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림질

2006.06.18 20:06

권영숙 조회 수:97 추천:15

다림질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야)  권영숙


현관문을 들어서며 내 눈은 베란다 빨래걸이에 먼저 갔다. 일요일 이 시간이면 어김없이 딸아이의 교복을 걷어다 다림질해야 하기에 2박 3일간의 야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서도 옷 다릴 생각을 먼저 했다.

사흘 전, 스카우트 지도자 훈련에 참가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많이 망설였다. 아이들 끼니 걱정, 아내 없이 이틀을 홀로 지내야 하는 남편을 생각하니 선뜻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알아서 잘 할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라는 남편의 말을 믿고 훈련에 참가했었다.

계절은 분명 봄인데 겨울날씨 같은 쌀쌀한 날씨 덕에 목감기가 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기침 때문에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훈련에 참가하기 전까지는 낫겠지.’하는 나대로의 처방으로 신청했던 것인데 막상 출발할 때는 감기가 더 심했다. 출발 전부터 몸과 맘이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산속에서 맞이하는 밤은 더 없이 쓸쓸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이틀 밤을 텐트 속에서 지내야하는 야영훈련은 생각보다 고되고 힘들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보다 더 추운 날씨에 지리산 골짜기에서 한데 잠을 자도 끄떡없었는데…….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나이 탓이려니 싶어 내 자신이 우울해졌다. 종잇장 구겨지듯 마구 구겨진 내 마음이 훈련이 끝나는 그날까지 몸과 맘을 힘들게 했다.

돌아오는 발걸음은 더욱 무거웠다. 훈련에 참가하기 전에 들었던 목감기는 목소리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심해졌고 내가 집에 돌아오기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집안일들이 눈앞에 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면 기꺼이 맞이하자는 마음으로 현관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하며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처럼 맘을 다잡았다. 먼저 아이들 교복을 다려야지. 그리고 청소를 시작해야지. 설거지를 하고 밥을 안쳐야지. 나 나름대로의 처리할 일의 순서를 정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데 베란다에 눈이 간 순간 꼼꼼하게 잘 다려져 걸려있는 아이들 옷이 내 마음을 환하게 만들어 주었다. 풀을 먹인 것처럼 빳빳하게 다려져 있는 아이들 교복이 힘들었던 지난 시간을 잊게 했으며 굳었던 몸과 마음을 풀어 주기에 충분하였다. 돌아와서 힘들어할 아내를 생각하며 아이들의 구겨진 교복을 다렸다는 남편의 말에 그 동안 집안일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속상해 했던 서운한 마음이 입안의 달콤한 아이스크림처럼 스르르 녹아내렸다.

다림질 할 일이 어디 옷뿐이겠는가. 사람들의 마음에도 수없이 많은 구김이 생기게 되는 것을……. 내가 남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며 구겨지기도 하고, 내가 뱉은 한 마디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깊을 골을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은 일은 꼭 하고야 마는 성격 탓에 욕심쟁이로 통했다. 부모님은 그런 나에게 언니 오빠들에게는 못 챙겨주는 준비물도 어떻게 해서든지 손에 들려 주셨다. 그런 생활이 몸에 밴 나이기에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 주기를 원하며 내 삶의 방식에 가두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나의 욕심에 반기를 들 듯, 큰딸아이는 동생이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으면 슬그머니 양보해 버린다. 서로 가져가기를 원하는 우산은 동생에게 주어버리고 만다. 그런 딸아이를 물러 터졌다고 핀잔을 주곤 하였다. 무슨 일이든지 똑 소리 나게 하는 동생을 칭찬하며 은근히 큰애의 자존심을 건드리기도 했으리라. 남들은 자상하고 가정적이라는 남편에게도 더 자상하고 더 헌신적이기를 바라며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도 했으리라. 나의 욕심 때문에 남편과 아이들의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주름을 만들어 주기에 바쁜 세월을 보내지 않았을까.

구겨진 옷을 다림질하는 일은 지나칠 수 없는 주말 일과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옷에 만들어진 주름을 펴는 일만 중요하게 여겼지 마음 속 주름을 펴려는 노력은 왜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남에게 만들어 준 주름들, 내 마음 속 깊이 자리한 고랑들이 옷에 생긴 주름 못지않게 자리하고 있을 텐데 말이다.

따끈한 다리미가 구겨진 옷을 반듯하게 펴듯 이제는 따듯한 사랑으로 마음 속 구김을 펴는데 노력해 봐야겠다. 하루를 마치고 현관문을 들어서는 이이들에게 “고래도 춤을 춘다.”는 칭찬 한 마디로 행여 생겼을 마음 속 주름을 반듯하게 펴 줘야겠다. 남편의 조그만 실수나 작은 다툼도 용서하는 마음과 사랑으로 깊어질지 모르는 골을 어서 빨리 채워줘야겠다.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