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누운 어머니의 손톱

2006.07.11 07:20

이은재 조회 수:118 추천:14

돌아누운 어머니의 손톱
행촌수필문학회 이은재




하얀 망초꽃과 노란 금계국의 물결이 출렁이는 6월이 가고 칠월이 오면 들녘은 더 짙푸른 물결로 바람에 눕는다. 연녹색으로 듬성듬성 가녀려 보이던 어린 벼는 어느덧 뿌리를 내려 푸른 융단을 깔아놓은 듯 바람에 일렁이고, 사뿐사뿐 날아온 하얀 왜가리 떼의 군무(群舞)에 들녘은 온통 평화의 물결로 일렁인다. 호남선 기차를 타고 차창 밖으로 스치는 칠월의 영상을 보며 학창시절에 애송하던 이육사의 詩 ‘청포도’를 읊으며 하루를 연다.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봐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련

이육사의 시 ‘청포도’의 배경이 된 곳은 경북 영일군 도구리라고 한다. 그곳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대규모 포도밭이 있었던 곳이다. 항일운동과 구금생활에 지친 심신을 달래려고 도구리에 내려온 이육사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포도밭을 보며 시상(詩想)을 떠올린 것으로 전해진다. 계절적인 감각 속에 조국의 광복에 대한 기대, 환희를 상징적으로 담아 노래한 이육사의 ‘청포도’를 칠월이 시작되면 나는 입에 달고 다니며 주저리주저리 읊곤 했다. 이 시를 읽지 않고는 근질거려 칠월을 고이 보내지 못했다.

칠월의 고향 하늘은 낮게 깔린 뭉게구름이 금방이라도 미루나무 우듬지로 떨어질 듯 불안한 얼굴로 흘러가곤 했다. 미루나무 아래 들마루에 누워서 정처 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 내 마음도 한없이 따라가곤 했다.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아득한 먼 그곳 그리움도 흘러가라 // 파란 싹이 트고 꽃들은 곱게 피어 날 오라 부르네// 행복이 깃든 그곳에 그리움도 흘러가라."
라고 노래한 김동진 작곡 ‘저 구름 흘러가는 곳’이란 가곡처럼 유년에 하늘을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 한없는 그리움을 떠올렸다.

봄에 딸기 수확이 끝나면 엄마는 포도밭으로 가셨다. 칠월에 포도밭에 가면 어머니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싱그럽게 들려왔다. 청포도 밭 아래서 엄마와 아버지의 도란도란 얘기소리에 포도는 한 알 한 알 단맛으로 익어갔다. 포도밭 이랑엔 옥수수가 일렁였다. 유난히 옥수수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엄마는 해마다 옥수수를 넉넉하게 심으셨다. 나는 김상용의 詩 ‘남(南)으로 창을 내겠소’에 나오는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라는 구절을 좋아한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 밭이 한참갈이 // 괭이로 파고 / 호미론 풀을 매지요. //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 웃지요.』(남으로 창을 내겠소 전문)

  하모니카 소리를 내는 옥수수 밭을 거닐며 나는 옥수수 잎을 스치는 바람에게 말하곤 했다.
"강냉이가 익으면 함께 먹어도 좋을 친구가 왔으면 좋겠다."
라고. 그러면 옥수수는 말하는 것 같았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고향이란 단어는 떠올리기만 하여도 마음이 푸근해진다. 고향엔 유년의 흔적이 있고, 늙으신 부모님이 계시고, 느티나무 같은 소꿉친구가 있기 때문일까. 어느 시골길을 달리다가 두엄 냄새를 맡게 되면 -어린시절엔 그토록 역겹게만 느껴졌던- 고향에 온 듯 마음이 포근해지고 정겨워 미소를 짓곤 한다. 여름밤에 모깃불 태우는 냄새, 추수 끝난 들녘에서 볏짚 태우는 냄새, 양철 지붕 위로 또록또록 떨어지던 빗방울 소리, 하루 종일 되새김질하는 어미 소의 여물 씹는 소리, 저녁밥 짓는 연기냄새 등 어느 것 하나 정겹지 않은 것이 없다.

고향에 가면 한편으로 서글퍼진다. 젊은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고향엔 마른 잎만 푸석거린다. 한창 일을 할 젊은이들이 없는 농촌은 힘겹기만 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없는 농촌은 희망도 없어 보인다. 북적거리던 시골학교는 점점 폐교될 위기에 놓여 동문들이 가까스로 모교를 구하려고 비상이 걸렸다. 내 모교도 전교생이 겨우 40명이라니…. 내가 다닐 땐 아침조회 때 운동장이 꽉 찼었다. 점점 인적이 끊겨 고요한 벌 끝에서 언제나 묵묵히 일만 하시는 부모님을 보면 와락 눈물이 어린다.

  이제는 내가 어머니에게 단 포도를 입에 넣어드릴 차례다. 군살 하나 없는 42킬로그램의 몸무게를 유지하며 그 많은 농사일을 맡아 하시던 어머니가 이제는 아프단 말씀을 자주 하신다. 손가락 마디마디, 무릎 정강이가 시리다고 하신다. 어머니의 열 손가락은 제대로 된 손톱 하나 없으시다. 손톱이 모두 뒤집혀져 있다. 얼마나 많은 세월동안 흙을 파며 잡초를 뽑으셨기에 굳은 뼈가 닳고 닳아 살점이 허물어져 손톱이 모두 돌아누운 것일까. 이제는 그만 일손을 놓으시라고 해도 기운 있을 때 일을 하신다며 여전히 들로 나가신다. 어머니가 그리워서 고향에 달려가건만 돌아올 땐 눈물만 가득 안고 온다.

임금을 사모하는 궁녀의 그리움을 안고 담장 위에 곱게 핀 능소화, 그 주홍색 능소화가 만발한 고향의 뜰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텃밭엔 옥수수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포도밭엔 청포도가 알알이 영그는 칠월의 고향은 또 얼마나 싱그러운가. 들녘에 지천으로 핀 망초꽃 무리는 아버지의 은발처럼 힘없이 바람에 누워도 벼랑을 타고 기어오르는 담쟁이넝쿨처럼 어머니의 강인한 손길이 있는 칠월의 내 고향….

흙에서 자란 내 마음, 아! 그리운 고향의 풀내음 소리…. 친구여! 강냉이가 익거든 옥수수 영그는 텃밭에서 만나자. 너를 위해 은쟁반에 옥수수와 청포도를 마련해도 좋으련?