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지원, 그 일상에서의 탈출

2006.05.06 13:12

이은재 조회 수:102 추천:7

논산지원, 그 일상에서의 탈출/이은재(행촌수필문학회)



여행하는 날, 비가 좀 오면 어떠랴. 숲속의 나무들은 허구헌 날 태풍과 번개에 시달리고 벌레에 갉히면서도 저토록 의연한데. 날씨가 개일 것을 기원하며 버스는 변산반도를 향해 달렸다. 차창으로 빗방울이 또르륵 또르륵 포물선을 그으며 흘렀다.

모내기를 기다리는 논배미엔 찰랑찰랑 봇물이 넘쳐 개구리떼를 부르고 산기슭엔 복사꽃, 배꽃, 조팝나무 꽃이 조화롭게 만발하며 찬란한 봄을 뽐내고 있다. 강경에서 출발하여 1시간 30분 만에 내소산 기슭에 도착하자 줄기차게 쏟아지던 비가 그치고 햇살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기념사진을 찍고 산행이 시작되었다. 산자락엔 산 벚꽃과 연초록 나무들이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리며 봄을 노래하고 있었다. 산길을 따라 군락을 이룬 후박나무, 꽝꽝나무, 미선나무가 푸름을 더해주었다. 산상호수에 비친 바위산의 반영이 아름다웠다. 아침에 내린 빗물에 황사먼지까지 말끔히 씻겨나간 숲속의 바람은 너무도 싱그러워 실컷 퍼 마시고 배낭에도 가득 담아가고 싶었다.

완만한 곡선의 등산로에 부담 없는 산행이었다. 높지 않은 산이면서도 기암절벽과 수려한 산세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험한 계곡을 인공계단으로 커버한 전망대 뒤편으로 직소폭포 물줄기가 시원스럽게 낙하하는 풍광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카메라에 절경을 담느라 야단들이었다. 폭포수가 떨어져 형성된 분옥담은 에메랄드빛으로 짙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산상호수에서 직소폭포에 이르는 봉래구곡이 변산8경 중 제1경에 꼽히는 명소라고 한다. 산등성이에 오르면 간간이 서해바다가 보인다. 구름이 깔린 바다는 회색빛만 늘어놓았다.

내소산은 커다란 바위산이었다. 편편하고 밋밋한 바위가 아닌 층암으로 구성되었다. 빗물을 머금은 바위는 등산객의 발걸음을 거부하며 미끄러움으로 위협했다. 권 사무관님은 나를 보호한다며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더니, 본인이 몇 번이나 뻥뻥 넘어졌다.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일부러 넘어진 것이라며 핑계를 대지만 다리가 부실한 건지, 토끼처럼 깡충깡충 재롱을 떨다가 헛짚은 것인지. 여기저기 돌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사람이 속출했다. 협곡엔 계단을 설치하고 비탈길에도 나무 계단을 만들어 등산객을 배려하는 마음이 엿보였다.

내소사 들머리는 전나무 숲으로 특별한 감상에 젖게 했다. 수령 80~200년의 거목들은 군살 하나 없이 반듯한 자태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전나무 숲길을 벗어나면 단풍나무가 일주문 앞까지 터널을 만든다. 사월 초파일을 준비하는 연등행렬이 줄을 이었다. 단풍나무에 종대로 매달린 꽃등이 장관이었다. 내소사의 명품은 1,000년이나 되는 느티나무 보호수다. 장구한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애환을 나이테 속에 감춰 놓았을까. 수만 가지 나뭇잎에 그 많은 얘기들을 적어 놓고도 푸른색 잎새로 팔랑거린다. 천년동안 인고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봄이 오면 어김없이 연록색 잎으로 부활하는 느티나무가 숭고하기까지 하다. 백년도 견뎌내기 힘든 인간의 수명이 참 초라하다. 천년의 얘기를 듣느라 나는 오랫동안 느티나무 주변을 떠나지 못했다.

점심식사는 갯벌이 보이는 외변산 바닷가 횟집에서 들었다. 70여 명이 한 자리에 모이니 식당이 꽉 팠다. 싱싱한 활어 회와 산삼주로 쨍그랑 건배 속에 오찬이 이어졌다. 지원장 님은 나보고 폭탄주를 조제하라고 하셨다. 처음 만들어 보는 서툰 솜씨에 부여에서 오신 조정위원 님이 뱃살을 잡고 웃었다. 제조법에 뭐 특별한 규칙이 있을까? 슬슬 섞어도 술술 잘 넘어가는 게 술인데.

