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 25(4)

2006.06.20 05:50

이기택 조회 수:116 추천:30

내가 겪은 6,25(4)
  -내가 본 북한 땅-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급) 이기택



  38선을 넘어 북한 땅에 들어서면서 나는 북한 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5년의 세월이 지난 북한은 과연 어떻게 변화하였으며, 남한과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궁금증이 우리들의 전진을 재촉하였다.


  이런  우리의 첫눈에 드러난 것은, 대부분 붉은 글씨로 아로새겨진
  “민주주의 조선인민 공화국 만세”
  “위대한 영도자 김일성 원수 만세”
등의 현수막과 산비탈이나 제방 둑에 높이 세워놓은 대문짝 같은 입간판들이었다. 처음으로  북한 땅을 보는 우리들은 마치 불온문서를 보는 것 같은 생각에 으스스하였다.


두 번째로 볼 수 있었던 것은 38선에서 원산에 이르는 지역(그들의 전방지역이었는지?)의 도로정비였는데, 이것은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해방 전의 목조교량들이 콘크리이트(concrete)교량으로 개축되었고, 도로의 일정거리마다 차량대피시설을 설치한 것이었다. 차량대피시설은 우리가 흔히 보는 교량이나  도로를 보수할 때, 옆길을 내는 것과 같이 옆길을 내고 콘크리이트로 유개시설을 한 개씩 설치하여 차량이 대피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북한의 치밀한 사전 전쟁준비를 확인할 수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셋째로 원산에서 본 자강도 인민위원회 건물이었다. 그 건물은 원산시의 동쪽변방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원산시내 복판은 함포사격으로 참혹하게 파괴되어 폭삭 주저앉았는데 이 건물은 제 모습 그대로였다. 해방 뒤 건축한 3충 건물로 규모나 건축기술면에서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앞서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일제가 36년 동안 우리나라를 중국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았던 까닭에 공업시설의 대부분을 만주에 가까운 북한에 두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해방당시 공업의 원동력으로서 발전시설과 공업시설의 87.6%가 북한에 편재해 있었고, 남한에는 겨우 12.4%에 불과하였으니 공업능력이 북한이 우월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기에 해방되고 한 동안 남한은 북한의 송전을 받지 않았던가.


  나는 원산의 도서관을 한 번 가보고 싶었다. 그것은 북한에는 그동안 어떤 책들이 나와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발동한 것이다. 월북문학가들의 동정도 알고 싶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읽었던 책들의 작가들, 특히
홍명희(1888-1958 소설가. 임꺽정 작가)
이기영(1896-? 소설가. 고향. 인간수업 작가)
이태준(1904-? 소설가. 재2의 운명. 왕자호동. 황진이 작가)등의 월북 이후 작품들이 궁금하였었다. 그래서 애써 원산과 함흥의 도서관을 찾아가보았는데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서관에는 마르크스 레닌(Marx,lenin)주의 사상에 관한 서적들은 원서를 비롯하여 많은 책들이 즐비하게 있었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고급지로 인쇄되어 있었다. 일반도서는 볼 것이 별로 없었다. 일제시대의 책들이 대부분이었고, 해방 후 나온 책이 별로 없었다. 함흥도서관에서 이기영 작 ‘토지’라는 소설책을 볼 수 있었는데,  하급 신문용지에 인쇄된  이 책은 해방 후 북한의 토지개혁에 의하여 농민들이 행복하게 농사짓고 잇다는 것이 주제였다.


  우리들은 안변, 원산을 거쳐 북진하면서 의외로 한가하였다. 적 후방으로 진출할수록 적이 버리고 간 총포나 탄약이 없었고, 아군의 소요보급량이 감소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은 보급수송용 차량으로 이스스 일제 4톤 트럭 한 대가 항상 함께하였는데, 이 차량은 징발된 차량으로서 차주와 차량이 같이 동원된 케이스였다.
차주는 40대 초반의 노련한 운전기사였다. 이 기사의 제안으로 흥남비료공장도 구경하기로 하였다. 일제 때의 비료공장은 어떻게 되었을까가 궁금하였던 까닭이다. 함흥에서 흥남은 남쪽으로 멀지 않았으며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흥남비료공장은 근래에 비료생산은 하지 않고, 군화를 제작하였던 것 같았다. 재고가 쌓여 있지는 않았으나  장교들의 반장화 그리고 사병용 군화를 제조하였던 자취가 그대로 있었다. 어쩌면 일정한 목표량을 제조하고 다시 비료공장으로 전환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여기에서도 우리는 북한의 전쟁준비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함흥으로 돌아와 삼수갑산 방향으로 진출하는 전방부대를 후속하여 신흥에 이르렀다. 그런데 사단의 임무가 우익사단인 3사단과 바뀌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수도사단은 청진방향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우리들도 북청으로 진출하였었다.


  그동안 북한 땅을 누비며 북청까지 왔으나 아직 그 유명한 북청 물장수는 못 봤지만, 북한은 해방 후 일사불란하게 사회주의 기치아래 끈질긴 전쟁준비를 해 왔음을 확인 할 수 있었고, 또한 그들의 확고한 무력적화통일 의지도 찾아볼 수 있었다. 이렇게 북한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 남한은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렇게 오랫동안 정신없이 전쟁준비에 몰두한 북한을 코앞에 두고 정녕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더더구나 전쟁발발 전 날 군인들을 외출외박과 휴가를 보내다니‧‧‧‧‧‧.


  사실 남한은 UN총회가 한국의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자유선거 실시를 결의하였으나, 이를 공산측이 거부하므로 1948년 5월 10일 가능지역인 남한에서만 총선을 실시하여, 부득이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인지도 모른다. 기라성 같은 애국자들이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신명을 다 바치고, 좌우합작에 노력했으며, 김구 선생님께서는 김일성을 찾아가기도 하셨다. 또한 이는 우리민족의 오매불망(寤寐不忘) 바라고 기다린 한이며, 소원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남북으로 분단된 단독정부가 수립되었으니 말이다. 분단된 조국은 이때 이미 6,25전쟁을 잉태하였으리라. 그리고 공산측은 전쟁준비에 여념이 없는데, 남한은 사회혼란이 극에 달하고 특히 북한에 동조하는 좌익분자들에 의한 대구폭동사건(1946, 10. 1), 제주도폭동사건(1948, 4, 3), 여순반란사건(1948, 10, 19) 등이 계속 일어나고, 혼란은 끊이지 아니하였으니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생각해도 아찔하다.


  이제 6,25전쟁도 반백 년 전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때 그 일들이 잊혀져 가는 것일까? 자칭 좌익이라고 호언(豪言)하면서, 위기에서 우리나라를 지켜준 맥아더장군을 살인자, 통일을 가로 막은 민족의 원수로 몰아세우는가 하면, 6,25전쟁에 희생한 영령들마저도 조국통일의 방해꾼쯤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으니 이 무슨 변고란 말인가. 남북협상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6,25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6월이 오면 언제나 나는 혼자 조용히 이 6, 25의 노래를 불러본다.
                          (2006. 6.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