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 그녀는 진정 자유인이었다

2006.06.03 08:19

이기택 조회 수:80 추천:17

황진이, 그녀는 진정 자유인이었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이기택




   내가 황진이의 전기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내 나이 열일곱 살이던 중학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재능과 용모가 뛰어난 그녀가 하필이면 기생이 되어 자유자재의 삶을 살았으며, 40여 년이라는 짧은 삶을 살다 간 그녀가 참으로 애석(哀惜)하다고 생각하였었다. 노년에 이르러 다시 그녀의 전기소설을 읽고, 새삼 많은 감명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녀를 출중한 미모와 예능을 지닌 기생으로만 간과(看過)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녀의 진가는 서녀로 태어나서 그 시대의 반상적서(班常嫡庶)와 남존여비(男尊女卑)의 높고 두꺼운 사회제도와 인습의 벽을 뛰어넘고, 또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15 살의 어린 나이에 자유인임을 선언이라도 하듯 기계에 투신한 그 자신만만한 용기와 더불어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삶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는 여성해방의 선각적인 표상(表象)이며,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했던 그 시대에 자유인의 삶을 살았던 그녀였다.

입센(Ibsen.Henrik)의 희곡 ‘인형의 집‘에 나오는 주인공 노라(Nora)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으나, 남편이 인형과 같은 노리개로 사랑했음을 알고, 남편과 세 자식을 버리고 인간다운 인간의 권리를 찾아 나섰다. 지금까지도 세상에서는 노라를 여성해방의 표상적 인물로 지칭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황진이는 이 노라보다도 한층 더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노라는 문학 작픔의 주인공인데 반하여 황진이는 실존인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래부터 자유로운 존재이며, 누구나 자유롭게 살고싶어하지만,실제로 자유롭게 산 사람이나 살아가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제도나 인습은 늘 인간을 구속하고 가로 막는 까닭이다. 어쩌면 인간에게는 자기 본심대로 자유롭게 산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는 듯하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에 있다. 자기본심대로 사는 것이 최대의 삶이며, 가치 있는 삶일 것이다. 그러려면 물질이나 정신이 진정 자유로워야 한다. 곧 마음을 닦아 어떤 어려움이나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 같은 평화와 여유를 가지고 가장 높고 넓은 의식으로 모든 것을 수용하고 포용할 수 있으며, 막힘과 걸림이 없는 순리의 삶, 곧 대자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는 진리의 삶이고, 완전한 인간의 삶이며, 그것이 곧 참 사람의 삶이고, 성인의 삶이라 할 것이다.


   청초 우거진 곳에 자는다 누었는다
   홍안은 어디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들어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서러 하노라


  이 시조는 천하의 호걸 백호[林悌]가 평안감사로 부임하는 길에 송도를 지나며, 황진이를 찾았으나,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말에 정신없이 제문과 제물을 갖추어 노방에 묻힌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읊은 감회의 일단이다. 백호의 이 시조야 말로 수 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황진이의 진가를 알려주는 호재라 아니할 수 없다. 비록 후일 백호는 자기 정적들로 하여금 좋은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었지만.

조선조 중종 연간에 태어난 황진이는 개성 아전의 딸인 진현금과 황 진사의 아들과의 결혼할 수 없는 사이였으나, 뜨거운 사랑 속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미모에 활달한 성격으로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성장하면서 교양과 지성미까지 갖추게 되었다. 황잔이를 사모하다 불귀의 객이 된 한 총각의 죽음은 그녀로 하여금,

   “녹녹히 한 사내픔에 안겨 평생 노리개는 될 수 없다. 기생이 되어 천하 사람들에게 골고루 완상하게 하리라.”

하고 기적에 입적 하게 된다. 사서삼경을 읽고, 시, 서, 음율에 모두 뛰어난 그녀는 문인, 석유(碩儒)들과 교유하며, 그들을 매혹시켰다. 지족선사(知足禪師 ),화담 서경덕, 벽계수 등과의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서른 살이 넘도록 시집가지  않고, 높은 절개와 서리 같은 향내로 일관하였으나, 천하의 호걸 선전관(宣傳官) 이사종(李士琮)과 만나 6 년 간의 결혼생활을 하였다.

사십 남짓해서 증병이 들자 유언을 남기기를,
“내가 죽거든 산에 묻지 말고, 내가 평소에 많은 사람과 접촉하였던 길거리에 묻어주며, 묻기 싫으면 그대로 개천가에 버려서 오작의 밥이 되게 해 달라.”
고 하였다.

그녀는 사람됨, 용모와 몸매, 그리고 그의 가무와 시문, 참으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그의 모든 것을 오늘날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해서만도 우리를 경탄케 한다. 그러므로 그는 한낱 기녀가 아니라 만능 예술인이었던 것이다. 그가 짧은 삶에서 남겨놓은 여섯 수의 시조는 당시의 본격적인 시인들도 추종할 수 없는 최고의 걸작들이다.

그녀는 우리 역사에서 참으로 드물게 보는 예외적인 여자였으며, 탁월한 능력으로, 슬기롭게 장벽들을 극복하고, 유유자적한 삶을 살다 간 진정한 자유인, 대 자유인이었다. (2006,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