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 보리, 그 추억의 여섯 마당
2006.06.03 00:41
청 보리, 그 추억의 여섯 마당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기초반 김행모
싱그러운 5월이다. 나날이 새로운 옷으로 바꿔 입는 우리의 산하는 언제 보아도 부잣집 안방마님처럼 포근하고 정겹다. 5월은 그야말로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이다.
온 산과 들녘의 연한 녹색물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는다. 그 중에서도 들판의 5월 보리밭은 너무나 푸르다 못해 아련한 기억 속의 추억을 반추(反芻)하게 한다.
내 고향은 토끼와 발맞춘다는 심심산골 순창이다. 정년퇴직 이후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고향에 들러 논밭을 가꾸고 집안을 돌보고 있다. 어느 날 무심코 바라보니 마당가에서 보리가 자라고 있었다. 아무도 심거나 보살피지 않았는데도 봄이 되자 저절로 고개를 내민 보리의 강인한 생명력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 보리 싹을 보노라니 나라를 잃고 굶주림에 시달렸던 일제시대의 고향마을과 나라 잃은 백성들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나는 어느새 타임머신을 타고 50년 전으로 훌쩍 거슬러 올라갔다. 그 시절에는 보리에 얽힌 눈물겨운 사연들도 많았다. 아! 그땐 누구나 정말 그랬었다.
추억 하나.
일제시대, 우리 같은 소학교 어린이들은 꼬불꼬불한 밭길과 논길을 따라 한 줄로 서서 학교에 갔었다. 논밭에서 자란 보리를 보면서 거의 습관적으로 손에 잡히는 보리모가지를 무심결에 한두 개를 잘라, 앞서가는 친구의 무명 한복 바지 속에 슬며시 집어넣었다. 열 번 당하고 한두 번 정도 품을 갚는 장난이었다. 보리모가지의 잘린 부분을 위로 세워 살짝 바지 속에 꽂으면 작은 톱니 같은 돌기가 있어서 바지 가랑이를 털어 내리거나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소리 없이 위로만 기어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디딜방아 가랑이 같은 양다리 앞쪽 가운데로 가는 놈도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바지 뒤편 홈으로 기어 올라가면 당하는 사람은 어쩔 줄 모르고 펄쩍펄쩍 뛰었다. 그런 모습을 보는 우리는 뱃가죽이 아프도록 웃었다.
바지뿐만이 아니라 저고리 뒤 옷자락 속에 보리모가지 두세 개를 슬그머니 넣으면 스스로 기어 올라가 목으로 조용히 나오기도 했고, 팔소매로 슬며시 나오는가 하면, 길을 잘못 들어 겨드랑이로 기어오르다가 갈 길이 꽉 막혀 부드러운 겨드랑이 살만 괴롭히기도 했다. 당하는 친구는 온몸을 좌우로 가볍게 흔들기 시작하다가 차츰 심하게 앞뒤로도 흔들었다. 얼마나 껄끄럽고 고통스러웠을까. 당황해 하고 털어내려는 몸짓이 여간 우스꽝스럽지 않았다. 뒤따라가던 우리는 깔깔대며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서로의 경험으로 그 장난의 주범을 확인하고는 두 사람은 껴안고 웃었던 기억이 새롭다.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여기며 즐거워하던 추억들, 그것은 그래도 보리에 얽힌 유쾌한 추억이라고 할 수 있다.
추억 둘.
장난감이 거의 없던 가난했던 그 어린 시절, 논밭에 있는 모든 것, 이를 테면 나무나 풀들이 모두 좋은 장난감 재료가 되었다. 그 당시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학교에 있는 풍금(오르간) 1대가 고작이었고, 그나마 여러 가지 제약이 있어서 마음대로 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논밭에 지천으로 널려 있던 보리를 활용하여 우리는 소리를 내는 악기를 만들었다.
