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2006.07.08 10:39

정현창 조회 수:94 추천:22

화두(話頭)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야) 정 현 창







  “왜 ‘이목구비(耳目口鼻)’라고 했을까?”

김 학 교수께서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야간반 수강생들에게 던진 화두(話頭)다. 작년 9월에도 기초반 교육 중에 교수께서는 학생들에게 엉뚱한 질문을 하셨다. “아기가 태어나서 ‘이목구비(耳目口鼻)’ 중에 어떤 기관을 제일 먼저 사용할까?” 하는 내용이었다.

많은 여학생들이 입이라고 대답하였다. 아기가 태어나서 제일 먼저 먹으려고 운다는 이야기였다. 또 다른 여학생은 자기의 세 아이를 낳은 경험과 태(胎)라는 글씨가 코와 입을 본 따서 지어졌다고 코가 제일먼저라고 주장하였다. 아이가 태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숨을 쉬는 일이라고 했다. 모두가 일리가 있고 또한 아이를 낳아 길러본 여성들이라 직접경험에 의한 주장이니 내 어이 내 배 아파서 아이를 낳아보지도 못했고 갓 태어난 아이를 가슴에 안고 젖도 먹여보지 못하였으니 아기에 대한 주장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지 무슨 주장을 할 수 있을까마는 내 생각은 좀 달랐다. 아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눈, 코, 입은 사용하질 않았으나 귀만은 태속에서도 사용하고 있었으니 귀가 먼저라고 주장했었다.

‘이목구비’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 수태의 과정에서 먼저 만들어진 순서로 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느 방송국에서 방송했던 다큐멘터리가 생각났다. 배란에서 정자와의 수정을 거쳐 어머니 자궁에 착상하여 아기로 자라나는 과정을 방송했었다. 그때는 자세히 보질 못했으나 아마 귀가 먼저 생기고, 눈, 입, 코 순서대로 생긴 게 아닐까. 그래서 순서를 이목구비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이목구비’라고 처음 말한 사람은 산부인과 의사였을까?

거울 앞에서 가만히 얼굴을 쳐다본다. 둥근 얼굴에 눈, 코, 입, 귀들이 각자 제자리에서 받은 바 임무에 충실하고 있다. 우리들이 흔히 말할 때는 얼굴 옆에 따로 붙어있는 귀는 빼고 ‘얼굴에 눈코입이 있다.’라고 한다. 귀(耳), 눈(目), 입(口), 코(鼻)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왜 한자로는 이목구비라고 말할까?

얼굴을 보면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게 양옆으로 튀어나온 귀다. 그리고 눈썹이 있는 까만 눈이 보이고, 조그맣고 빨간 입이 보인다. 코는 옆에서 보면 잘 보이나 앞에서 보면 눈에 잘 뜨이지 않는다. 색깔도 얼굴색과 똑같아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제일 잘 보이는 순서대로 이목구비라고 했을까?

우리들이 ‘눈, 코, 입’이라고 하는 건 얼굴 위에부터 눈, 그리고 코, 맨 아래에 있어 입이라고 위치에 따른 순서대로 말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목구비’도 어떤 순서 때문이 아닐까. ‘이목구비’ 순서대로 얼굴을 본다. 귀는 얼굴 밖에 붙어 있고, 눈은 제일 위에, 그리고 입은 제일 아래, 코는 중앙에 있다. 그러면 얼굴의 제일 밖에서부터 중앙으로 ‘이목구비’라고 하지 않았을까.

한참이나 ‘이목구비’의 순서가 생긴 이유를 생각하던 나는, 지금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나 하며 깜짝 놀랐다. 교수께서 던진 화두는 이런 뜻이 아니지 않았을까. 그럼 그 답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남자직원들은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을 할 때가 다가오면 대표와 면담신청을 한다. 급료는 올리지 않더라도 직급을 올려 달라는 내용이다. 남자들은 정년퇴직 당시의 직급으로 죽을 때까지  불려진다. 과장으로 퇴직했으면 과장, 교장으로 퇴직했으면 죽을 때까지 교장으로 불려지기 때문에 퇴직당시의 직급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체면을 유별나게 생각한다. 관혼상제는 물론 일상생활에서 겉치레를 위하여 돈과 시간을 너무 많이 쏟는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에 너무 과민반응을 보인다.


‘이목구비’든, ‘비구목이’든 어떻게 불려지느냐가 뭐 그리 중요한가. 귀는 잘 듣고, 눈은 잘 보고, 입은 아름다운 말과 음식을 잘 먹고, 코로는 숨 잘 쉬고 냄새를 잘 맡으면 되는 것인데, 주객이 전도되었다. 요즘사람들은 자신은 잃어버리고 오직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고 불려지는가에만 온통 산경을 쓰는 것 같다. 교수께서 던지신 화두를 생각하면서 자신(自身)은 없고 체면만을 위하여 살아온 나를 되돌아본다. 이번 휴일엔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고, 어떻게 부르던 전혀 관계치 않고 조용히 앉아서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생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탈바꿈하는 곤충들처럼 체면과 거짓의 껍질을 하나씩 벗는 귀중한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06. 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