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영웅들을 배출한 내 고향 장수

2006.07.02 11:56

고강영 조회 수:102 추천:14

서민영웅들을 배출한 내 고향 장수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야) 고  강  영


내 고향 장수(長水)에는 수분리(水分里)라는 마을이 있다. 물이 갈라진다는 동네다. 바로 그 마을의 한 귀퉁이에서 한반도의 서남부를 굽이쳐 흐르는 금강(錦江)과 섬진강으로 갈라져 흐르는 분수령을 이룬다고 해서 수분리인 것이다. 그 만큼 깊은 산골이다. 그런 두메산골이 내 고향 장수이다.
워낙 인적이 드물고 각박한 고장이어서인지 그 흔한 정승, 판서 한 사람 나지 않은 곳이다. 차라리, 벼슬만 높고 세도만 부리며 백성을 수탈하는 그런 벼슬아치 따위는 나지 않았기에 오히려 자랑스러운 게 내 고향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내 고향은 양반이 아니라 서민영웅을 배출했던 고장이다.

향교(鄕校) 건물로서는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된 장수 향교 입구에 지금도 비각 하나가 서 있다. 충복(忠僕) 정경손(丁敬孫)을 기리는 비석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군은 고을마다 휘젓고 다니면서 향교를 불태웠다. 전국의 향교가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오직 장수향교만 화를 면하여 임진왜란 이전의 향교 건물이다. 이 향교를 구한 이가 바로 이 향교지기의 종인 정경손이었다. 전란 때문에 모두 집을 비우고 도망치고 없는데 유일하게 남아 향교를 지키던 이 종은 불태우러 온 왜적에게 당시 전복을 입고 오성위패(五聖位牌)를 모신 자리에서 경서를 읽으면서 왜적을 향해 큰 소리로 내 목부터 먼저 베고 향교로 들어가라고 호령하였다고 한다. 이에 왜병들은 정경손의 당당함과 그 충정에 감복되어 들고 온 횃불을 냇물에 던져 버리고 향교에 ‘본성역물범(本聖域勿犯)’이란 방을 붙이고 물러가니 그 뒤를 따르던 왜병들도 장수향교를 침범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랑스러운 그 서민이 내 고향 장수사람이다.

서민영웅은 또 있다.  물이 깊고 많은 고장이라 하여 장수인데 그 장수에서 감영(監營)이 있는 전주로 가는 옛 길목에는 깊은 소(沼)가 있고 그 둔덕에 타루비(墮淚碑)라는 비각이 있다. 이 타루비는 현감을 배행하던 아전이 순절한 뜻을 기리고자 세운 비이다.
어릴 적에 비각 옆의 암벽에 물을 끼얹어 바위에 그려진 검붉은 빛의 어른어른한 그림을 확인해 보곤 했었다. 분명히 누군가가 그린 그림은 틀림없는데 무슨 그림인가는 알 수 없는 아리송한 암벽화였다. 다만 위쪽이 꿩 그림이고 , 아래쪽이 말 그림이라 구전되고 있기에 그렇게 보면 그런 것 같았다. 지금은 도로 확장공사로 자리를 옮겨 놓았으나 비문에 보면 배리의 성은 백씨로 알려졌다.

1678년(숙종 4년) 3월 22일 당시 장수현감 조종면이 전주감영에 가려고 말을 타고 장척마을 앞 바위 비탈을 지나는데 길가 숲 속에서 졸던 꿩이 말발굽 소리에 놀라 푸드득 날아가니 이에 말이 놀라 한쪽 말발굽이 절벽 아래 소(沼)에 빠졌다. 급류에 휩쓸린 현감이 목숨을 잃게 되자 주인을 잃은 아전 백씨는 통곡하며 손가락을 깨물어 꿩과 말을 그린 뒤 타루라는 두 글자를 바위에 새겨놓고 자기도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 서민 역시 내 고향 장수사람이다.

서민 영웅은 또 있다. 지금은 남산 사당에 모셔진 의암(義岩) 주논개(朱論介)의 충절비(忠節碑)다.
임진왜란 전에 불우하고 가난했던 논개는 당시 장수 현감이던 최경회(崔慶會)의 부인 밑에서 일을 거들며 살았었다. 부인이 죽자 최경회의 재취가 되었는데 남편이 진주(晋州)병사로 전근하게 되어 따라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회는 진주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남편이 전사하자 논개는 원수를 갚으려고 기생으로 등록하여 승리에 도취한 왜군의 승전잔치에 잠입하여 왜장을 끌어안고 진주 남강에 투신하여 살신성인을 했다. 그 서민 역시 내 고향 장수사람이다.

이들이 장수삼절(長水三節)로 추앙을 받는 장수가 낳은 서민영웅들이다. 겉으로는 도학이나 찾고 속으로는 백성들을 수탈한 그 많은 명문거족들에 비해 얼마나 순수하고 자랑스러운가. 나는 그런 영웅들을 배출한 내 고향을 사랑한다. 내가 그런 충절의 고장 장수에서 태어나 장수에서 자랐으며 장수에서 살고 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나는 영원한 장수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