어느 날 학교 가는 길에 어느 한 사람이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면 30여 명의 남녀학생 모두가 서로 다투어 보릿대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보리 맨 윗마디 밑에 2-3센티 정도 자르고, 한 뼘 길이로 보리모가지 쪽을 잘라서 마디에서 위로 1-3센티 정도 짜개 위를 불면 높고 고운 소리가 났다. 삐삐(하나, 둘), 빼빼(셋, 넷), 삐-삐, 빼-빼(하나-둘, 셋-넷)하고 불어 발을 맞춰 걸으며 즐겁게 학교로 갔다. 때로는 어른들로부터 귀중한 식량인 보리를 함부로 꺾느냐고 꾸중을 들었던 철없던 그 시절이 새삼 생각난다. 그야말로 자연을 벗 삼아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자연 속에서 자연을 즐기던 시절이었다.
보리만이 아니었다.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며, 양 엄지손가락 사이에 풀잎을 끼워 넣어 누르며 부는 풀잎피리, 어린이 손가락 굵기의 대나무 통을 5-6센티 길이로 잘라 한 쪽을 2-3센티 비스듬히 자르고 얇게 짜개어 풀잎을 끼워서 부는 대나무 피리, 봄에 소나무에 물이 오를 때, 소나무 껍질을 벗겨 나팔꽃 모양의 나팔을 만들어 버들피리를 꽂아 부는 소나무 껍질 나팔피리∙∙∙∙∙∙. 〮우리들은 철따라 계절에 맞게 여러 가지 악기를 만들어 불며 즐겁게 놀았었다. 값 비싼 장난감이 널려 있는 요즘 아이들은 그 놀이기구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추억 셋.
청 보리를 보면 어린 시절 풋보리 타작을 하던 그 때의 추억 때문에 눈물이 난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 어머니께서는 내게 점심으로 풋 보리죽 한 사발을 차려주셨다. 나는 묽은 죽사발을 잠시 쳐다보다가 수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양 손으로 죽사발을 움켜쥐고 훌훌 마셨다. 그러면 어머니께서는,
“야야, 얹힐라. 수저로 천천히 먹어라.”
“어머니, 수저로 뜰 건더기가 있어야지요. 어서 먹고 보리모가지 따러 가야겠어요.”
나의 이 말을 듣던 어머니께서 빈 상을 들고 돌아 서실 때, 빈 죽사발에 어머니의 눈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었다. 건더기가 없는 죽,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온 아들에게 멀건 국물만, 그것도 한 번 후루룩 마셔버리면 그만인 초라한 식사를 내놓을 때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이제 내 나이가 그 때의 어머니보다 더 지난 요즘에 와서야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안쓰러움과 더 이상 줄 것이 없는 어머니로서는 남몰래 눈물을 삼키셨으리라.
어머니와 함께 꼴망태와 대소쿠리를 메고 우선 풋보리가 잘 자란 마을 앞 작은 아버지네 논으로 갔다. 온 들판이 잔잔히 파도치는 청 보리 바다에는 벌써부터 보리모가지를 따는 사람들로 널려 있었다. 마치 넓고 푸른 바다에서 고기잡이배들이 떠있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들은 크고 토실한 풋보리 모가지를 따는 배고픈 이 땅의 부모 형제들이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오직 그것뿐이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보리가 깔끄러워 팔뚝이나 손가락이 깎이고 찔려 피가 흘러도 보리모가지를 가능한 한 많이 따야만 했다. 집에 돌아가 큰 가마솥(쇠죽솥)에 푹 쪄서 덕석이나 멍석에서 짚신짝으로 살살 문질러 까락을 몽글게 하고, 보리껍질을 벗겨 토실토실한 풋보리 쌀을 만들어서 죽을 쑤어 먹거나, 볕에 말리기도 했었다. 또 풋보리를 솥에 볶아 확독에 갈아서 밥이나 죽을 쑤어 먹기도 하였다. 초라하고 볼 품 없는 재료를 가지고도 다양한 음식을 마련하는 재주가 있었다.
부엌에서 죽을 쑤시는 어머니에게 나는 간곡히 부탁하기도 하였다.
