보리밭에서 법성포까지 | 신영숙 | 2006.04.27 | 106 |
| 259 | 첫 발자국 | 염미경 | 2006.04.26 | 73 |
| 258 | 어느 하룻날의 소회 | 이은재 | 2006.04.25 | 58 |
| 257 | 빗속의 춤꾼 | 정현창 | 2006.04.25 | 67 |
| » | 행복선언 | 박성희 | 2006.04.25 | 62 |
| 255 | 가끔 생각나는 그 사람 | 박귀덕 | 2006.04.23 | 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