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담 위의 호박넝쿨처럼

2006.05.07 09:49

이은재 조회 수:78 추천:7

토담 위의 호박넝쿨처럼/이은재(행촌수필문학회)



  더불어 기대어야 할 담을
  애써 안고 살아가네
  꼭 담 높이 만큼의
  경계를 그으며

  기어오르지 않으면
  어디든 닿을 수 없어
  무한의 빛을 찾아
  수만의 덩굴손 뻗듯

  내가 먼저 손 내밀면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벽
  어울렁 더울렁 껴안고
  환한 꽃잎 피울 수 있을까?


호박넝쿨은 옆집 담장 넘기를 예사로 안다. 어느 구석이든 더듬이를 뻗어 기어가면 자기 땅이다. 눈치 볼 것도 없이 터를 잡아 꽃을 피워놓고 벌과 나비까지 초청하여 잔치를 벌인다. 어릴 적 공기놀이를 하다가 문득 바라 본 호박넝쿨, 누구의 소유인지도 모르게 이웃집 토담까지 기어가 곁가지를 뻗고 정답게 어깨동무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훈훈했었다.

장맛비가 또록또록 미루나무와 조우하는 여름날이면 엄마는 호박부침개를 만들어 주셨다. 엄마가 밀가루 반죽을 하는 동안 나는 호박을 따러 담장으로 뛰어가곤 했었다. 담장에 가 보면 분명 우리 집 호박넝쿨인데 옆집 담장 아래에 호박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 호박을 따려면 옆집으로 들어가야 한다. 풀잎으로 얼기설기 만든 옆집 대문은 슬쩍 밀치기만 해도 문이 열렸다. 하지만 저 호박이 우리 것인가, 옆집 것인가 판단이 서지 않아 망설였다. 주인이 있을까 사립문을 기웃거리다가 인기척이 없으면 살짝 들어가 후다닥 호박을 따서 치맛자락에 싸서 감추고 도망쳐 나왔다. 우리가 심은 호박인데 왜 내가 도둑처럼 불안해할까. 화가나 토라져선,

  “엄마, 이 호박 주인은 누구야?”
   엄마는 빙그레 웃으시며,
  “따 먹는 사람이 임자지.”

누가 주인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필요한 사람이 주인이었다. 지금은 담장 하나를 두고도 싸운다. 담장이 무너졌다면 그 담장을 세울 때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자기 소유로 만들려고 측량까지 하려 할 것이다. 금싸라기 같은 도시의 땅은 담장의 경계에 따라 평수가 좌우되니 돈을 쫓는 현대인들에게는 반드시 짚고 넘어야 할 고지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렸을 적 토담 위에서 정답게 어깨동무하며 경계를 긋지 않고 자기 멋대로 가지를 뻗어 더불어 살아가던 호박넝쿨의 모습이나, 남의 집 울안으로 가지를 뻗어 가을이면 주홍빛 그리움으로 만추를 노래하던 감나무의 단맛이 아쉬워지는 현실이다. 갈수록 폭주하는 분쟁은 현대인의 인색한 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무수한 담을 쌓고 있다. 이웃집과 경계를 긋는 콘크리트 벽에서부터 사람과 사람사이의 보이지 않는 마음의 벽까지 수없이 쌓고 있다. 너무도 단단한 벽엔 햇빛과 바람도 드나들지 못해 균열된 틈새로 이끼와 곰팡이만 끼었다. 점점 부식되어 가는 벽을 보면서도 언제까지 독선과 아집의 못질을 계속할 것인가. 이제는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저 높은 장벽을 허물 순 없을까.

공수래공수거시인생(空手來空手去是人生).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이라고 했다. 토담 위 호박넝쿨도 서로 어깨동무하며 경계를 긋지 않고 살아가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호박 한 포기보다 못하다면 말이 될 것인가. 우리도 어울렁더울렁 껴안으며 살아갈 순 없을까? 토담 위를 기어가는 저 호박넝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