“물이라도 많이 붓고 끓이세요, 우리 형제 죽물이라도 배불리 먹게요.”
그러면 어머니는 살기 어려운 이 때, 배를 채울 식량은 없는데 물로 배통만 키우면 어쩌라고 그러냐고 하셨다. 어머니의 눈물로 죽 그릇을 채우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삼삼하다. 그래도 많은 식구들이 밥상 대신 죽상을 바라만 보고 있다가, 죽이 적당히 식으면 두 손으로 죽사발을 움켜쥐고 훌훌 순식간에 마셔 버렸다. 수저가 필요 없었다. 손의 수고도 덜며 한편 어머니의 설거지까지도 도와드리는 셈이었다. 먹고 돌아서면 다시 배고픈 성장기에 이러한 죽이라도 원 없이 많이 먹고 싶은 것이 소원이었다.
보리와 죽, 어머니의 눈물이 한 화면에 자꾸 겹친다. 그 어머니의 애처로운 심정을 왜 그 때는 몰랐을까?
추억 넷.
소나무에 물이 오르는 어느 봄날!
나는 어머니를 따라 집에서 시오리도 넘는 깊은 산중까지 가서 어리고 날씬한 질 좋은 소나무를 골라 소나무 껍질을 벗겨 오기도 했었다. 부족한 식량 대용으로 소나무껍질을 벗기는 일이 시골 사람들의 일과였다. 하루는 톱으로 소나무를 베는 중에 소나무가 예상치 않게 넘어져 어머니가 소나무에 치어 허리를 많이 다친 적이 있었다. 어머니를 풀밭에 누워 계시게 하고 소나무 껍질을 망태 가득이 벗겨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어머니는 발을 절면서 힘들게 걸어오시다가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하셨다. 나는 망태를 놓아두고 어머니를 업고서 어느 지점까지 가서 누이고, 되돌아가 생키(소나무껍질) 망태를 짊어지고 다시 어머니 계신 곳까지 와서 짐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번갈아 옮기다 보니 벌써 어둠이 몰려오고 피곤과 허기로 나는 파김치가 되고 말았다. 어린 나이에 무섭고 배가 고파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어둠 속에서 “행모야!” 하고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예!”라는 대답과 함께 그만 엉엉 울고 말았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업고, 나는 생키 망태를 메고 집에 도착했다. 어머니를 방에 누이고 우리 형제가 둘러 앉아 불쌍한 어머니를 쳐다보면서 울었던 그 날을 생각하니 가난 때문에 힘겨웠던 삶이 생각나서 또 눈물이 흘렀다.
벗긴 쇠가죽 같은 생키 천을 앞마당 빨래 줄에 널면 흡사 무명베에 밤 껍질 물을 들인 것처럼 불그스레했다. 담장 넘어 앞집, 뒷집, 옆집 등 집집마다 생키 천을 빨래 줄에 널어 말리는 광경이 마치 설 명절 이른 아침, 새로 지은 옷을 다림질하기 좋게 널어놓은 모습과 흡사했다. 잘 말린 생키를 디딜방아 또는 절구통에 넣고 찧어 쌀, 보리, 밀 또는 쑥과 함께 생키 밥을 짓거나 생키 가루를 보리나 밀과 섞어서 죽을 끓여 먹던 그 때가 생각난다. 먹고 살려는 눈물겨운 몸부림이었다고나 할까?
추억 다섯.