산과 바다가 공존하는 변산반도는 산을 둘러싼 내변산과 해안선을 둘러싼 외변산으로 구분된다. 내변산에는 의상봉, 세봉, 관음봉, 옥녀봉, 신선봉 등 400여m 안팎의 산봉 10개가 있고, 높이 30m의 직소폭포가 시원스레 물줄기를 내리고 있다. 외변산에는 채석강과 해식동굴, 적벽강이 있으며 수려한 해안경관과 함께 푸르른 송림, 갯벌이 펼쳐져 있는 고사포해수욕장이 있다.

7천만 년의 역사를 안은 채석강은 중생대 쥐라기~백악기 시대에 형성된 퇴적암 지층으로 다양한 해안지형을 만든다. 채석강은 중국 당나라 시인 이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며 풍류를 즐기다가 강물에 비친 달그림자를 보고 그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중국의 채석강 지형과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 채석강은 변산반도 격포항에서 닭이봉 일대를 포함한 1.5㎞의 층암절벽과 바다를 말하는 것으로 강의 이름이 아닌 바닷가의 절벽을 말한다. 절벽은 마치 수십만 권의 책을 쌓아올린 것 같은 모습으로 여러 가지 색을 띤 층암으로 구성되어 아주 특별한 모습을 연출한다. 오랜 세월 동안 대륙의 바람과 파도에 깎이면서 형성된 퇴적암층이 절경이다.

점심을 먹고 새만금 공사현장으로 향했다. 자연친화적인 생태계보존인가 문화적 창출인가, 그간 뜨거운 이슈로 충돌이 일었던 그 현장으로 가는 내 마음은 착잡했다. 어디가 육지이고 어디가 바다인가. 분명한 것은 장차 거대한 육지가 될 터인데 모두가 바다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갯벌을 생활터전으로 삼았던 어민들, 아직도 삶의 끈을 놓지 못한 고깃배들은 담수호에서 마지막 갯벌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 삶의 현장 앞에서 나의 마음이 몹시 시렸다.

1970년대 초 세계적인 식량파동과 1980년대 초 냉해로 인한 쌀 수입을 계기로 사업시행이 논의되었던 새만금사업은 그간 경제적 타당성 분석과 환경영향평가, 주민동의, 관계부처 협의, 공유수면매립면허 등의 절차를 거쳐 1991년에 착수되었다. 2006년까지 방조제 33㎞ 외 배수갑문 2개소를 건설한 뒤 내부간척지는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여 친환경적으로 개발하였다. 새만금에서 얻어낼 수 있는 육지는 4만1백ha(약 1억2천만 평)라고 한다. 군산과 부안에서 동시에 매립해 나가던 끝막이 공사가 완성된 것은 2006년 4월 21일이었다.  등산 날짜를 잘 선택한 덕분으로 우린 완성된 방조제를 관망할 수 있어 좋았다. 그동안 대립 속에 마무리 공사가 진척되지 못하다가 소송에서 승리한 뒤 강행된 농림부 국책사업의 쾌거였다. 그러나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상황은 달라졌다. 요즘은 쌀이 남아돈다. 이런 상황에서 원래 목적인 식량난 해결을 위해 논의되었던 새만금사업이 타당한가 따지는 이들이 생겼다. 시행자와 환경단체 및 갯벌을 터전으로 사는 주민들의 거센 대립으로 진통이 많았던 새만금사업을 훗날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까.

새만금 방조제에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까지 우린 들어갈 수 있었다. 배수갑문이 있는 구간이었다. 배수갑문 아래로 급물살이 흘렀다. 포말로 부서진 부드러운 바닷물이 아닌 위협적인 바닷물이었다. 이 문을 통해 바닷물을 방류하면서 소금기를 씻어내고 나면 광활한 땅이 조성될 것이다. 통제구간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논산지원에서 보낸 협조공문 덕분이었다. 많은 관람객들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방조제 앞에서 유유히 지나가는 우리 버스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갯벌이 사라지는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얼마나 많은 돌과 흙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을까. 산봉우리 몇 개가 바다 속으로 침몰하는 동안, 갯벌을 터전으로 살아왔던 어민들의 가슴은 수도 없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갯벌에서 얻어낼 수 있는 그 이상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새만금사업은 두고두고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육지 조성보다 갯벌 보존에 한 표를 던지고 싶은 것은 다만 나 한 사람뿐일까.

일상에 묻혀 살다가 자연으로의 탈출은 가슴 뛰는 설렘이요 기쁨이다. 기차를 타고 출퇴근 하면서 찬란한 봄동산에 매료되어 숲속으로 뛰어가고 싶었던 적이 많았던 유혹의 계절에 논산지원, 부여군법원, 조정위원들과 함께 한 이번 행사는 유익하고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일상에서의 탈출, 진부한 삶 속에서 가끔은 필요한 충전의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