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파스로는낫지 않는다
2006.04.30 00:41
물파스로는 낫지 않는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급) 이 종 택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이는 1776년에 공포한 미국독립선언문의 한 구절이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 중에 50만 명이 넘는 흑인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것은 민권사상에서 본뜬 하나의 수사일 뿐 당시 아메리카 대륙의 흑인들은 노예해방 이전까지 '말하는 가축'으로 취급되었을 뿐 사람이 아니었다. 이와 함께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말 또한 희망사항일 뿐 그렇게 실행하지는 않았다. 앞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이상을 담은 법언(法諺)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그런 식으로 내려 왔다. 지금까지 법이 만인 앞에 평등했는가 물었을 때 그렇다고 수긍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법이 땅에 떨어졌다. 그러다보니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떠돌아다니는가 하면 힘 있는 사람에겐 거미줄이요, 힘없는 사람에겐 오랏줄이라고 하지 않던가.
아무리 큰돈을 받아도 정치자금이라는 마패만 내밀면 면죄부를 주고 수천만 원대의 뇌물을 받아도 대가성이 없다는 주장이 먹혀들면 곧바로 풀려나는 세상……. 그러나 언제였던가? 남의 승용차에서 단돈 400원을 훔쳤다가 상습범이라는 이유로 징역 1년 6개월을 살고 나온 사람도 있으니 그에게는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 대신 다른 위로의 말이 없었으리라. 그러고 보면 법이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법언은 우리나라에서도 실현되지 못할 하나의 수사일 뿐인 것 같다.
관용을 베풀 때도 그 이유가 가지가지. 하기 싫은 일을 직책상 어쩔 수 없이 했기 때문에, 수십 년 간 공직을 성실히 수행해온 경력을 참작해서, 등의 이유를 들어 풀어주는가 하면, 대기업에 대해선 지난번에도 그랬거니와 이번에도 대외 신인도가 어떻고 국내경제에 미치는 파장 등을 들어 관용을 베풀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 설사 구속을 한다해도 얼마나 가두어 두겠는가. 관용만이 능사가 아니다. 암적인 부분은 서둘러 수술을 해야 빨리 낫는다.
어렸을 때 나는 부스럼을 자주 앓았다. 부스럼이 생기면 어머니는 건드리지 말고 내버려두라고 하셨다. 곪아터지기 직전에 짜내야하니까. 그리고 큰 부스럼은 침쟁이 집을 찾아가서 ‘대팻침’(메스 모양으로 생긴 침)으로 째어 고름을 짜낸 뒤에 약을 바르면 나았다. 그래서 누런 고름덩어리가 살 겉으로 비칠 때까지 부스럼을 키우며 그 아픔을 참아 내느라 그 때마다 어지간히 고생을 했었다.
요즘 우리나라의 재계가 그것도 손꼽히는 대기업들의 속이 언제부터 곪기 시작했는지 몰라도 해묵은 고름덩이가 겉으로 비치는 걸 보니 이 시점이 대팻침을 맞을 적기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죄를 숨겨 침을 안 맞으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고, 침쟁이들마저 곪은 지 번연히 알면서도 부스럼 위에다가 물파스만 발라 퇴원시키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여기에 가관인 것은 대기업들의 ‘헌금’이다. S구룹 L회장의 8천억 원에 이어 H구룹 J회장도 1조원을 사회 공헌자금으로 내놓겠다고 했다. 이런 와중에 외환은행의 대 주주인 '론스타'까지 순전히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에게 감사하다는 뜻으로 1천억 원을 기부하겠다고 한다. 일단 세 건의 헌납금을 합치고 보면 2조원에 육박한다. 아무리 돈 가치가 떨어진 세상이라지만 수천억에서 조 단위의 돈을 어디 일반 서민들은 짐작이나 할 수 있는 액수인가.
그러나 쉽게 아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이번 민주당에서 일어난 공천헌금의 사건현장에서 보았듯이 사과상자에 1만 원 권 지폐를 가득 담아야 2억 원 정도다. 그 무게가 약 25kg, 그렇게 치면 2조원은 2,5ton 트럭 100대분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말이 그렇지 돈을 가득 싫은 자동차 100대가 신작로에 늘어선다면 그 자동차의 길이는 과연 몇 미터나 될지 상상이나마 해 봤는가? 지갑 속에 10만 원만 들어있어도 발걸음이 가벼웠던 지금껏 살아온 내 삶이 새삼 초라해진 느낌이다.
그러나 그런 천문학적 돈을 개인재산에서 빼내 자진해서 사회에 내놓겠다는데도 누구하나, 어디에서도 감동하는 이가 없다. 불행한 일이다. 좋은 일 했노라고 가슴 뿌듯해야 할 기업주는 겁먹은 표정으로 눈치만 살피는가 하면, 감사해야 할 국민들은 오히려 비난과 냉소 뿐이다. 그것은 편법 경영권 승계와 불법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에서 벗어나려는 잔꾀를 부려 억지 춘향이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글로벌시대. 이제 모든 경영이 투명해야 한다던데 온 세계를 누비겠다는 기업운영 방침이 겨우 이처럼 전근대적 탈법경영으로 부의 세습이나 꾀한다면 앞으로도 이런 수모는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속담에 "안에서 새는 쪽박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다. 그 새는 쪽박은 우리나라에서는 헌금이란 미명 아래 동정을 받을지 몰라도 미국이나 다른 선진국까지 가지고 가서 써 먹으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곪은 상처는 하루속히 외과적 수술을 받는 것이 좋다. 물파스로는 낫지 않기 때문이다. (2006. 4. 24.)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급) 이 종 택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이는 1776년에 공포한 미국독립선언문의 한 구절이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 중에 50만 명이 넘는 흑인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것은 민권사상에서 본뜬 하나의 수사일 뿐 당시 아메리카 대륙의 흑인들은 노예해방 이전까지 '말하는 가축'으로 취급되었을 뿐 사람이 아니었다. 이와 함께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말 또한 희망사항일 뿐 그렇게 실행하지는 않았다. 앞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이상을 담은 법언(法諺)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그런 식으로 내려 왔다. 지금까지 법이 만인 앞에 평등했는가 물었을 때 그렇다고 수긍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법이 땅에 떨어졌다. 그러다보니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떠돌아다니는가 하면 힘 있는 사람에겐 거미줄이요, 힘없는 사람에겐 오랏줄이라고 하지 않던가.