1943년경 해방 전전 해였던가, 일본사람들이 강제로 집 마당에 가족과 집의 크기에 따라 정해준 넓이에 들에서 쑥 뿌리를 파다가 쑥밭을 만들어놓고 쑥밥을 지어먹으라고 강요했었다. 학교에서는 쑥밥 도시락 검사를 하고, 마을에서는 행정요원과 긴 칼을 찬 순사가 밥 먹는 시간에 밥상검사 또는 수시로 부엌 찬장이며 밥솥을 열어 쑥밥인가 쌀밥인가를 조사하였다. 만일에 쑥밥에 쌀이 쑥보다 많이 섞여 있거나 상노인, 허약자, 병자를 위해 쑥밥 밑에 쌀밥을 감추었던 것이 들통 나면, 사정없이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 쌀을 모조리 빼앗아 가고 젊은 가장을 끌고 가서는, 벼 공출을 적게 내고 벼를 감추었다며 갖은 고문을 가하곤 했었다. 나라 잃은 설움에 식량마저 수탈당하는 정말 피를 토하고 싶은 일들을 겪던 시절이었다.
밭에 콩 심기를 강요하여 재배한 콩은 전량 공출(供出)하여 콩기름을 짜서 일본군 식용유나 군용 기름으로 사용하고, 기름을 짜고 난 콩 깻묵은 굶어 죽게 된 우리에게 구호 식량으로 나누어주어 먹게 하였다. 비린내 나는 썩은 콩 깻묵으로 잡곡을 섞어서 콩 깻묵 죽이나 밥을 만들어 먹고는 그만 배탈이 나서 며칠씩 누워 있어 눈이 십리나 깊이 들어갔지만 그래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개, 돼지도 먹기를 꺼려하는 썩은 콩 깻묵이나 보리쌀을 확독에 물을 붓고 갈아서 걸러낸, 보리 속껍질 등 보리 Em물을 쪄서 만든 보리개떡을 먹고 살아왔었다. 일제 말기의 불쌍한 우리 백성들의 모습이었다.
추억 여섯.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우리 백성들은 개, 돼지, 송아지 취급을 받으며 굶주리고 헐벗으면서 소같이 죽도록 공동작업, 강제 부역 등 갖은 고통을 겪으면서 죽지 못해 살아야 했다.
마을 단위로 1, 2개 공동 작업반을 조직하여 강제로 일본 군대와 일본 노무자 그리고 징용 간 가족의 농사일까지 무조건 돕게 하였다. 젊은 여성들에게 작업복인 몸뻬를 입혀 지게질과 쟁기질 등을 강제로 훈련시키면서 기능대회까지 실시하여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공출이라는 미명 아래 피땀 흘려 수확한 벼 90%를 빼앗아 갔다. 농토의 크기, 땅의 비옥도에 의해서 1차 공출량을 정하여 농가에 통보하고, 2차로는 가을철 벼가 누렇게 익으면 현지 작황을 조사하여 공출량을 정해서 공출하였다. 농토가 많은 농가나 농사가 잘된 농가는 10% 정도의 남은 식량으로 다음 해 봄, 보리 수확 때까지 먹고 살 수 있었으나 가난한 농가는 봄이 되면 식량이 떨어져 옛말 그대로 굶기를 밥 먹듯 할 수밖에 없었다. 가을에 수확한 밭곡식, 수수, 조, 콩, 고구마 등으로 겨울을 지나고 생키, 쑥, 콩깻묵 배급 등으로 목숨을 연명하던 그 때가 가장 어려웠었다. 보리수확은 아직 멀고, 먹을 것은 없고, 식량난으로 이 어려운 때를 일컬어 보릿고개라 하였다. 길고도 험난한 그 보릿고개를 넘으려면 보리쌀이 나오기 전에 미처 여물지 않은 청 보리, 풋보리 모가지를 잘라내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풋보리 타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푸르른 5월이다. 어리고 고운 잎새와 연녹색이 상쾌한 기분을 가져다주는 계절이다. 그러나 넓고 넓은 청 보리밭을 보면서, 그리고 마당가에서 자라는 푸른 보리 싹을 보노라니 마음이 시원해지기보다는 왠지 지난 시절의 어려움, 배고픔, 수탈, 그리고 어머니의 눈물이 떠오른다. 나에게 청 보리는 그냥 단순한 관상용 보리, 식량으로서의 보리 그 이상이었다. 그 청 보리는 내 어린 시절의 고향 모습과 그 시절의 삶의 애환이 눈물과 함께 묻어나는 추억의 먹을거리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기초반 김행모
싱그러운 5월이다. 나날이 새로운 옷으로 바꿔 입는 우리의 산하는 언제 보아도 부잣집 안방마님처럼 포근하고 정겹다. 5월은 그야말로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이다.
