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꿈나무

2006.05.01 18:02

유영희 조회 수:62 추천:15

희망의 꿈나무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유영희



토요일은 일기검사를 하는 날입니다. 교실 문을 들어서니 K는 무척 바쁜 아침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못 본 척 해주는데 녀석은 계속 선생님의 눈치를 살피며 밀린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꼬맹이가 선생님 몰래 일주일 치 밀린 일기를 쓴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입니다.

요즘 어린이들은 가정에서 저만 알고 자라 버릇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 아이들은 아직 순수하기만 합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선생님의 꾸중 앞에서 녀석들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작은 칭찬 앞에서 아이들은 무지갯빛 탄성을 질러댑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자신을 성찰하는 방법과 글을 쓰는 능력을 길러주려고 날마다 일기를 쓰라고 하였고, 한 주의 마지막 수업시간에 검사하기로 하였습니다.

  K는 아마 지난주의 일기를 쓰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여백뿐인 일기장을 내밀 수 없었던지 수업시간에도 몰래몰래 일기를 쓰느라 쩔쩔매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여전히 모른 척 눈을 감아 주었습니다. 한참 뒤 고개를 든 K의 얼굴은 환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승자의 여유처럼 솜사탕 같은 달콤한 미소까지 띠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던지는 질문에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대답하기도 합니다. 몰아 쓴 일기지만 빼곡히 채워진 일기장을 내놓을 수 있기에 자신감이 펄펄 넘쳐흐릅니다.

마지막 수업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일기장을 보란 듯 책상 위에 내놓고 있었습니다. K의 책상 위에도 어느 새 일기장이 올라와 있습니다. K는 누구보다 일기검사를 가장 많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향해 물었습니다. ꡒ여러분! 일기 잘 썼어요?ꡓ 병아리처럼 입을 모아 ꡒ네!ꡓ하는 아이들의 합창 속에 K의 목소리가 유독 크게 교실을 울렸습니다.

ꡒ지난 한 주 동안 여러분이 꼬박꼬박 일기를 잘 썼으니, 오늘 일기검사는 안 하겠어요.ꡓ    순간 K의 얼굴은 실망과 원망이 교차하는 묘한 표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마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ꡐ선생님! 칭찬 받으려고 아침내 힘들여 밀린 일기 썼는데 검사를 안 하시면 어떻게 해요?ꡑ 녀석의 얼굴을 보며 선생님은 자꾸만 비죽비죽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책상 위에 있던 일기장을 이미 가방 속에 넣었건만, K는 아직도 일기장을 만지작거리며 선생님을 향해 야속함을 가득 담은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언니는 올해 3학년 담임을 맡았습니다.
ꡒ언니! 너무 잔인한 거 아냐? 그래도 아예 안 쓰는 것보다 밀린 일기나마 쓰려는 마음을 좀 봐주지∙∙∙∙∙∙.ꡓ 전화선 너머 언니에게 나는 비정한 선생님이라고 책망했습니다. ꡒ얘! 일기는 분명 그날그날 쓰는 거라고 가르쳐놓고 어떻게 한꺼번에 쓴 일기를 통과 시켜주니? 그렇다고 제 딴에는 쓰고자 노력했는데 혼낼 수도 없잖아?ꡓ 언니 말이 맞습니다. 일기는 그날그날 써야 한다는 원칙을 어겼는데, 반칙을 눈감아 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교육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날 일기검사를 통과했다면 K는 세상을 속여 놓고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의식을 갖게 될지도 모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K를 불러 언니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답니다. ꡒ다음 주에도 그날그날 일기 쓰는 거 잊지 마. 그땐 꼭 검사할거다.ꡓ 아이는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답니다. 아마 녀석은 선생님이 말하는 모든 뜻을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일기를 몰아서 쓰는 잘못 앞에서 대뜸 꾸중을 하지 않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기회의 문을 살포시 열어준 언니의 마음이 5월의 바람처럼 기분을 상큼하게 해 줍니다. 제 할 일을 안 하고도 뻔뻔하게 고개를 쳐드는 아이가 아니고 어떻게든 해내려는 K의 모습도 기분 좋은 5월을 열어주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교권이 땅에 떨어지고 교실이 무너졌다고 개탄하지만 아직은 절망보다 희망이 훨씬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제자를 아끼는 선생님의 마음도 여전히 물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선생님을 우습게 보는 아이보다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땀을 흘리는 아이들이 훨씬 더 많은 세상입니다. 언론에서 듣고 보았던 일들로 인해, 우리의 미래이며 희망인 꿈나무를 향하여 혹 너무 성급한 진단을 내리진 않으셨나요? 스스로 속이고 속는 일에 익숙해진 어른들의 멍든 가슴으로 학교와 아이를 판단하진 않으셨나요? 희망의 꿈나무가 바르게 자라도록 하려면 먼저, 그릇된 어른들의 시각부터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