아무리 큰돈을 받아도 정치자금이라는 마패만 내밀면 면죄부를 주고 수천만 원대의 뇌물을 받아도 대가성이 없다는 주장이 먹혀들면 곧바로 풀려나는 세상……. 그러나 언제였던가? 남의 승용차에서 단돈 400원을 훔쳤다가 상습범이라는 이유로 징역 1년 6개월을 살고 나온 사람도 있으니 그에게는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 대신 다른 위로의 말이 없었으리라. 그러고 보면 법이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법언은 우리나라에서도 실현되지 못할 하나의 수사일 뿐인 것 같다.
관용을 베풀 때도 그 이유가 가지가지. 하기 싫은 일을 직책상 어쩔 수 없이 했기 때문에, 수십 년 간 공직을 성실히 수행해온 경력을 참작해서, 등의 이유를 들어 풀어주는가 하면, 대기업에 대해선 지난번에도 그랬거니와 이번에도 대외 신인도가 어떻고 국내경제에 미치는 파장 등을 들어 관용을 베풀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 설사 구속을 한다해도 얼마나 가두어 두겠는가. 관용만이 능사가 아니다. 암적인 부분은 서둘러 수술을 해야 빨리 낫는다.
어렸을 때 나는 부스럼을 자주 앓았다. 부스럼이 생기면 어머니는 건드리지 말고 내버려두라고 하셨다. 곪아터지기 직전에 짜내야하니까. 그리고 큰 부스럼은 침쟁이 집을 찾아가서 ‘대팻침’(메스 모양으로 생긴 침)으로 째어 고름을 짜낸 뒤에 약을 바르면 나았다. 그래서 누런 고름덩어리가 살 겉으로 비칠 때까지 부스럼을 키우며 그 아픔을 참아 내느라 그 때마다 어지간히 고생을 했었다.
요즘 우리나라의 재계가 그것도 손꼽히는 대기업들의 속이 언제부터 곪기 시작했는지 몰라도 해묵은 고름덩이가 겉으로 비치는 걸 보니 이 시점이 대팻침을 맞을 적기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죄를 숨겨 침을 안 맞으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고, 침쟁이들마저 곪은 지 번연히 알면서도 부스럼 위에다가 물파스만 발라 퇴원시키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여기에 가관인 것은 대기업들의 ‘헌금’이다. S구룹 L회장의 8천억 원에 이어 H구룹 J회장도 1조원을 사회 공헌자금으로 내놓겠다고 했다. 이런 와중에 외환은행의 대 주주인 '론스타'까지 순전히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에게 감사하다는 뜻으로 1천억 원을 기부하겠다고 한다. 일단 세 건의 헌납금을 합치고 보면 2조원에 육박한다. 아무리 돈 가치가 떨어진 세상이라지만 수천억에서 조 단위의 돈을 어디 일반 서민들은 짐작이나 할 수 있는 액수인가.
그러나 쉽게 아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이번 민주당에서 일어난 공천헌금의 사건현장에서 보았듯이 사과상자에 1만 원 권 지폐를 가득 담아야 2억 원 정도다. 그 무게가 약 25kg, 그렇게 치면 2조원은 2,5ton 트럭 100대분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말이 그렇지 돈을 가득 싫은 자동차 100대가 신작로에 늘어선다면 그 자동차의 길이는 과연 몇 미터나 될지 상상이나마 해 봤는가? 지갑 속에 10만 원만 들어있어도 발걸음이 가벼웠던 지금껏 살아온 내 삶이 새삼 초라해진 느낌이다.
그러나 그런 천문학적 돈을 개인재산에서 빼내 자진해서 사회에 내놓겠다는데도 누구하나, 어디에서도 감동하는 이가 없다. 불행한 일이다. 좋은 일 했노라고 가슴 뿌듯해야 할 기업주는 겁먹은 표정으로 눈치만 살피는가 하면, 감사해야 할 국민들은 오히려 비난과 냉소 뿐이다. 그것은 편법 경영권 승계와 불법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에서 벗어나려는 잔꾀를 부려 억지 춘향이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글로벌시대. 이제 모든 경영이 투명해야 한다던데 온 세계를 누비겠다는 기업운영 방침이 겨우 이처럼 전근대적 탈법경영으로 부의 세습이나 꾀한다면 앞으로도 이런 수모는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속담에 "안에서 새는 쪽박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다. 그 새는 쪽박은 우리나라에서는 헌금이란 미명 아래 동정을 받을지 몰라도 미국이나 다른 선진국까지 가지고 가서 써 먹으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곪은 상처는 하루속히 외과적 수술을 받는 것이 좋다. 물파스로는 낫지 않기 때문이다. (2006.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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