온 산과 들녘의 연한 녹색물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는다. 그 중에서도 들판의 5월 보리밭은 너무나 푸르다 못해 아련한 기억 속의 추억을 반추(反芻)하게 한다.
내 고향은 토끼와 발맞춘다는 심심산골 순창이다. 정년퇴직 이후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고향에 들러 논밭을 가꾸고 집안을 돌보고 있다. 어느 날 무심코 바라보니 마당가에서 보리가 자라고 있었다. 아무도 심거나 보살피지 않았는데도 봄이 되자 저절로 고개를 내민 보리의 강인한 생명력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 보리 싹을 보노라니 나라를 잃고 굶주림에 시달렸던 일제시대의 고향마을과 나라 잃은 백성들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나는 어느새 타임머신을 타고 50년 전으로 훌쩍 거슬러 올라갔다. 그 시절에는 보리에 얽힌 눈물겨운 사연들도 많았다. 아! 그땐 누구나 정말 그랬었다.
추억 하나.
일제시대, 우리 같은 소학교 어린이들은 꼬불꼬불한 밭길과 논길을 따라 한 줄로 서서 학교에 갔었다. 논밭에서 자란 보리를 보면서 거의 습관적으로 손에 잡히는 보리모가지를 무심결에 한두 개를 잘라, 앞서가는 친구의 무명 한복 바지 속에 슬며시 집어넣었다. 열 번 당하고 한두 번 정도 품을 갚는 장난이었다. 보리모가지의 잘린 부분을 위로 세워 살짝 바지 속에 꽂으면 작은 톱니 같은 돌기가 있어서 바지 가랑이를 털어 내리거나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소리 없이 위로만 기어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디딜방아 가랑이 같은 양다리 앞쪽 가운데로 가는 놈도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바지 뒤편 홈으로 기어 올라가면 당하는 사람은 어쩔 줄 모르고 펄쩍펄쩍 뛰었다. 그런 모습을 보는 우리는 뱃가죽이 아프도록 웃었다.
바지뿐만이 아니라 저고리 뒤 옷자락 속에 보리모가지 두세 개를 슬그머니 넣으면 스스로 기어 올라가 목으로 조용히 나오기도 했고, 팔소매로 슬며시 나오는가 하면, 길을 잘못 들어 겨드랑이로 기어오르다가 갈 길이 꽉 막혀 부드러운 겨드랑이 살만 괴롭히기도 했다. 당하는 친구는 온몸을 좌우로 가볍게 흔들기 시작하다가 차츰 심하게 앞뒤로도 흔들었다. 얼마나 껄끄럽고 고통스러웠을까. 당황해 하고 털어내려는 몸짓이 여간 우스꽝스럽지 않았다. 뒤따라가던 우리는 깔깔대며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서로의 경험으로 그 장난의 주범을 확인하고는 두 사람은 껴안고 웃었던 기억이 새롭다.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여기며 즐거워하던 추억들, 그것은 그래도 보리에 얽힌 유쾌한 추억이라고 할 수 있다.
추억 둘.
장난감이 거의 없던 가난했던 그 어린 시절, 논밭에 있는 모든 것, 이를 테면 나무나 풀들이 모두 좋은 장난감 재료가 되었다. 그 당시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학교에 있는 풍금(오르간) 1대가 고작이었고, 그나마 여러 가지 제약이 있어서 마음대로 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논밭에 지천으로 널려 있던 보리를 활용하여 우리는 소리를 내는 악기를 만들었다.
