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2006.05.06 19:46

박성희 조회 수:75 추천:8

초등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전북대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기)

                                                                                                                   박성희



대학생이 된 아들이 초등학교동창회가 있다며 거울앞에서한껏 멋을 내고 있다. 다른 일은 늘쩍지근하던 녀석이 오늘은 바쁘게 서두르며 약속장소까지 태워다 달라고 아양까지 떤다. 신이 난 녀석은 오랜만에 만날 친구들을 떠올리며 한 사람씩 설명을 해가며 내 기억까지 들춰내려 한다.

"나는 동창회에 처음 가 봐."
"너만 처음이 아니고 친구들도 오늘 처음 모이는 거야."
"그래. 근데 엄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응, 엄마 땐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동창회를 가졌었는데 누나를  보니까 대학에 들어간 뒤 동창들이 모이기 시작하던데."
"아, 그래요?"
아직도 내게 이런 질문을 할만큼 순진한 녀석이 부럽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다. 약속장소에 아들을 내려주고 오는데 길가엔 유채꽃들이 활짝 피었다. 그 유채꽃들이 내 자동차 불빛에 반짝이며 나를 추억속으로 끌어 들인다.

  동창회도 세대차이가 나는지 내가 클 때와는 다르게 여자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왔단다. 나는 지금도 동창회에 가지 못했던 일이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지독하게 엄한 엄마는 그런데 가면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못 가게 해서 단식투쟁까지 했으나 결국은 참석하지 못했다.

지금은 폐교가 되어 없어졌지만 우리 학교는 우리 학년만 해도 150 여명이나 되는 규모가 큰 학교였다. 우리동네에는 남녀를 합쳐 24명이나 돼 다른 동네 친구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파워가 있었다. 또래들 숫자가 많다보니 늦게 학교에 들어갔던 친구는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시집간 친구도 있고, 연애하다 집안끼리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었다. 엄마는 내 자식만 특별하고 귀하게 생각했는지 동네에도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게 할만큼 엄하게 키웠었다. 가끔가다 장난꾸러기 녀석들이 얼굴을 내밀고 우리 집을 들여다 보다가 엄마한테 들켜 치도곤을 당하기도 했었다. 이런 가운데서 자란 나는 사회성이 결여되고  타인과 어울리지 못해서 이해할 수 없는 편엽하고 옹졸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다른 친구들은 미팅에 극장, 빵집, 여행, 나이트 등으로  몰려 다니는데 나는 새장 속에 갇힌 극락조처럼 항상 바깓세상을 동경하며 학교와 집을 오가야 했다. 집안에서야 사랑받고 부족함이 없었지만 엄마 앞에서 내 생각을 털어 놓을 만큼 당당하게 자라지 못했다.

아무리 예쁘고 좋은 것을 많이 해준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밤길에 비단옷 입고 혼자 놀고 있으니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창살없는 감옥에 갇혀 감정은 메말라가고 겉모습은 우아한 백조처럼 보일 수 있지만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분노의 불씨는 언제든 폭발할 수 있게 조금씩 커가고 있었다.

  한 번은 친구가 문밖에서 찾기에 나가 봤더니 나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잠깐 나가자고 했다. 자기 친구가 통학차에서 나를 보고 사귀고 싶다고 소개해 달라고 찾아 왔다며 안 나오면 집에까지 올 것 같다고 겁을 주더니 잠깐 얼굴이라도 보자고 끌고  갔다. 지금도 그 남학생이 잊혀지지 않는 것은 아쉬움이 남아 있어서 그러는 것 같다. 그애는 용기있게 사귀자고 하며 당당하게 묻는데 나는 혹시 누가 보게 되면 소문이라도 날까봐 전전긍긍하며 고개도 못들고 제발 가 달라고 사정을 했었다. 그애는 내가 내숭을 떨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몇 번 만나자는 편지를 보내 왔지만 보러 나가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가슴에 상처는 깊어져갔고  더 소심해지고 낯선 장소나 사람을 두려워하고 날카롭게 발톱을 세웠다. 남편도 사촌오빠와 친구여서 우리집에 같이 놀러 왔다가 자연스럽게 나를 보게되고, 자주드나들다 결혼까지 하게 됐다. 결혼 후 10여 년이 지나고 나서 다시 동창회를 갖는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남편은 흔쾌히 갔다 오라고 등까지 다독여 주었고, 나는 당당한 모습으로 동창회에 나갔는데 나를 알아보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나도 서먹하고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친구들은 동창회에 나온 내가 신기한지 신랑을 잘 만났다고 이구동성으로 놀려댔다. 동창회에 다녀와서,
"여보 영구가 회장이 됐다."  그게 어떠냐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남편에게 영구는 초등학교밖에 안나왔고 집도 가난했었다며  대학물 먹은 녀석들이 순진한 그애를 이용하려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내 말을 들은 남편이,
"회의를 거쳐 결정했지?"
"네"
"그럼 됐네."
"초등학교 동창회 회장이 초등학교만 졸업했으면 자격이 있는거지 꼭 대학 나온 사람이 회장을 해야 한다고 헌법에 그런 조항이 들어 있던가?"하고 되물었다.
"아니, 그래도 형편도 그렇고 학벌도 그래서."
나는 얼버무렸지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남편의 권유로 몇 번 참석 해 보았으나 재미가 없었다. 처음에는 반가운 마음에 즐거웠는데 시간이 갈수록 내가 왕따 당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같이 공유한 추억이 없어 끼어들 수도 없었고, 술을 못하니 어울리지도 않았다. 시간이 지루하고 나중에는 거만해 보인다고 내 행동을 비웃는 친구조차 있었다. 그러니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나갈 수도 없었다.

이제는 아이들이 자라 동창회에 간다고 멋을 부릴만큼 시간은 훌쩍 지나가 버렸지만 지금도 남편의 말이 생각나면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있다.
"어디에 초등학교 동창회장이 대학 나와야 한다고 써 있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어울려 살려고 노력 좀 해봐."

내가 얼마나 오만과 편견을 가지고 혼자만 깨끗하고 순진한 척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살았는지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기적이고 아집덩어리였던 나를 이만큼이라도 타인과 어울리며 살수있게 한결같은 애정으로 얼어붙은 마음을 끈기있게 녹이느라고 지금까지도 애쓰는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남편의 답답한 마음을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했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식구들과 잘 어울리며 사는지 불가사의 한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