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 보리밭에선 모두가 꿈을 꾼다

2006.04.29 09:08

정현창 조회 수:72 추천:12

청 보리밭에선 모두가 꿈을 꾼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야) 정 현 창






   청 보리밭에 가본 적이 있나요? 끝도 없이 초록빛 바다를 이룬 청 보리밭을…….  쪽진 어머니의 가르마처럼 가느다랗게 뻗은 황톳길 따라 세상 모든 시름일랑 내려놓고 걸어본 적이 있나요? 하늘에 종달새가 없어도 좋습니다. 아니 한 마리쯤 하늘 높이 떠서 지지배배 지저귀면 더욱 좋겠죠. 봄바람이 불어와 하얗게 세기 시작한 귀밑머리 흩날리다 봄볕 따가운 볼이라도 만져주고 가면 더 좋겠지요. 말없이 걷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눈을 감아 보세요. 어디선가 귀에 익은  보리피리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어렴풋이 잊혀졌던 추억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비록 배고프고, 서러움이 많았지만 눈물이 나도록 그리운 그 시절의 꿈을 꿀 것입니다.

  보리밭의 추억은 많습니다. 서릿발이 하얗게 서고 날씨는 추운데 보리 밟기에 동원되어 친구들과 손잡고 몇 번이나 왔다 갔다 반복하던 보리밭은 왜 그리 넓었는지요. 보리 이삭이 막 나오려 할 때 잎을 제거하고 길이를 적당히 잘라 보리피리를 만들었습니다. 보리대롱 아랫부분을 입으로 한두 번 깨문 뒤 불면 제법 멋진 소리가 납니다. 대롱이 짧을수록 높고 센 소리가 나고 길수록 낮고 부드러운 소리가 납니다.
보릿고개시절 배는고프고 먹을 것은 없었던 우리들은 이삭이 완전히 나온 뒤 노랗게 익기 전에 보리이삭을 베어다 불에 구웠습니다. 까맣게 익은 보리이삭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싹싹 비벼서 껍질은 벗겨내고 초록빛 보리만을 골라 먹으면 정말 맛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입과 얼굴은 어느새 껌둥이가 되어 서로를 쳐다보며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습니다. 배는 고팠어도 그때는 마냥 행복하기만 하였습니다. 보리수확이 끝나면 노란 보릿대로 여치집도 만들고 비눗방울 놀이도 하였습니다. 그때 먹었던 깡 보리밥은 왜 그리도 방구가 많이 나오고 배는 빨리 꺼졌는지 모릅니다. 어머니는 배 꺼진다며 살살 걸어 다니라고 늘 말씀하셨지요.  



새봄이 오자마자 매화, 진달래, 벚꽃 등 봄꽃놀이에 현기증이 날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가는 곳마다 봄꽃들로 가득 넘쳐 보고 또 보고 너무나 과식을 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들도 너무 많으면 그 빛을 잃게 되나 봅니다. 봄꽃에 싫증이 난 우리들은 청 보리밭을 찾습니다. 꽃이라고는 한 송이 찾을 수 없는 넓디넓은 초록 바다를 찾습니다. '청 보리'는 특별한 품종 이름이 아니고 이삭이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보리 이삭이 누렇게 익어가기 전까지의 파란색 보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푸름과 미풍에 살랑살랑 물결치는 모습이 싱그러워 특별히 ‘청 보리’라는 예쁜 이름으로 부르면서 그 아름다움을 즐기게 되었답니다. 전북 고창군 공음면 일대의 청 보리밭은 정말 장관입니다. 학원관광농장 17만 평과 인근을 합치면 무려 30만 평이 약간 굴곡이 있는 구릉지대로 펼쳐져서 끝이 보이지 않는 초록바다를 이루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사진을 배울 땐 청 보리밭을 자주 찾았습니다. 하지만 갈 때마다 옷을 갈아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4월에 가면 세상구경을 하러 이제 막 나온 아이의 볼처럼 연약한 싹들이 풋풋하고 싱그럽습니다. 그때는 약간 높은 곳으로 가서 해맑은 아이들이 초록빛 양탄자에서 뛰노는 광경을 광각(廣角)으로 촬영합니다. 5월에는 청년의 기세처럼 이삭을 내밀고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는 거칠고 힘이 있습니다. 그때는 약간 낮은 자세로 하늘을 찌를 듯 힘차게 뻗어있는 보리이삭을 클로즈업해서 역광(逆光)촬영을 합니다. 6월이 되면 풍성하게 무르익어 보리는 황금빛으로 들판을 물들입니다. 석양이 곱게 물든 시각에 하루 일을 마친 농부가 보리밭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약간 멀리 떨어져서 촬영합니다.


청 보리밭에 섭니다. 두 손과 얼굴에 초록물이 듭니다. 눈동자와 마음까지 초록빛으로 물들면 나는 한 포기의 청보리가 됩니다. 가슴시린 추억들이 달려옵니다. 바람결엔 보리피리 소리도 들리는 듯합니다. 청 보리는 가난합니다. 하지만 궁색하지는 않습니다. 단순하지만 모자라지 않고, 욕심 부리지 않지만 열심히 살아갑니다. 추억은 있지만 항상 꿈을 꾸며 살아갑니다. 난, 이대로 청 보리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2006. 4. 30.)

*정현창 약력
격월간 좋은문학으로 등단/행촌수필문학회 회원,전북문협 회원/전자수필집 우료 없이 부친 편지 출간/전주태평공업사 대표/전북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1가 상산타운 106/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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