어느 날 학교 가는 길에 어느 한 사람이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면 30여 명의 남녀학생 모두가 서로 다투어 보릿대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보리 맨 윗마디 밑에 2-3센티 정도 자르고, 한 뼘 길이로 보리모가지 쪽을 잘라서 마디에서 위로 1-3센티 정도 짜개 위를 불면 높고 고운 소리가 났다. 삐삐(하나, 둘), 빼빼(셋, 넷), 삐-삐, 빼-빼(하나-둘, 셋-넷)하고 불어 발을 맞춰 걸으며 즐겁게 학교로 갔다. 때로는 어른들로부터 귀중한 식량인 보리를 함부로 꺾느냐고 꾸중을 들었던 철없던 그 시절이 새삼 생각난다. 그야말로 자연을 벗 삼아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자연 속에서 자연을 즐기던 시절이었다.
보리만이 아니었다.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며, 양 엄지손가락 사이에 풀잎을 끼워 넣어 누르며 부는 풀잎피리, 어린이 손가락 굵기의 대나무 통을 5-6센티 길이로 잘라 한 쪽을 2-3센티 비스듬히 자르고 얇게 짜개어 풀잎을 끼워서 부는 대나무 피리, 봄에 소나무에 물이 오를 때, 소나무 껍질을 벗겨 나팔꽃 모양의 나팔을 만들어 버들피리를 꽂아 부는 소나무 껍질 나팔피리∙∙∙∙∙∙. 〮우리들은 철따라 계절에 맞게 여러 가지 악기를 만들어 불며 즐겁게 놀았었다. 값 비싼 장난감이 널려 있는 요즘 아이들은 그 놀이기구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추억 셋.
청 보리를 보면 어린 시절 풋보리 타작을 하던 그 때의 추억 때문에 눈물이 난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 어머니께서는 내게 점심으로 풋 보리죽 한 사발을 차려주셨다. 나는 묽은 죽사발을 잠시 쳐다보다가 수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양 손으로 죽사발을 움켜쥐고 훌훌 마셨다. 그러면 어머니께서는,
“야야, 얹힐라. 수저로 천천히 먹어라.”
“어머니, 수저로 뜰 건더기가 있어야지요. 어서 먹고 보리모가지 따러 가야겠어요.”
나의 이 말을 듣던 어머니께서 빈 상을 들고 돌아 서실 때, 빈 죽사발에 어머니의 눈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었다. 건더기가 없는 죽,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온 아들에게 멀건 국물만, 그것도 한 번 후루룩 마셔버리면 그만인 초라한 식사를 내놓을 때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이제 내 나이가 그 때의 어머니보다 더 지난 요즘에 와서야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안쓰러움과 더 이상 줄 것이 없는 어머니로서는 남몰래 눈물을 삼키셨으리라.
어머니와 함께 꼴망태와 대소쿠리를 메고 우선 풋보리가 잘 자란 마을 앞 작은 아버지네 논으로 갔다. 온 들판이 잔잔히 파도치는 청 보리 바다에는 벌써부터 보리모가지를 따는 사람들로 널려 있었다. 마치 넓고 푸른 바다에서 고기잡이배들이 떠있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들은 크고 토실한 풋보리 모가지를 따는 배고픈 이 땅의 부모 형제들이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오직 그것뿐이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보리가 깔끄러워 팔뚝이나 손가락이 깎이고 찔려 피가 흘러도 보리모가지를 가능한 한 많이 따야만 했다. 집에 돌아가 큰 가마솥(쇠죽솥)에 푹 쪄서 덕석이나 멍석에서 짚신짝으로 살살 문질러 까락을 몽글게 하고, 보리껍질을 벗겨 토실토실한 풋보리 쌀을 만들어서 죽을 쑤어 먹거나, 볕에 말리기도 했었다. 또 풋보리를 솥에 볶아 확독에 갈아서 밥이나 죽을 쑤어 먹기도 하였다. 초라하고 볼 품 없는 재료를 가지고도 다양한 음식을 마련하는 재주가 있었다.
부엌에서 죽을 쑤시는 어머니에게 나는 간곡히 부탁하기도 하였다.
“물이라도 많이 붓고 끓이세요, 우리 형제 죽물이라도 배불리 먹게요.”
그러면 어머니는 살기 어려운 이 때, 배를 채울 식량은 없는데 물로 배통만 키우면 어쩌라고 그러냐고 하셨다. 어머니의 눈물로 죽 그릇을 채우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삼삼하다. 그래도 많은 식구들이 밥상 대신 죽상을 바라만 보고 있다가, 죽이 적당히 식으면 두 손으로 죽사발을 움켜쥐고 훌훌 순식간에 마셔 버렸다. 수저가 필요 없었다. 손의 수고도 덜며 한편 어머니의 설거지까지도 도와드리는 셈이었다. 먹고 돌아서면 다시 배고픈 성장기에 이러한 죽이라도 원 없이 많이 먹고 싶은 것이 소원이었다.
보리와 죽, 어머니의 눈물이 한 화면에 자꾸 겹친다. 그 어머니의 애처로운 심정을 왜 그 때는 몰랐을까?
추억 넷.
소나무에 물이 오르는 어느 봄날!
나는 어머니를 따라 집에서 시오리도 넘는 깊은 산중까지 가서 어리고 날씬한 질 좋은 소나무를 골라 소나무 껍질을 벗겨 오기도 했었다. 부족한 식량 대용으로 소나무껍질을 벗기는 일이 시골 사람들의 일과였다. 하루는 톱으로 소나무를 베는 중에 소나무가 예상치 않게 넘어져 어머니가 소나무에 치어 허리를 많이 다친 적이 있었다. 어머니를 풀밭에 누워 계시게 하고 소나무 껍질을 망태 가득이 벗겨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어머니는 발을 절면서 힘들게 걸어오시다가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하셨다. 나는 망태를 놓아두고 어머니를 업고서 어느 지점까지 가서 누이고, 되돌아가 생키(소나무껍질) 망태를 짊어지고 다시 어머니 계신 곳까지 와서 짐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번갈아 옮기다 보니 벌써 어둠이 몰려오고 피곤과 허기로 나는 파김치가 되고 말았다. 어린 나이에 무섭고 배가 고파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어둠 속에서 “행모야!” 하고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예!”라는 대답과 함께 그만 엉엉 울고 말았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업고, 나는 생키 망태를 메고 집에 도착했다. 어머니를 방에 누이고 우리 형제가 둘러 앉아 불쌍한 어머니를 쳐다보면서 울었던 그 날을 생각하니 가난 때문에 힘겨웠던 삶이 생각나서 또 눈물이 흘렀다.
벗긴 쇠가죽 같은 생키 천을 앞마당 빨래 줄에 널면 흡사 무명베에 밤 껍질 물을 들인 것처럼 불그스레했다. 담장 넘어 앞집, 뒷집, 옆집 등 집집마다 생키 천을 빨래 줄에 널어 말리는 광경이 마치 설 명절 이른 아침, 새로 지은 옷을 다림질하기 좋게 널어놓은 모습과 흡사했다. 잘 말린 생키를 디딜방아 또는 절구통에 넣고 찧어 쌀, 보리, 밀 또는 쑥과 함께 생키 밥을 짓거나 생키 가루를 보리나 밀과 섞어서 죽을 끓여 먹던 그 때가 생각난다. 먹고 살려는 눈물겨운 몸부림이었다고나 할까?
추억 다섯.
1943년경 해방 전전 해였던가, 일본사람들이 강제로 집 마당에 가족과 집의 크기에 따라 정해준 넓이에 들에서 쑥 뿌리를 파다가 쑥밭을 만들어놓고 쑥밥을 지어먹으라고 강요했었다. 학교에서는 쑥밥 도시락 검사를 하고, 마을에서는 행정요원과 긴 칼을 찬 순사가 밥 먹는 시간에 밥상검사 또는 수시로 부엌 찬장이며 밥솥을 열어 쑥밥인가 쌀밥인가를 조사하였다. 만일에 쑥밥에 쌀이 쑥보다 많이 섞여 있거나 상노인, 허약자, 병자를 위해 쑥밥 밑에 쌀밥을 감추었던 것이 들통 나면, 사정없이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 쌀을 모조리 빼앗아 가고 젊은 가장을 끌고 가서는, 벼 공출을 적게 내고 벼를 감추었다며 갖은 고문을 가하곤 했었다. 나라 잃은 설움에 식량마저 수탈당하는 정말 피를 토하고 싶은 일들을 겪던 시절이었다.
밭에 콩 심기를 강요하여 재배한 콩은 전량 공출(供出)하여 콩기름을 짜서 일본군 식용유나 군용 기름으로 사용하고, 기름을 짜고 난 콩 깻묵은 굶어 죽게 된 우리에게 구호 식량으로 나누어주어 먹게 하였다. 비린내 나는 썩은 콩 깻묵으로 잡곡을 섞어서 콩 깻묵 죽이나 밥을 만들어 먹고는 그만 배탈이 나서 며칠씩 누워 있어 눈이 십리나 깊이 들어갔지만 그래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개, 돼지도 먹기를 꺼려하는 썩은 콩 깻묵이나 보리쌀을 확독에 물을 붓고 갈아서 걸러낸, 보리 속껍질 등 보리 Em물을 쪄서 만든 보리개떡을 먹고 살아왔었다. 일제 말기의 불쌍한 우리 백성들의 모습이었다.
추억 여섯.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우리 백성들은 개, 돼지, 송아지 취급을 받으며 굶주리고 헐벗으면서 소같이 죽도록 공동작업, 강제 부역 등 갖은 고통을 겪으면서 죽지 못해 살아야 했다.
마을 단위로 1, 2개 공동 작업반을 조직하여 강제로 일본 군대와 일본 노무자 그리고 징용 간 가족의 농사일까지 무조건 돕게 하였다. 젊은 여성들에게 작업복인 몸뻬를 입혀 지게질과 쟁기질 등을 강제로 훈련시키면서 기능대회까지 실시하여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공출이라는 미명 아래 피땀 흘려 수확한 벼 90%를 빼앗아 갔다. 농토의 크기, 땅의 비옥도에 의해서 1차 공출량을 정하여 농가에 통보하고, 2차로는 가을철 벼가 누렇게 익으면 현지 작황을 조사하여 공출량을 정해서 공출하였다. 농토가 많은 농가나 농사가 잘된 농가는 10% 정도의 남은 식량으로 다음 해 봄, 보리 수확 때까지 먹고 살 수 있었으나 가난한 농가는 봄이 되면 식량이 떨어져 옛말 그대로 굶기를 밥 먹듯 할 수밖에 없었다. 가을에 수확한 밭곡식, 수수, 조, 콩, 고구마 등으로 겨울을 지나고 생키, 쑥, 콩깻묵 배급 등으로 목숨을 연명하던 그 때가 가장 어려웠었다. 보리수확은 아직 멀고, 먹을 것은 없고, 식량난으로 이 어려운 때를 일컬어 보릿고개라 하였다. 길고도 험난한 그 보릿고개를 넘으려면 보리쌀이 나오기 전에 미처 여물지 않은 청 보리, 풋보리 모가지를 잘라내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풋보리 타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푸르른 5월이다. 어리고 고운 잎새와 연녹색이 상쾌한 기분을 가져다주는 계절이다. 그러나 넓고 넓은 청 보리밭을 보면서, 그리고 마당가에서 자라는 푸른 보리 싹을 보노라니 마음이 시원해지기보다는 왠지 지난 시절의 어려움, 배고픔, 수탈, 그리고 어머니의 눈물이 떠오른다. 나에게 청 보리는 그냥 단순한 관상용 보리, 식량으로서의 보리 그 이상이었다. 그 청 보리는 내 어린 시절의 고향 모습과 그 시절의 삶의 애환이 눈물과 함께 묻어나는 추억의 먹을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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